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劉荃東渡時期考證

강릉유씨 유전 도시조 한반도 도래 년도는 서기 782년으로 밝혀지다.

송화강 2013. 6. 30. 21:36

 

                                     본 고증문은 2013.12.2일 강릉유씨 대종회에 제출된 문건입입니다.

                                             http://blog.daum.net/rosy900/5663718

                                                       

                                                       

 

 

    유전 도시조 한반도 이주시기 고증 결과 보고

   (劉荃 都始祖 韓半島 移住時機 考證 結果 報告)

 


                                                    劉  慶  相

                                                

그 동안 우리 문중에서 유전 도시조의 동도(東渡) 년도가 서기 1082년도로 기록되고 있으나 금번 중국 당나라 시대에 이미 이영전(邇英殿)이 존재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아래와 같은 고증 결과에 의하여 그 동도 년도는 5갑자 착오로 인한 300년 앞선 서기 782년으로 고증되어 집니다.

 

 

 

고증항목

 

 

劉荃 都始祖가 서기 782년에 이주한

사실이 맞는가 여부를 규명한다.

 

종보 제 4호 劉脈 제 53페이지 및 강릉유씨 대동보(大同譜) 수권(首卷) 제 258페이지에 수록된 墓誌銘 원문에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으로 명기되어 있다.건중병자 년도는 중국 唐나라 연호로써 서기 796년도이다.즉 고려조가 아닌 신라/당나라때맏아들 견규가 탄생했다고 지석문에 나와 있다.

 

묘지명 원문(原文)

 

 墓誌銘에는 建中丙子年(796년도)에 장자 견규 출생을 밝히고 있다

 

현재 족보상 堅規 생년은 1096년으로 되어있다.

 

세부적인 고증에 들어가 보자

 

고증1

 

東渡 八學士가 남긴 詩文을 보자.

  

팔학사는 바다를 건너 오시면서 각각 詩를 述懷했다.  

1. 劉荃:波濤闊矣兮,舟楫利逝

(파도는 넓음이여,뱃길이 편히 가도다)

2.林八及:八人浮海兮,桂棹蘭檣

(여덟 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계수나무 돛대에 난초 삿 대로다.)

3.許董:吾徒東矣兮,可以免禍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다네.)

4.宋奎:接淅而去兮,謝暗投明

(급히 가노니,암흑은 가고 광명으로)

5.權之奇:賢士出東兮,竭誠盡忠

(어진 선비 동쪽으로 가니,지극한 忠과 誠 모두 끝이라.)

6.孔德狩:見機而作兮,疎廣之徒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7. 薛仁敬: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잘 나가던 李氏朝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 를 당하는 도다.)

 

8.崔冱 ;李老入海兮,殷道衰亡

(李氏 시대는 저물고<老> 완전히 지니<入海>,

은도(殷道)도 쇠망하는도다.)

  

위의 薛仁敬과 崔冱가 읊은 시에서

李氏王朝의 쇠망을 탄하고 있다.

 

宋代의 趙氏 왕조를 탄(嘆)한것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가 당태종(唐太宗)부터 서기 907년 멸망할때까지 모든 왕은 李氏였으며 따라서 劉荃 도시조께서 팔학사와 동도해 오시던 서기 782년도의 당나라 왕은 당덕종(唐德宗) 이었으며 성명은 이괄(李适)로써 李氏였다.

 

만일 송나라때인 서기 1082년도에 동도해 오셨다고 한다면 이는

 이씨가 아닌 趙氏가 된다.

 

 서기 1082년도 宋나라 임금은 송신종(宋神宗) 조욱(趙頊) ...조씨

李씨가 아닌 趙씨였다.그러면 시문의 李씨와 다르게 된다.

 

 

위의 팔학사중 두분이 李氏王을 모시다가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서기 780년대의 당나라 德宗李适 代宗李豫(李氏들)

 

宋나라 宋英宗趙曙(송영종 조서) 宋神宗趙頊(송신종 조욱)  송대는 趙씨 왕조

 

 

 

 

 

고증2

 

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은 신라시대 시문(詩文)으로써 고려시대 시문이 아님을 증명해 보자.

