유전 도시조 한반도 이주시기 고증 결과 보고
(劉荃 都始祖 韓半島 移住時機 考證 結果 報告)
劉 慶 相
그 동안 우리 문중에서 유전 도시조의 동도(東渡) 년도가 서기 1082년도로 기록되고 있으나 금번 중국 당나라 시대에 이미 이영전(邇英殿)이 존재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아래와 같은 고증 결과에 의하여 그 동도 년도는 5갑자(甲子) 착오로 인한 300년 앞선 서기 782년으로 고증되어 집니다.
고증항목
劉荃 都始祖가 서기 782년에 이주한 사실이 맞는가 여부를 규명한다.
종보 제 4호 劉脈 제 53페이지 및 강릉유씨 대동보(大同譜) 수권(首卷) 제 258페이지에 수록된 墓誌銘 원문에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으로 명기되어 있다.건중병자 년도는 중국 唐나라 연호로써 서기 796년도이다.즉 고려조가 아닌
한반도 신라/중국 당나라때에 맏아들 견규가 탄생했다고 지석문에 나와 있다.
墓誌銘 원문(原文)
墓誌銘에는 建中丙子年(796년도)생임을 밝히고 있다(아래사진)
족보(族譜)상에는
현재 족보상 堅規선조의 생년은 1096년으로 되어있다.(아래사진)
考證1
東渡 八學士가 남긴 詩文을 보자.
팽성임씨 대동세보 제1권(彭城林氏大同世谱卷之一)에서
http://cafe.daum.net/ptim/7waa/421?q=%BC%B3%BE%BE%BD%C3%C1%B6%20%BC%B3%C0%CE%B0%E6&re=1
팔학사는 바다를 건너 오시면서 각각 詩를 한수씩 述懷했다.
1. 劉荃:波濤闊矣兮,舟楫利逝-파도는 넓음이여,뱃길이 편히 가도다-
2.林八及:八人浮海兮,桂棹蘭檣
-여덟 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계수나무 돛대에 난초 삿 대로다-
3.許董:吾徒東矣兮,可以免禍-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다네-
4.宋奎:接淅而去兮,謝暗投-급히 가노니,암흑은 가고 광명으로-
5.權之奇:賢士出東兮,竭誠盡忠-어진 선비 동쪽으로 가니,지극한 忠과 誠 모두 끝이라-
6.孔德狩:見機而作兮,疎廣之徒-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7. 薛仁敬: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잘 나가던 李氏朝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 를 당하는 도다.-
8.崔冱 ;李老入海兮,殷道衰亡
-李氏 시대는 저물고<老> 완전히 지니<入海>, 은도(殷道)도 쇠망하는도다-
위의 薛仁敬과 崔冱가 읊은 詩文에 李氏王朝의 쇠망을 탄하고 있다.
宋代의 趙氏 왕조를 탄(嘆)한것이 아니다.
중국 唐나라는 李氏王朝,宋나라는 趙氏王朝였다.
송나라때(고려문종때) 오셨다고 한다면 시문의 왕조와 불일치한다.
서기 780년대의 唐나라 德宗李适과 代宗李豫(李氏들)
宋나라 宋英宗趙曙(송영종 조서) 宋神宗趙頊(송신종 조욱) 송대는 趙씨 왕조
考證2
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은 신라시대 시문(詩文)으로써
고려시대 시문이 아님을 증명해 보자.
<2013년 10월 25일 발간된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시문에서>
가.退朝 관련 시문들
108페이지 退朝歸路與諸公口號(퇴조하여 돌아가는 길에 읊다)
184페이지 和金翰林退朝詩(김한림의 퇴조시에 답하다)
198페이지 退朝後獨賦(퇴조후에 혼자 읊다)
퇴조는 궁궐을 퇴근하거나 떠남을 뜻한다.
신라시대의 궁궐은 경주(慶州)에 있었으며 고려시대 수도는 개경(開京)이었다.
도시조님께서는 당시 경주지역에 사셨다.고려시대 경주에는 궁궐이 없었다.
나.중국 使臣을 맞으며 관련 시(詩)들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시문에서)
1).204페이지 逢上國星軺故人( 중국에서 使臣으로온 친구를 만나다.
