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諫逸集과 江陵劉氏 劉荃
始祖의 東渡 時期 考證 관련
죽간일집의 134수의 유전 도시조님의 시문에서 동도 시기를 검토 할 때에 아래에 표기 하는 한수의 시문에서 고려조/송나라 때의 동도 사실이 확실히 확인되기도 한다.이는 함께 동도해 오신 8학사 후손 문중에서 지켜오는 신라/당나라때의 동도 주장이 옳지않음을 증명케 되는 사실이기도 하다.그러나 아래의 사유로 답을 도출할 수없게 되었다.
죽간일집 시문
1.憶故國 고국을 생각함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82페이지 수록
昔忝邇英席 지난날 황송하게도 이영각(邇英閣)에서 공부를 하다니
猥蒙聖主知 외람되게도 임금님의 알아줌을 입었음이라.
官遷賈誼日 벼슬이 가의처럼 좌천한 오늘
輦過馮唐時 신분이 한나라 풍당의 위치쯤은 되었던 시절에
未效涓埃報 성은을 조금도 갚지 못한체
谩尋湖海期 부질없이 산수만 찾아왔다오
經年旅宦久 나그네 벼슬아치 해 지나 오래니
何日不追思 어느날에 고국 생각 아니 할손가
이 시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영전에서 공부했다는 대목이다.
이영전에 대해서 검토해 보자.
邇英(이영)은 邇英殿 또는 邇英閣으로 불리는 송나라때의 왕궁내의 교육기관으로써 임금 자신을 비롯한 당대 문장 대신들이 강론하던 영재 교육기관이다.서기 1035년 송(宋) 인종(仁宗) 연호 경우(景祐) 2년 1월 28일에 송 인종 趙禎이 설치하다.이때에 연의각(延義閣)도 함께 설치하다.
중국 인터넷 검색(아래)
宋史-正文 卷010 本纪第十 仁宗二-史部 - 是何年
2011年2月27日 - 景二年春正月二十八日,设置迩英阁和延义阁, 将《 尚书 无逸篇书写于屏。 二月初三,到延福宫观大乐。初八,原来给事资善堂者都受到恩惠。十三日,...
www.4hn.org/files/article/html/0/157... 2011-2-27 - 百度快照
百度快照 <=宋史 검색
迩英阁
宋 代禁苑宫殿名。义取亲近英才,故名
邇<가까울이>英<영재영>...영재를 가까이 하다.
宋仁宗 왕 자신과 蘇轼 등 당대의 문사들이 직접 강론했다.
輦過馮唐에 대하여 잠시 예기하기로 하다.
馮唐은 安陵人<安陵,在今河南鄢陵西北,为楚、魏相交之地>으로 汉文帝때에 中郎署长등 항시 말직에 있다가 汉武帝求贤良,有人推荐他,但他已年过九十,不能再做官 한무제가 현명한 제상을 구할때에 어떤이들은 풍당을 추천했지만 그는 이미 90세라 그직을 맡을 수가 없었으니.....이런예기다.
輦過馮唐이란 한무제 임금님의 연(輦)타고 馮唐 찾아온 그런 시절을 빚대어 본 우리 유전 선조의 중국 궁중 생활을 비추어서 은유 했음이랴.
즉 이영각(邇英閣)이란 1035년에 설치되었으며 이 이전에는 이영각(邇英閣)이란 교육 기관은 없었다.
百度快照 <=宋史 검색
迩英阁
宋 代禁苑宫殿名。义取亲近英才,故名
邇<가까울이>英<영재영>...영재를 가까이 하다.
宋仁宗 왕 자신과 蘇轼 등 당대의 문사들이 직접 강론했다.
輦過馮唐에 대하여 잠시 예기하기로 하다.
馮唐은 安陵人<安陵,在今河南鄢陵西北,为楚、魏相交之地>으로 汉文帝때에 中郎署长등 항시 말직에 있다가 汉武帝求贤良,有人推荐他,但他已年过九十,不能再做官 한무제가 현명한 제상을 구할때에 어떤이들은 풍당을 추천했지만 그는 이미 90세라 그직을 맡을 수가 없었으니.....이런예기다.
輦過馮唐이란 한무제 임금님의 연(輦)타고 馮唐 찾아온 그런 시절을 빚대어 본 우리 유전 선조의 중국 궁중 생활을 비추어서 은유 했음이랴.
즉 이영각(邇英閣)이란 1035년에 설치되었으며 이 이전에는 이영각(邇英閣)이란 교육 기관은 없었다.
우리의 유전(劉荃) 시조께서 이곳에서 공부한 것은 어떻튼 서기 1035년 이전이 될 수없으므로 동도 싯점이 고려/송나라 시기를 전혀 소급 할 수없다.따라서 팔학사중 타 문중에서 주장하는 신라/당나라 시조 동도설은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필자는 이 문제의 중요성에 비추어 혹시 중국 역사상 이 宋朝아닌 唐朝때에도 이러한 邇英閣이 있었나를 검토하기 위해서 중국의 각종 인터넷 포탈 사이트를 수 없이 검색해 보았으나 전혀 이러한 교육 기관은 없었다.
상기 시문의 "昔忝邇英席" (옛날 외람되게도 이영석에서 공부하다) 이 대목은 참으로 유전 시조의 궁궐 당시의 신분과 상황이 설명되는 귀한 대목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송나라때라고 단정 짓기에는 134수의 시중에는 퇴조(退潮)즉 궁궐에서 퇴근하다/또는 궁궐에서 떠나다.라는 의미에 준하는 비슷한 문장들이 너무나 많음을 볼때에 고려 개성 임금님 궁궐이 경주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위의 송나라 이영각에서의 공부하는 모습과 상호 풀수없는 양 시대의 구분에 어려운 점이 계속 상존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다.