 

<2013년 10월 25일 발간된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시문에서>

 

 

가.退朝 관련 시문들

 

108페이지 退朝歸路與諸公口號(퇴조하여 돌아가는 길에 읊다)

184페이지 和金翰林退朝(김한림의 퇴조시에 답하다)

198페이지 退朝後獨賦(퇴조후에 혼자 읊다)

 

퇴조는 궁궐을 퇴근하거나 떠남을 뜻한다.

 

 

신라시대의 궁궐은 경주(慶州)에 있었으며 고려시대 수도는 개성/개경(開京)이었다.

도시조님께서는 당시 경주지역에 사셨다.고려때 아닌 신라때에 이미 오셨음을 나타낸다.

 

 

나.중국 使臣을 맞으며 관련 시(詩)들

 

 

204페이지 逢上國星軺故人( 중국에서 使臣으로온 친구를 만나다.이곳의 星軺故人은 수레타고 온 즉 고위직 사절을 뜻한다.)

 

206페이지 送上國故人(중국의 옛친구를 전송하며)

당시 신라 서울 경주에 온 사신을 맞는 시문이다.

 

고려시대 시문이라고 한다면 왜 이 고급 사신이 개성으로 가지 않고 궁궐도 없는 고려시대 경주에 귀한 사신이 올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의 新羅와 唐나라간에는 수많은 문화적 교류가 빈번했다.

수많은 유학생과 승려가 왕래했다.백제를 무찌른 羅唐 연합군은 바로 新羅와 唐나라 연합군을 말한다.

 

 

다.客中寒食

 

(객지에서 맞는 한식)

 

"천년의 향기"294페이지 客中寒食(객지에서 맞는 한식)에서

 

 

長安寒食又今年

 

(올해도 또 장안에서 한식을 맞았나니).."천년향기"에서의 해석에 관하여

 

"천년의 향기"에서 해놓은 위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해석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長安에서 지내던 寒食을 올해도 맞는구나!(懷古)

 

위의 "長安" 지금의 西安으로써 당나라의 首都이다.

 

이 시문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는 멀리 한반도 객지에

오셔서 한식을 맞으며 소슬(蕭瑟)한 심회(心懷)를 한 수 의 시로 읇고 있다.

혹시 "장안의 화제"할때에 쓰는 장안이 아닐것이다.당시 장안은 경주일텐데 장안 즉 경주에서 맞는 한식을 올해도 경주 장안에서 맞네,이것은 아닐것이다.제목이 "객중한식(客中寒食)"이다.客地아本國에 있을때의 寒食을 그리며 시를 읊은 것이다.

 

고증3.

 

묘지명(墓誌銘)

 

1.지석문(誌石文)을 보자.

 

中朝○○大夫行兵部尙書 劉公諱荃 辛卯四月初八日生 壬寅 二月初七日卒 享年七十二 配陇西李氏 对辰韩国夫人 己未生 癸卯六月初七日卒 享年四十五 墓永陽郡北鸣山面花枝洞亥坐上下封

建中丙子三月十五日 子居陀君堅規生

 

建中丙子三月十五子居陀君堅規生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서기 796년 견규생)

 

 

이 지석문에 관해서는 종보 제 4호 53페이지 劉脈에도

올라 있지만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258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이곳에는 종보 제 4호 유맥에서는 中朝○○大夫로 ○으로 처리한 부분이 강릉유씨 대동보에는 중조 정헌대부(中朝正憲大夫)로 올라있다.

 

이곳의 중조(中朝)란 중국의 왕조라는 뜻이며 신라시대의 중조는 唐나라가 되며 고려시대의 중조는 宋나라가 된다.

 

 

건중병자(서기 796년)에 아들 거타군 견규가 출생이라고 명기됨.

 

 

 

 

墓誌石文을 쓸때는 한자 한자에 영혼이 깃든 상태에서 기록됨을 알때에 建中丙子三月十五日(중국 당나라 서기 796년)주목하자.

 

 

이곳에서 꼭 서술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건중병자가 당나라 연호인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현행 족보에 기록하고 있는 1096년 堅規 탄생년도와 꼭 300년으로 맞아 떨어 지는가 .

 

 

이 대목이 바로 묘지명의"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이 기록이 아주 정확하다는 증거가 되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한번 족보에 나타난 견규탄생년도와 지석문의 년도를 비교해 보자

 

 

 

 

족보에는 이처럼 堅規는 서기 1096년생으로 되있다.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으로 명기되어 있다.건중병자 년도는 중국 唐나라 연호로써 서기 796년도이다.