이곳의 星軺故人은 수레타고 온 즉 고위직 사절을 뜻한다.)
2).206페이지 送上國故人(중국의 옛친구를 전송하며)
당시 신라 서울 경주에 온 사신을 맞는 시문이다.
고려시대 시문이라고 한다면 왜 이 고급 사신이 개성으로 가지 않고 궁궐도 없는
고려시대 경주에 귀한 사신이 올 리는 전혀 없는 일이다.
다.客中寒食
"천년의 향기"294페이지 客中寒食(객지에서 맞는 한식)에서 보면
" 長安寒食又今年"
"올해도 또 장안에서 한식을 맞았나니"라고 한 천년향기의 해석은
長安에서 지내던 寒食을 올해도 맞는구나!(懷古)
지금 우리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는 멀리 한반도 객지에
오셔서 한식을 맞으며 소슬(蕭瑟)한 심회(心懷)를 한 수 의 시로 읇고 있다.
혹시 "장안의 화제"할때에 쓰는 장안이 아닐것이다.당시 장안은 경주일텐데 장안 즉 경주에서 맞는 한식을 올해도 경주 장안에서 맞네,이것은 아닐것이다.제목이 "객중한식(客中寒食)"이다.客地아닌 本國에 있을때의 寒食을 그리며 시를 읊은 것이다.
長安은 현재의 섬서성(陕西省) 西安을 말하며 역대 많은 중국왕조의 수도였다.
이곳에서는 지금 당(唐)시절의 수도(首都)를 말하고 있다.
考證3
묘지명(墓誌銘)
1.지석문(誌石文)을 보자.
中朝○○大夫行兵部尙書 劉公諱荃 辛卯四月初八日生 壬寅 二月初七日卒 享年七十二 配陇西李氏 对辰韩国夫人 己未生 癸卯六月初七日卒 享年四十五 墓永陽郡北鸣山面花枝洞亥坐上下封
建中丙子三月十五子居陀君堅規生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서기 796년 견규생)
이 지석문에 관해서는 종보 제 4호 53페이지 劉脈에도
올라 있지만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258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이곳에는 종보 제 4호 유맥에서는 中朝○○大夫로 ○으로 처리한 부분이 강릉유씨 대동보에는 중조 정헌대부(中朝正憲大夫)로 올라있다.
이곳의 중조(中朝)란 중국의 왕조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의 중조는 唐나라가 되며 고려시대의 중조는 宋나라가 된다.건중병자(서기 796년)에 아들 거타군 견규가 출생이라고 명기됨.
墓誌石文을 쓸때는 한자 한자에 영혼이 깃든 상태에서 기록됨을 알때에 建中丙子三月十五日(중국 당나라 서기 796년)주목하자.
이곳에서 꼭 서술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건중병자가 당나라 연호인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현행 족보에 기록하고 있는 1096년 堅規 탄생년도와 꼭 300년으로 맞아 떨어 지는가 .
이 대목이 바로 묘지명의"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이 기록이 아주 정확하다는 증거가 되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족보에는 이처럼 堅規는 서기 1096년생으로 되있다.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으로 명기되어 있다.
건중병자 년도는 중국 唐나라 연호로써 서기 796년도이다.
1096년과 796년간에는 정확히 300년의 차이가 난다.
5개의 60갑자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틀림없이 건중병자년에 태어났다라는 증명이 이 묘지명(墓誌銘)의 文句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견규탄생 서기 796년을 중심으로 환산한 도시조님의 연표는 아래와 같다.
劉荃 都始祖 東渡年度 착오분 300년 환산
따라서 유전(劉荃)시조의 한반도 동래 관련 연표는 아래와 같이 수정된다.