시문 제목
退朝歸路與諸公口號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78페이지 수록에서 )
궁궐을 퇴근하고 나오는 길에 제공들과 함께 짓다.
退朝歸路의 退朝는 조정에서 퇴근하는 모습인데 이건 신라때의 경주아니면 안되는 구절 아닌가.즉 고려조와는 언어가 성립안되는.............
고려때는 三京제도가 있어서 경주도 삼경중의 하나였지만 실제적으로 임금이 살고 집무하지 않는 행정청에 불과한 곳을 이제 퇴근 하면서 퇴조(退朝)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
시문제목
與金翰林退朝詩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87페이지 수록에서 ) 김한림과 퇴조 하면서 쓴 시문_이곳에도 퇴조란 제목의 시를 쓰셨고,
시문제목
與諸宰臣登樓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87페이지 수록에서 )제 신하들과 함께 누각에 오르다.宰臣(재상과 신하)--이거 완전히 궁궐예기 아닌가.
시문제목
退朝後獨賦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87페이지 수록에서 ) 퇴조후에 혼자 한 수 지어보다.여기도 퇴조....
시문제목
逢上國人星轺故人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88페이지 수록에서 )중국에서 온 사신 친구의 수레를 맞지 하면서.이것은 사신이 왜 개성으로 안가고 경주로 왔나.개성에서 사신왔다가 경주 친구만나러 그 당시 수레타고 내려 왔을 수은 없고........즉 경주가 서울이었다면 신라시대이다.
시문제목
送上國故人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89페이지 수록에서 )중국에서 온 친구를 보내면서..당시 신라와 당나라간에는 많은 유학생과 사신의 왕래가 빈번했다.이 중국 친구가 경주 신라 수도를 왔던 것이 아니라면 과연 고려때에 경주 친구 찾아 왔을까.
이렇게 신라 시대의 궁중 퇴조(宫廷退朝)와 관련된 시문이 많음에 비추어 위의 소개된 송나라/고려조 때가 되는 이영(邇英) 이것은 상호 배치되는 개념이 되고 만다.
따라서 竹谏逸集의 연대를 신라때인지 고려때인지 가려 낼 수가 없다.
2.두번째 소개할 시문은 아래와 같다.
시문제목
泛舟遊海上说往蹟
(江陵刘氏大同譜首卷 第194페이지 수록에서 )바다에서 뱃노리 하며 옛이야기 하다.
西风吹荡一孤舟 외로운 배한척에 서풍 불어 닥치니
满目深愁正不收 눈에찬 큰 근심 가눌길 없네
河陽家国今何处 河陽 땅 우리집은 어드메인가
帆外江山是異州 돗대밖의 강산은 남의 나라라네
還烦马革要功在 싸움에서 공세운일 예기도 해보고
위의 시문에서 욧점은 河陽家國이 어드메뇨인데 선조님은 지금 고려인지 신라인지 어느땅에관해서 이 시를 읊고 계신지 우선 河陽만 가지고 보면 우리 경상도 영천땅에 하양읍이 있다.기록을 보면 "현종 9년(1018) 「하양」으로 개명한 후 현을 두었고,"라고 되어 있으므로 우리 한반도의 河陽을 지칭하여 시를 지으셨다면 당연히 연대가 1000년 이후가 되므로 고려조에 오신게 맞게 된다.
할아버지는 멀리 기계면에 사시다가 영천땅으로 이사 오신 것으로 볼때에 영천 河陽 땅에 집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외로운 배한척...하시는 싯구라던지 돗대밖의 강산은 남의 나라라네 하는 싯귀로 본다면 또 나라 國字를 쓴 것이라던지 또 싸움에서 공세운일 예기도 해보고..... 이러한 분위기는 옛날 중국에 계실때의 소회를 연관지어 부른 것으로 볼 때에 중국의 河陽땅에 집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 중국의 하양 땅에 관하여 살펴보자.
누구인가 거창읍사무소에 올려 놓은우리 劉荃시조 할아버지의 호적 기록에는 출생지가
中国江蘇省彭城双青縣珠芳村으로 되어있고 또 거창유씨 보첩에는 출생지가
中国河北省冀州市茂川城三里로 표기되어 있다.그리고 이곳에 나오는 中国河陽 이라는 곳은 中国河南省洛陽에 가까운 맹주시(孟州市)이다.이러한 3개소가 모두 우리의 서울-부산 거리권내에 존재한다.
한반도의 경상도 하양땅을 두고 시를 읊은 경우는 간단히 1000년 후의 고려조 동도 사실이 증명되지만 위의 시문의 내용을 본다면 옛날 젊은날 중국의 집을 그리는 것이 되서 당나라 때의 것이될런지도 모른다.또한 송나라 때가 될런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번 이러한 고증은 정말 명 판결을 하는 판사라도 어럽게 되어있다.
죽간일집의 퇴조등 신라 궁궐을 뜻하는 많은 시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나라때의 궁궐 교육기관인 이영각에서 공부하셨다는 이 한 말씀에 아무 것도 할 수없는 궁지에 빠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완전히 고증의 방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두 문맥이 배치되고 만다.
나는 이 정도 선에서 어느쪽으로 갈 수도 없으므로 백기를 들고 이상의 고증을 끝내고 휴식기에 들어 가기로 한다.
이영각(邇英閣)의 출현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최종 완성 고증문 보기
:http://blog.daum.net/rosy900/5663709
저의 이와같은 고증문에 관하여
기탄없는 다른 의견과 지적 기다리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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