 

 

1096년과 796년간에는 정확히 300년의 차이가 난다.

 

 

5개의 60갑자 착오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틀림없이 건중병자년에 태어났다라는 증명이 이 묘지명(墓誌銘)으로 확증되는 것이다.견규탄생 서기 796년을 중심으로 환산한 도시조님의 연표는 아래와 같다.

 

 

劉荃 都始祖 東渡年度 착오분 300년 환산

 

유전(劉荃) 관련 연표 수정

 유전(劉荃) 출생년   AD 1051년(辛卯):宋仁宗 皇祐 3년/고려 文宗 5년

                변환=> AD 751년( 辛卯):唐玄宗 天寶10년/신라 景德王10년

 

유전(劉荃) 東渡년도AD 1082년(壬戌): 宋神宗 元豊5년/고려 文宗 36년

                변환=> AD  782년(壬戌): 唐德宗 建中3년/신라 宣德王3년

 

유전장자(劉荃長子)견규(堅規) 탄생년도

                          AD 1096년(丙子):宋哲宗 紹聖(소성)3년/고려 숙종1년

                변환=> AD  796년(丙子):唐德宗 建中丙子年 /(貞元)12년

 

당나라를 떠나온후 당나라 연호는 2년뒤인 AD 784년에는 흥원(興元)으로

다시 이듬해인 AD 785년에는 그 연호가 정원(貞元)으로 바뀌지만 통신이 없던

시대 고국을 떠나온 이민자의 개념속에는 계속 건중(建中)으로만 기억.

 

 

 

묘지명 [墓誌銘] 이란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묘지에 죽은 이의 덕이나 공로 따위를 새겨넣은 글이며 한자 한자를 정성들여 기록한 조상의 영혼이자 숨결이다.

 

더욱이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조상이 새겨놓은銘文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建中丙子(중국 당나라 서기 796년 丙子년)에 장남 堅規가

탄생했다고 이곳에서 銘文을 새기어 놓았음에랴.

 

잠시 우리나라의 족보에 관하여 살펴보자.

 

자칫 우리는 족보란 아주 초창기부터 현재의 족보가 고스란히 잘 기록 보존되어 온 문중의 역사를 틀림없이 기록한 고귀한 문서로 생각 하기 쉬우나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 세보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 유전 도시조 후손의 최초의

족보는 1761년 신사보(辛巳譜)가 아닐까 생각할때에 유전 도시조 할아버지가 이땅에 오신후 1000년의 긴나긴 세월 족보 기록없이 구전(口傳)으로 그 가문을 지켜오다가 이제 처음으로 족보를 설정하면서 5갑자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우리 문중만의 일이 아니며 이땅에 사는 허다한 문중이 모두 대동소이 하다고 볼때에 크게 부끄럽게 숨길 일은 못될 것이다.

 

 

고증4

 

唐나라 邇英殿

 

당나라에 이미 이영전이 있었음이 일중 문화 교류사(日中文化交流史)에 의해 밝혀지다.

 

그럼 이영전"邇英殿"이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자.

이 어렵게 생긴 한자 이(邇) 이글자는 가까울"이"자이며 영(英) 즉 영재(英才)를 가까이 하다.라는 뜻이되어서 이영전(邇英殿) 또는 이영각(邇英閣)이라고도 쓴다.현대 중국어 간자체로는 이(邇)이 글자는 이(迩)字로 표기된다.영재 교육기관 이었다.

 

송나라 인종(仁宗)때 세운 궁내 영재 교육기관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 고증 과정에서 일중 문화교류사(日中文化交流史)에 나타난 史實에서 이미 唐朝에 이영전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번 발간한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144페이지에서의

 

                     憶故國(고국을그리다)

昔忝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邇英席에서)는 당나라 이영전에서 공부하다.가 되겠다.

 

 

위의 시문 구절은 이제 宋나라 이영전이아니고 唐나라 이영전에서 공부한 사실로 결론 지어지게 되는데

 

그 것은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居陀君堅規生"

 

즉 건중병자 (서기 796년)의 銘文

묘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간일집의 많은 시문에서신라의 退朝,使臣,팔학사 시문에서 李氏 唐朝 王朝가 나왔기 때문이다.

 

 

 고증 5

하양(河陽 지금 중국 하남성 맹주)의 지명은 서기 843년 이전의 명칭이다.