유전(劉荃) 관련 연표(年表) 수정
유전(劉荃) 출생년 AD 1051년(辛卯):宋仁宗 皇祐 3년/고려 文宗 5년을
변환=> AD 751년( 辛卯):唐玄宗 天寶10년/신라 景德王10년
유전(劉荃) 東渡년도AD 1082년(壬戌): 宋神宗 元豊5년/고려 文宗 36년을
변환=> AD 782년(壬戌): 唐德宗 建中3년/신라 宣德王3년
유전의 맏아들(劉荃長子) 견규(堅規) 탄생 년도
AD 1096년(丙子):宋哲宗 紹聖(소성)3년/고려 숙종1년을
변환=> AD 796년(丙子):唐德宗 建中丙子年 /(貞元)12년
당나라를 떠나온후 당나라 연호는 2년뒤인 AD 784년에는 흥원(興元)으로
다시 또 이듬해인 AD 785년에는 그 연호가 정원(貞元)으로 바뀌지만 통신이 없던
시대 고국을 떠나온 이민자의 개념속에는 계속 건중(建中)으로만 기억.
잠시 우리나라의 족보에 관하여 살펴보자.
자칫 우리는 족보란 아주 초창기부터 현재의 족보가 고스란히 잘 기록 보존되어 온 문중의 역사를 틀림없이 기록한 고귀한 문서로 생각 하기 쉬우나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 세보로 알려져 있으며우리 유전 도시조 후손의 최초의
족보는 1761년 신사보(辛巳譜)가 아닐까 생각할때에 유전 도시조 할아버지가 이땅에 오신후 1000년의 긴나긴 세월 족보 기록없이 구전(口傳)으로 그 가문을 지켜오다가 이제 처음으로 족보를 설정하면서 5갑자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우리 문중만의 일이 아니며 이땅에 사는 허다한 문중이 모두 대동소이 하다고 볼때에 크게 부끄럽게 숨길 일은 못될 것이다.
考證4
<劉荃 도시조의 저술 詩文集인 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중>
"昔忝邇英席"
"황공하게도 지난날 邇英席에서 공부하다"에 관해서
우리 劉荃 都始祖께서 이영석(邇英席)에서 공부하셨다는 귀한 대목의 싯구가 죽간일집에 올라있다.이 이영석은 통상 우리가 알고 있기를 중국 宋나라 궁중 교육기관으로
알고 있으며 현대의 중국인터넷에도 오직 송나라 "이영전"만이 검색되고 당나라의 이영전의 기사는 전혀 올라오지 않는다.저는 이 고증의 단계에서 죽간일집의 모든 시문의
情況이 모두 고려시대(중국 송나라에해당)가 아니고 신라시대(중국은 당나라)임을 알고
있던터에 이 고증 단계에서 오는 불일치를 해소해야되는 난관에 봉착했다.
수많은 날들을 중국 인터넷은 물론 일본과 미국의 인터넷을 검색했으나 당나라 이영전의
기사는 어느곳에도 없었다.거의 고증을 포기 단계에서 미국의 야후에
http://us.yahoo.com/에 검색어 "唐朝迩英"을 넣었을때에 딱 한 문건의 일본 견당사(遣唐使)가 당나라 사절로 가서 당시 당나라 대종(代宗)임금을 알현하는 대목에서 당나라 이영전이 나온 것이다.이외에는 또다시 단 한건의 당나라 이영전의 문건도 없었으니
우리 한반도에 거주하는 25만 劉氏 문중의 始源을 밝히는 귀한 순간이었다.
2013년 11월 27일 08시 당나라때에도 이영전(唐朝邇英殿)이 존재했음을 발견하다.
정말 다행이다.
이번 죽간일집 竹諫逸集 “천년의 향기”를 발간하면서 이 "邇英殿"에서 유전 도시조가 공부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려 때 동도 사실로 더욱 신빙성을 부여하는 듯하여 더욱 당나라 때의 이영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각국 인터넷망을 검색 하던 중 귀한 문건 일본 遣唐使(견당사)의 당나라 당시 임금 代宗 임금 알현을 기록한 "日中文化交流史"에서 중국 宋나라 외에도 이미 당나라에서 "이영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주 소중한 대목이다.
이러한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지 못했다면 우리 유전 도시조의 동도년도는 위와같은 많은 신라/당나라때 귀화의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히 고려조 서기 1082년도로 잘못 고착화 할뻔했음을 생각할때에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지 모른다.
잠시 한 대목만 관련 기록을 옮겨 보겠다.
如东日报
http://www.rdkx.gov.cn/Newspapers_News.asp?id=25994
당나라때 이영전(唐朝邇英殿)의 존재를
<日中文化交流史>에서 발견하다.
日本木宫泰彦《日中文化交流史》一书载:
번역:<日本木宫泰彦의 일중문화교류사 제 일권에 기록됨>:
필요한 부분을 이곳에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번역한다.
《日本续记》宝龟九年(778年)十月乙未条载
最后在代行遣唐使大使职责的副使石根的率领下,于宝龟八年(777年)出发,抵达海陵
(如东),后到扬州,准备去长安,然而“海陵观察使陈少游言:寇乱以后,馆驿凋散,
得中书门下牒,限二十员进京,石根请加二十三人,许之。”这样,其中有43人被批准从
扬州出发到长安。“九年(778年),朝见代宗皇帝于宣政殿,时上元日也。
逾月,复见于迩英殿”。
<번역문>
<니혼쇼키>호키 9년(778년) 10월 을미조에 기록되어 있다.
최후로 견당사 대사 직책의 부사 이시네의 영솔하에 호키8년
(777년)출발하다.
(宝龟:즉 호키 이 일본 년대는 서기 770-780년사이의 연대임)
해릉(海陵)(지금 중국 강소성 南通 如東縣)에 도착후 扬州에 다달아 長安(당시 당나라
수도 지금의 西安)에 갈 준비를 하다.그런후에 해릉 관찰사 지소유가 말하기를:
왜구의 난 후로는 역참조차 모두 쇠락해져 중수문의 첩문을 받은 스무명내의
인원이 입경하고
石根请加의 23명과 함께한 43인이 승인을 얻어 양주를 떠나 長安에 도착했으며 호키
9년(778년-즉 유전 도시조의 이주 782년의 불과 4년전임)에
代宗 임금을 선정전(宣政殿)에서알현했는데 이때가 정월 보름이었다.
달포후 이영전(邇英殿)에서 다시 또 알현하다.逾月复见于迩英殿
잠시 정리해 보면
죽간일집의 시문과 팔학사 동도시에서 고려시대에 동도해 오심이 아님이 밝혀지고 서기 782년도에 동도해 오셨다는 사실로 결정되는 것은 지석문에 나와있는 대로 建中丙子年 맏아들 堅規가 3월 15일 탄생했다는 墓誌石 銘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도년도가 고려조가 아님이 죽간일집 시문과 팔학사 시에서 규명되고 지석묘의 연대와 현행 1082년 동도 주장과는 꼭 5갑자 300년의 오차가 발생하므로 당 덕종조/신라 宣德王 3년 서기 782년 동도 사실이 확실히 증명된다.
지금까지도 당나라 이영전을 검색했으나 더 이상의 다른 唐朝의 이영전(邇英殿)관련 문건은 한건도 더 찾을 없으니 어찌 천운(天運)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당나라 이영전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고려시대에 한반도에 이주한 시조로 기록이 계속 될 뿐했으니 이 어찌 문중의 도시조 동도 시기를 고증해 내는 과정에서의 귀중한 계기가 아닐 수있으랴.
우리 도시조는 중국의 병부상서를 지내시다가 한반도에 이주해오셔서 죽간일집이라는 귀한 문중의 역사 문헌집을 남기신 덕택에 또한 함께 오신 팔학사 분들이 남기신 시문에서 그 고증의 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음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족보없이 천년의 세월을 지내오다가 후손이 족보를 처음 설정하면서 오직 5갑자 300년 오차를 발생시켰으며 그외의 기록사항들은 죽간일집과 묘지석 명문에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천년의 세월을 이처럼 잘 지켜온 후손들의 노고가 오히려 숭고하고 눈물겹다.
이 考證文을 기쁜 마음으로 劉荃都始祖님 靈前에 올립니다.