 

맹주(孟州)의 옛 지명은 하양(河陽)이다.하양의 역사는 이러하다.

 

汉武帝元封五年(前106年)置河阳县,故治在今孟州市槐树乡桑洼村。属河内郡。新莽改称河亭县。东汉、魏、晋、北魏均称河阳县。北魏太和中至东魏元象元年(公元538年)先后筑河阳三城,河阳三城遂为洛阳以北军事重镇。北齐天保七年(556)废河阳县为河阳关。隋开皇十六年(公元596年),置河阳县。唐武德初改为大基县,置河阳宫。八年,改称河阳县。咸亨五年(公元674年)复大基县,属洛州。玄宗朝以讳复为河阳县。开元初,为东京畿邑,属河南府,武宗会昌三年(公元843年),设孟州,

 

하양(河陽)이라는

지명은 지금 중국 하남성 맹주시(孟州市)이며 서기 843년 이전에만 사용되던 지명

이고 서기 843년이후에는 바로 맹주로 그 이름이 바뀐다.하양이란 지명은 BC 106년에서 AD 843년

까지만 사용되던 현재 맹주의 옛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유전(劉荃)도시조 할아버지의 오신 년도는 서기 843년 이전인 것이다.

즉 고증 결과에 의하여 5갑자 앞선 782년도에 즉 하양이라는 지명을 쓰던때에 현재 맹주에서 오셨다.

河陽家国今何處(하양 나의 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양땅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죽간일집(竹諫逸集)에 실린 시문(詩文)중에 泛舟游海上说往跡(바다위 배를 타며 지난 자취 이야기 하다)

라는 시문에서는 옛고향 하양(河陽) 그리면서 읇은 애절한 시 한수가 있다.

 

西風吹荡一孤舟(처량한 바람에 외로운 배 한척 흔들리고)

满目深秋正不收(눈에 가득한 시름을 거둘길 없어라)

河陽家国今何處(하양 나의 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帆外江山是異州(돛배 밖은 이역강산)

 

위의 고향을 그리는 한 수의 시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바로 

河陽家国今何處(하양 나의 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인데 바로 그 고향 하양(河陽) 즉 맹주(孟州)땅

고향을 그리면서 영탄(詠嘆)의 시를 읊고 있다.

 

이글을 쓰는 저는 죽간일집의 시문을 읽다가 위의 고증에 관한 제반 정황이 한결같이 고려시대가 아니고 신라시대임을 알고 있던터에 고려조를 언뜻 상징하는 "邇英殿"의 대두로 즉시 이것은 상호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고증을 일시 중단함을 저의 운영하는 블로그에 2013.7.3일 글을 올린바 있다.

 

 

 

정말 다행이다.

이번 죽간일집 竹諫逸集 “천년의 향기”를 발간하면서 이 "邇英殿"에서 유전 도시조가 공부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려 때 동도 사실로 더욱 신빙성을 부여하는 듯하여 더욱 당나라 때의 이영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각국 인터넷망을 검색 하던 중 귀한 문건 일본 遣唐使(견당사)의 당나라 당시 임금 代宗 임금 알현을 기록한 "日中文化交流史"에서 중국 宋나라 외에도 이미 당나라에서 "이영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주 소중한 대목이다.

 

애석하게도 죽간일집(竹諫逸集)이라는 귀중한 시문집이 고려시대 문집으로

취급됨은 하루속히 이 고증문에 의거 신라문학의 범주로 격상 편입되도록 문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귀중한 자료가 발견되지 못했다면 우리 유전 도시조의 동도년도는 위와같은 많은 신라/당나라때 귀화의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히 고려조 서기 1082년도로 잘못 고착화 할뻔했음을 생각할때에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지 모른다.

잠시 한 대목만 관련 기록을 옮겨 보겠다.

 

 

 

如东日报

http://www.rdkx.gov.cn/Newspapers_News.asp?id=25994

 

 

 일본 견당사(遣唐使:일본에서 당나라에 파견하던 사절을 이름)기록인

 

"日中文化交流史" 에서

 

 

 

 

 

당나라때에  이영전(唐朝邇英殿)이

 

 

 

 

이 이미 있었음을 발견하다.

 

 

 

 

 

 

 

 

 

 

 

日本木宫泰彦《日中文化交流史》一书载:

 

<日本木宫泰彦의 일중문화교류사 제 일권에 기록됨>:

 

 

 

 

《日本续记》宝龟九年(778年)十月乙未条载

 

最后在代行遣唐使大使职责的副使石根的率领下,于宝龟八年(777年)出发,抵达海陵

 

(如东),后到扬州,准备去长安,然而“海陵观察使陈少游言:寇乱以后,馆驿凋散,

 

得中书门下牒,限二十员进京,石根请加二十三人,许之。”这样,其中有43人被批准从

 

扬州出发到长安。“九年(778年),朝见代宗皇帝于宣政殿,时上元日也

 

"逾月,复见于迩英殿”。

 

 

 

<번역문>

 

<니혼쇼키>호키 9년(778년) 10월 을미조에 기록되어 있다.

 

최후로 견당사 대사 직책의 부사 이시네의 영솔하에 호키8년

 

(777년)출발하다.

 

 

(宝龟:즉 호키 이 일본 년대는 서기 770-780년사이의 연대임)

 

 

해릉(海陵)(지금 중국 강소성 南通 如東縣)에 도착후 扬州에 다달아 長安(당시 당나라

 

수도 지금의 西安)에 갈 준비를 하다.그런후에 해릉 관찰사 지소유가 말하기를:

 

왜구의 난 후로는 역참조차 모두 쇠락해져 중수문의 첩문을 받은 스무명내의 인원이

 

 입경하고

 

 

 

 

石根请加의 23명과 함께한 43인이 승인을 얻어 양주를 떠나 長安에 도착했으며 호키

 

 

 

 9년(778년-즉 유전 도시조의 이주 782년의 불과 4년전임)에 代宗 임금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알현했는데 이때가 정월 보름이었다.

 

 

달포후 이영전(邇英殿)에서 다시 또 알현하다.逾月复见于迩英殿

 

 

 

 

 

 

 

 

 

도시조 동도 시기에 대한 考證을 마치면서

 

종보 제 4호 劉脈에서 "중국 상계 찾기와 고증"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그 방안조차 막막하던 차에 전임 劉 吉 鐘 회장님의 인솔 하에 우리 한반도 劉門 門中으로써는 처음으로 중국 강소성 패현에서 열리는 제 9회 劉邦文化祭 25명의 宗親이 성공리에 다녀 왔으며 이제 당나라 이영전(邇英殿)의 존재가 밝혀짐으로써

 

 

죽간일집 시문에 나오는 昔忝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이영석에서)라는 대목을 통하여 도시조 할아버지의 옛날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고 위의 신라 시대의 정황들이 당나라 이영전으로 인하여 풀리게 됨은 천운과 같은 것이다.

 

 

이 당나라 이영전(邇英殿)을 찾아 낸 것이 천운인 것은 이 이영전을 찾아보기 위하여 중국의 인터넷망에 들어가 수많은 날들을 모냈다.그러던중 이제 마지막으로 미국야후

http://us.yahoo.com/검색어 "唐朝迩英"을 넣었을때에 딱 한 문건의 일본 견당사(遣唐使)가 당나라 사절로 가서 당시 당나라 대종(代宗)임금을 알현하는 대목에서 당나라 이영전이 나온 것이다.

 

2013년 11월 27일 08시 당나라 이영전(唐朝邇英殿)의 존재했음을 발견하다.

 

잠시 정리해 보면

죽간일집의 시문과 팔학사 동도시에서 고려시대에 동도해 오심이 아님이 밝혀지고 서기 782년도에 동도해 오셨다는 사실로 결정되는 것은 지석문에 나와있는 대로 建中丙子年 맏아들 堅規가 3월 15일 탄생했다는 墓誌石 銘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도년도가 고려조가 아님이 죽간일지 시문과 팔학사 시에서 규명되고 지석묘의 연대와 현행 1082년 동도 주장과는 꼭 5갑자 300년의 오차가 발생하므로 당 덕종조/신라 宣德王 3년 서기 782년 동도 사실이 확실히 증명된다.

 

 

 

지금까지도 당나라 이영전을 검색했으나 더 이상의 다른 唐朝의 이영전(邇英殿)관련 문건은 한건도 더 찾을 없으니 어찌 천운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당나라 이영전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고려시대에 한반도에 이주한 시조로 기록이 계속 될 뿐했으니 이 어찌 문중의 도시조 동도 시기를 고증해 내는 과정에서의 귀중한 계기가 아닐 수있으랴.