2013년 12월 2일
첨부
日中文化交流史
출전 주소:아래
http://www.cnjpetr.org/html/zhongriwanglaimingrenlu/qiantangshi/2010/0817/24120.html
http://blog.163.com/yuanyei_999/blog/static/28134589201042322140803/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의 존재가 확인된 문서임-
중국 당나라때 일본의 견당사 중국 조정 방문 기록
아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중국에서 오신 유전(劉荃) 도시조(都始祖)님께서는
그의 저서 죽간일집의 시문 憶故國(고국을그리다)에서
昔忝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邇英席에서:공부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영전(邇英殿)아란 宋나라때
궁궐 교육기관으로만 알고있던 문중에서는 이 시문의 구절을 들어
함께 같은 배로 오신 평택/나주 임씨 임팔급 林八及 시조님 및 남양송씨 송규 宋奎시조님들의
당나라/신라때 동도해 오심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들어
우리 강릉유씨 문중에서만은 송나라/고려조 동도해 오심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번 고증과정에서 이 일본의 당나라 견당사(遣唐使:당나라 일본의 중국 파견 사절단)
의 기록중 서기 778년도 중국 당나라 代宗 임금을 궁중의 이영전(邇英殿)과
선정전(宣政殿)에서 만나는 대목에서 당나라때에도 이영전이 있었음이
확인되는 귀한 문서를 찾아낸것이다.따라서 송나라 이영전이아닌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에서 공부하신 것이다.
중국 당나라때에 일본의 중국 국가사절 파견 즉 견당사(遣唐使) 기록을 이곳에 올린다.
——“遣唐使与如东”新探 (四)
□ 吴剑坤 (接上期) 十 又一批遣唐使团的抵达和离开
“在历史上,除了第十三次遣唐使到过如东外,还有没有其他批次的遣唐使团到过这一
江海交汇的唐寥角嘴呢?”对于这一问题,不少人在苦苦地追索。阅读下面的一些资料
后,你定会有惊喜的发现,当然,也许会给你留下无法摆脱的疑问。
日本木宫泰彦《日中文化交流史》一书载:第十一次遣唐使“持节副使小野石根出使
时,于宝龟八年(777年)六月二十四日出海,七月三日到达扬州海陵县。回国时,第
三舶曾一度被逆风吹回,第二次出发时,风向适宜,于宝龟九年(778年)十月十六日
出发,同月二十三日到达肥田国松浦郡桔浦。”“回国启程地点:第一舶,苏州常熟县;
第二舶,同上;第三舶,扬州海陵县;第四舶,楚州盐城县。”“经由南路到达唐土的地
点和回国时启程的地点,虽有时有些不同,但是大致是一样的。这些地点都在苏州、扬
州、明州、楚州等接近扬子江口的地区。”回国的出发时间为“第三舶,九月;第一、
二、四舶,十一月”。
《日本续记》宝龟九年(778年)十月乙未条载,
<일본속기:日本续记 호끼9년:778년도>10월 을미조에 나온다
日本光仁朝遣唐使回国后,“第三舶副
使小野滋野奏称”:到达扬州海陵县后,“臣等八十五人发州入京,…… 持节副使小野
朝臣石根…… 等四十三人,正月十三日到长安城。”宝龟九年十一月乙卯条载,“第一
舶判官大伴继人等奏称”:扬州府都督观察使兼长使陈少游“只许放六十五人入京,十月
十六日发赴上都…… 减却人数,定二十人。正月十三日到长安。”
从史料中,我们可以获得这样的推断:日本光仁朝宝龟八年(777年)第十一次遣唐使
在持节副使小野石根的率领下,于六月二十四日入海,七月三日到达扬州海陵县。次年
回国时的启程地点为,第一、二舶,苏州常熟县;第三舶,扬州海陵县;第四舶,楚州
盐城县。其中,第三舶是九月九日离开海陵县的。也就是说,公元777年日本第十一次
遣唐使入唐第一站为海陵县。次年回国时,三号船在判官小野滋野的率领下于重阳节从
海陵县入海。第三天遇逆风,船被吹上沙滩而损坏,经过修复,于一个月后的十月十六
日再次出海,七天后的十月二十三日到达日本肥前。
人们不禁要问:第十一次遣唐使“究竟到过海陵县的何处?”“从海陵县的何处入海?”“三
号船在何处修理?”史料上未见载。那么,如东有可能吗?回答是肯定的。
在唐开元二十一年(733年),分天下为15道,淮南道治于扬州。唐至德元年(756
年),置淮南节度使,置广陵等13郡。次年,改广陵郡为扬州,下辖江都、江阳、六
合、海陵、高邮、扬子、天长7个县。如东当年属于海陵县。圆仁的《行记》说:“午时
到江口,未时到扬州海陵县白潮镇桑田乡东梁丰村(今如东曹埠)……留学僧等到守捉
军中季赏宅停留。”“七月一日晓……泛艇从海边行,渐觅江口……其江稍浅,下水手等
曳船而行……卖芦人……答曰‘此是大唐扬州海陵县淮南镇大江口’……亦更向淮南镇
去。从江口北行十五里许,即到镇家,镇军等申云:‘更可还向于掘港庭’”。这里的
“镇”、“守捉军”都是唐朝时的边防军事单位,通常“镇”设大使和副使各一人为负责人
。掘港当时即在江口左近处。当第十一次遣唐使船队到达扬子江口的海陵县时,经过多
日海上颠簸的遣唐使团必会登陆休整,而后或者溯横江而上,或从内河乘船去扬州。
当年,如东与今南通市区(时称胡逗洲)之间隔着一条横江。胡逗洲,在唐开元十年
(722年)时设置盐官,属扬州海陵县,隶淮南道。不久,由于军事上的需要,狼山为
浙江西道节度使管辖,狼山北的胡逗洲也就成为浙江西道常州地界了。《唐大和上东征
传》记述了唐天宝七年(748年)鉴真和尚第五次东渡日本时过“常州界狼山”的事。再
加上“唐乾符二年(875年),时设狼山镇,置镇遏使,归浙江西道节度使节制。”
(《南通市志》)。由此可知,公元748——875年间,胡逗洲和狼山一带均属于常州
地界,而不属于扬州海陵县界。而第十一次遣唐使是公元777年到达海陵县的。因此
,第十一次遣唐使不可能到达横江以南常州界的胡逗洲、狼山一带,而只能到达位于横
江北的海陵县,如东从掘港到双甸一带恰恰首当其冲,具有极大的可能性。
再说,十一次遣唐使回国时从海陵县出发的第三舶,在如东出发的可能性也就更大了
。王芸生在《古代中日关系之追溯》一文说:这批遣唐使离开长安,“六月,监使杨光
耀送至维扬。秋九月,舣船各出扬子江口,候风两月……入海。”这第三舶在海陵县的
“扬子江口,候风两月”后入海,不在如东又会在哪里呢?如果在如东以西的江北岸港口
入海,那么,从行程上推算,修理船舶的地点很可能在掘港到如东北面的沿海一带
。 另外,圆仁等一行来到皋东,绝非偶然,而是早有筹划的。他们这次从南路入唐,其海
上航路和方向调度直指大江口一带,圆仁《行记》上的“侧帆指坤”一语,除了用帆方法
外还点出了航向;再有,船上有人懂得识别江海水色,遣唐使船接近大陆,多次写水
色:“海色浅绿”、“白、绿”“至白水,其色如黄泥,人众咸云,若是扬州大江口流
水……”,船上新罗译语说“闻道掘港难过,今既逾白水,疑逾掘港欤?”这充分说明,在
圆仁等一行之前,肯定有人到过掘港或者至少到过掘港附近的海域。因为日本第十二次
遣唐使在公元804年于福州附近登陆,所以说不定圆仁船上的新罗译语对掘港海域的了
解来自第十一次遣唐使船上的新罗译语。这也从侧面印证了第十一次遣唐使完全可能在
掘港附近停留过,或者是登陆,或者是启程回国,或者是修理船舶,也许这三者都有可
能。
十一 唐使泛海献身
公元770年,年届62岁的日本光仁天皇即位,取年号为宝龟,他于781年去世。他在位