 

 

 

우리 도시조는 중국의 병부상서를 지내시다가 한반도에 이주해오셔서 죽간일집이라는 귀한 문중의 역사 문헌집을 남기신 덕택에 또한 함께 오신 팔학사 분들이 남기신 시문에서 그 고증의 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음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족보없이 천년의 세월을 지내오다가 족보를 처음 설정하면서 오직 5갑자 300년 오차를 발생시켰으며 그외의 기록사항들은 죽간일집과 묘지석 명문에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천년의 세월을 이처럼 잘 지켜온 후손들의 노고가 눈물겹다.

 

인터넷 전자 시대를 맞이해서 이러한 조상님의 근원을 찾을 수있었음에 한없이 기쁜 마음을 금할 수없으며 이 考證文을 기쁜 마음으로 劉荃都始祖님 靈前에  올립니다.

 

 

 

2013년 12월 2일

 

  

첨부

 

日中文化交流史/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의 발견

 

 출전 주소:아래

http://www.cnjpetr.org/html/zhongriwanglaimingrenlu/qiantangshi/2010/0817/24120.html

http://blog.163.com/yuanyei_999/blog/static/28134589201042322140803/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의 존재가 확인된 문서임-

중국 당나라때 일본의 견당사 중국 조정 방문 기록

 

아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중국에서 오신 유전(劉荃) 도시조(都始祖)님께서는

그의 저서 죽간일집의 시문 憶故國(고국을그리다)에서

昔忝邇英席(황공하게도 지난날 邇英席에서:공부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영전(邇英殿)아란 나라때

궁궐 교육기관으로만 알고있던 문중에서는 이 시문의 구절을 들어

 함께 같은 배로 오신 평택/나주 임씨  임팔급 林八及 시조님 및 남양송씨 송규 宋奎시조님들의

당나라/신라때 동도해 오심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들어

우리 강릉유씨 문중에서만은 송나라/고려조 동도해 오심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번 고증과정에서 이 일본의 당나라 견당사(遣唐使:당나라 일본의 중국 파견 사절단)

의 기록중  서기 778년도 중국 당나라 代宗 임금을 궁중의 이영전(邇英殿)

선정전(宣政殿)에서 만나는 대목에서 당나라때에도 이영전이 있었음이

확인되는 귀한 문서를 찾아낸것이다.따라서 송나라 이영전이아닌

唐나라 이영전(邇英殿)에서 공부하신 것이다.

 

 

 

——“遣唐使与如东”新探    (四)

 

□ 吴剑坤

(接上期)  十  又一批遣唐使团的抵达和离开

 

“在历史上,除了第十三次遣唐使到过如东外,还有没有其他批次的遣唐使团到过这一

 

江海交汇的唐寥角嘴呢?”对于这一问题,不少人在苦苦地追索。阅读下面的一些资料

 

后,你定会有惊喜的发现,当然,也许会给你留下无法摆脱的疑问。

 

日本木宫泰彦《日中文化交流史》一书载:第十一次遣唐使“持节副使小野石根出使

 

时,于宝龟八年(777年)六月二十四日出海,七月三日到达扬州海陵县。回国时,第

 

三舶曾一度被逆风吹回,第二次出发时,风向适宜,于宝龟九年(778年)十月十六日

 

出发,同月二十三日到达肥田国松浦郡桔浦。”“回国启程地点:第一舶,苏州常熟县;

 

第二舶,同上;第三舶,扬州海陵县;第四舶,楚州盐城县。”“经由南路到达唐土的地

 

点和回国时启程的地点,虽有时有些不同,但是大致是一样的。这些地点都在苏州、扬

 

州、明州、楚州等接近扬子江口的地区。”回国的出发时间为“第三舶,九月;第一、

 

 

 

 

二、四舶,十一月”。

 

《日本续记》宝龟九年(778年)十月乙未条载

 

<일본속기:日本续记 호끼9년:778년도>10월 을미조에 나온다

 

 

 

日本光仁朝遣唐使回国后,“第三舶副

 

使小野滋野奏称”:到达扬州海陵县后,“臣等八十五人发州入京,…… 持节副使小野

 

朝臣石根……   等四十三人,正月十三日到长安城。”宝龟九年十一月乙卯条载,“第一

 