的11 年里,曾经两次派出遣唐使团。如前所述,其中于宝龟八年(唐代宗大历十二
年,公元777年)派出的第十一次遣唐使很可能到过如东,更有可能从如东启程回国,
这要早于圆仁一行50多年。
从《日中文化交流史》所载:“光仁天皇宝龟六年(775年)六月,最初任命正四位下佐
伯今毛人为大使、正五位上大伴益立、从五位下藤原鹰取为副使。但到次年十二月,罢
免益立等,改任从五位小野石根、从五位下大神末足为副使。到了宝龟八年(777年)
四月将出发时,大使今毛人称病不动,朝廷因以石根为持节副使,行大使事。”“宝龟七
年(776年)闰八月,庚寅,先是遣唐使船到肥田国松浦郡合蚕田浦,积月余日,不得
信风,既入秋季,弥违水候,乃引还于博多大津,奏上曰:‘今既入于秋季,逆风日
扇,臣等望待来年夏月,庶得渡海。’是日敕:‘后年发期,一并来奏。’”和王芸生《古
代中日关系之追溯》一文所载:“帝御殿,授节刀,命之曰:‘卿等奉使,言语必和,礼
患必笃,毋生嫌隙,毋为诡激。判官以下,违者便宜从事!’乃各赉御服。船发至肥前
松浦郡,阻风不能前,还博多,请待来岁。寻罢益立,以中左辨小野石根、备中守大神
末足代之。八年春,令使者拜神祗于春日山下,行至摄津,今毛人以病引还,令副使
持节服紫,假行大使事。燕赏有差。”中,我们可以知道这批遣唐使团因大使佐伯今毛
人害怕海上出事而“称病不动”,最后在代行遣唐使大使职责的副使石根的率领下,于宝
龟八年(777年)出发,抵达海陵(如东),后到扬州,准备去长安,然而“海陵观察使
陈少游言:寇乱以后,馆驿凋散,得中书门下牒,限二十员进京,石根请加二十三人
,许之。”这样,其中有43人被批准从扬州出发到长安。“九年(778年),朝见代宗皇
帝于宣政殿,时上元日也。逾月,复见于迩英殿”。
九年(778年)9년(AD 778년에) 代宗 임금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알현했는데 이때가 정월 보름이었다.달포 지나서 이영전(复见于迩英殿)에서 다시 알현하다.
四月,在他们准备离开长安回国之际,唐代宗“遣中使赵宝英为押送使”陪同他们回日
本,赵宝英时任内侍省掖庭令,是一位宦官。而日本遣唐使持节副使石根考虑到海上航
行风险很大,因此向唐代宗婉辞曰:“海路渺茫,风汛无常,万一颠踬,惧损盛意。”但
是,唐代宗告诉他已经命人在扬州为赴日使团打造船舶,“诏仍护行”。六月,唐朝赴日
使团一行39人在大使赵宝英、判官孙兴进等的率领下与日本遣唐使一行由监使杨光耀陪
送至维扬。然而,他们到扬州时发现赵宝英乘的船还没有造好,经过朝廷批准,唐朝的
使者便搭上日本遣唐使船
。 于是,“秋九月,舣船各出扬子江,候风两月”。 赵宝英坐第一舶,船上还坐着副使小
野石根、 判官大伴继人等一百六十多人。于十一月五日从常熟出发,驶进大海,八
日,在海上突然遇到强烈风暴。武安隆在《遣唐使》一书中说:“第十一次遣唐使第一
船,归途中,副使小野石根等三十八名日本人和唐使赵宝英等二十五名中国人,都被卷
入海底。此后,该船被倒下的桅樯打成两半,判官大伴继人和终老唐土的藤原清河的女
儿喜娘等四十一人在船尾,另五十六人在船头……”。
从航线和航程推算,唐使赵宝英等中日使节遇难处当在如东以东海域。
唐使赵宝英等25名中国人和38名日本人为了增进两国人民的友谊和加强文化交流,献出
了他们宝贵的生命。在古代中外交通史上,赵宝英是第一位见于记载奉皇帝之命出使远
国的宦官,可以说是郑和的先驱。同时,赵宝英也是唐代历史上唯一以身殉职的遣日高
级使臣。 后来,中国使团的其他成员在日本受到十分热烈而隆重的欢迎,日本天皇并且下令为他
们返唐专门打造新船。同时任命从五位下布势清直为送唐客使。据《续日本后记》载:
在为唐朝副使孙兴进等饯行之际,日本天皇特别“赙赠宝英絁八十匹、绵二百屯,以慰藉死者”。 赵宝英,这位为国捐躯的唐朝赴日使者和曾经到过海陵(如东)的日本遣唐副使小野石
根的名字永远镌刻在中日友好交流的史册上。(未完待续) |
중국 唐 德宗朝 연호의 변동
서기 779년(乙未) 당 德宗 취임 신라 惠恭王 15年
서기 780년(庚申) 당 德宗 建中 1年 신라 宣德王 1年
서기 781년(辛酉) 당 德宗 建中 2年 신라 宣德王 2年
서기 782년(壬戌) 당 德宗 建中 3年 신라 宣德王 3年<劉荃始祖 한반도 오심>
서기 783년(癸亥) 당 德宗 建中 4年 신라 宣德王 4年
서기 784년(甲子) 당 德宗 興元 1年 신라 宣德王 5年
서기 785년(乙丑) 당 德宗 貞元 1年 신라 元聖王 1年
서기 786년(丙寅) 당 德宗 貞元 2年 신라 元聖王 2年
서기 787년(丁卯) 당 德宗 貞元 3年 신라 元聖王 3年
서기 788년(戊辰) 당 德宗 貞元 4年 신라 元聖王 4年
서기 789년(己巳) 당 德宗 貞元 5年 신라 元聖王 5年
서기 790년(庚午) 당 德宗 貞元 6年 신라 元聖王 6年
서기 791년(辛未) 당 德宗 貞元 7年 신라 元聖王 7年
서기 792년(壬申) 당 德宗 貞元 8年 신라 元聖王 8年
서기 793년(壬申) 당 德宗 貞元 9年 신라 元聖王 9年
서기 794년(甲戌) 당 德宗 貞元 10年 신라 元聖王 10年
서기 795년(乙亥) 당 德宗 貞元 11年 신라 元聖王 11年
서기 796년(丙子) 唐 德宗 貞元 12年 신라 元聖王 12年<丙子年 三月十五日 長子堅規 生>
AD 782년 唐德宗朝 건중 3년에 劉荃 始祖께서 八學士의 일원으로 한반도 東渡해 오신 다음 다음해인
AD 784년에는 연호가 建中에서 興元으로 바뀌며 또 다시 이듬해인 AD 785년에는 다시 연호가 貞元으로 바뀐다.
멀리 일생일대의 개인적 대 변혁기인 한반도 이주후에 당시 교통도 통신도 없던 시절 고국의 연호가
바뀐것을 알지 못하고 그 머릿속 시계는 오직 오매불망 고국을 떠나올 당시의 임금과 연호만이 기억되고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이주하여 오신후 14년이 지나 陇西李氏(농서는 지금 경상북도 星州이다)와의 사이에서
맏아들을 建中丙子(새 연호로는 貞元丙子 해당) 3월 15일에 長子堅規를 얻었다고 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동도(東渡) 팔학사 후손 문중간의 형제애적인 유대강화를 바라면서
서기 782년도에 당나라 조정에서 대신을 지내다가 한반도로 건너오신 여덟분의 후손 즉
팔학사(八學士)중 그 후손이 지금 족보를 가지고 전해져 오는 문중은 평택나주 임씨 시조이신
임팔급(林八及) 후손 문중과 남양송씨 송규(宋奎) 후손 문중 그리고 강릉/거창 유씨 유전
(劉荃) 후손 문중 이 세 문중만이 현재 족보가 밝혀져 있다.
함께 멀리 한반도에 한 배를 타고 건너오신 여덟분의 후손들이 마땅히 그 동도 년대가
이렇게 서기 782년도로 밝혀진만큼 지금까지 그 후손의 시원이 족보를 통하여 밝혀진
평택/나주 임씨 및 남양송씨 문중 그리고 강릉/거창 유씨 문중간에는 아름다운 유대와
공동 학술 연구/조사등이 상호 연대하여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란다.
동일 고증문 다시보기
저의 이와같은 고증문에 관하여
기탄없는 다른 의견과 지적 기다리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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