舶判官大伴继人等奏称”:扬州府都督观察使兼长使陈少游“只许放六十五人入京,十月

 

十六日发赴上都……  减却人数,定二十人。正月十三日到长安。”

 

 

从史料中,我们可以获得这样的推断:日本光仁朝宝龟八年(777年)第十一次遣唐使

 

在持节副使小野石根的率领下,于六月二十四日入海,七月三日到达扬州海陵县。次年

 

回国时的启程地点为,第一、二舶,苏州常熟县;第三舶,扬州海陵县;第四舶,楚州

 

盐城县。其中,第三舶是九月九日离开海陵县的。也就是说,公元777年日本第十一次

 

遣唐使入唐第一站为海陵县。次年回国时,三号船在判官小野滋野的率领下于重阳节从

 

海陵县入海。第三天遇逆风,船被吹上沙滩而损坏,经过修复,于一个月后的十月十六

 

日再次出海,七天后的十月二十三日到达日本肥前。

 

 

人们不禁要问:第十一次遣唐使“究竟到过海陵县的何处?”“从海陵县的何处入海?”“三

 

号船在何处修理?”史料上未见载。那么,如东有可能吗?回答是肯定的。

 

 

在唐开元二十一年(733年),分天下为15道,淮南道治于扬州。唐至德元年(756

 

年),置淮南节度使,置广陵等13郡。次年,改广陵郡为扬州,下辖江都、江阳、六

 

合、海陵、高邮、扬子、天长7个县。如东当年属于海陵县。圆仁的《行记》说:“午时

 

到江口,未时到扬州海陵县白潮镇桑田乡东梁丰村(今如东曹埠)……留学僧等到守捉

 

军中季赏宅停留。”“七月一日晓……泛艇从海边行,渐觅江口……其江稍浅,下水手等

 

曳船而行……卖芦人……答曰‘此是大唐扬州海陵县淮南镇大江口’……亦更向淮南镇

 

去。从江口北行十五里许,即到镇家,镇军等申云:‘更可还向于掘港庭’”。这里的

 

“镇”、“守捉军”都是唐朝时的边防军事单位,通常“镇”设大使和副使各一人为负责人

 

。掘港当时即在江口左近处。当第十一次遣唐使船队到达扬子江口的海陵县时,经过多

 

日海上颠簸的遣唐使团必会登陆休整,而后或者溯横江而上,或从内河乘船去扬州。

 

 

当年,如东与今南通市区(时称胡逗洲)之间隔着一条横江。胡逗洲,在唐开元十年

 

(722年)时设置盐官,属扬州海陵县,隶淮南道。不久,由于军事上的需要,狼山为

 

浙江西道节度使管辖,狼山北的胡逗洲也就成为浙江西道常州地界了。《唐大和上东征

 

传》记述了唐天宝七年(748年)鉴真和尚第五次东渡日本时过“常州界狼山”的事。再

 

加上“唐乾符二年(875年),时设狼山镇,置镇遏使,归浙江西道节度使节制。”

 

(《南通市志》)。由此可知,公元748——875年间,胡逗洲和狼山一带均属于常州

 

地界,而不属于扬州海陵县界。而第十一次遣唐使是公元777年到达海陵县的。因此

 

,第十一次遣唐使不可能到达横江以南常州界的胡逗洲、狼山一带,而只能到达位于横

 

江北的海陵县,如东从掘港到双甸一带恰恰首当其冲,具有极大的可能性。

 

 

再说,十一次遣唐使回国时从海陵县出发的第三舶,在如东出发的可能性也就更大了

 

。王芸生在《古代中日关系之追溯》一文说:这批遣唐使离开长安,“六月,监使杨光

 

耀送至维扬。秋九月,舣船各出扬子江口,候风两月……入海。”这第三舶在海陵县的

 

“扬子江口,候风两月”后入海,不在如东又会在哪里呢?如果在如东以西的江北岸港口

 

入海,那么,从行程上推算,修理船舶的地点很可能在掘港到如东北面的沿海一带

 

另外,圆仁等一行来到皋东,绝非偶然,而是早有筹划的。他们这次从南路入唐,其海

 

上航路和方向调度直指大江口一带,圆仁《行记》上的“侧帆指坤”一语,除了用帆方法

 

外还点出了航向;再有,船上有人懂得识别江海水色,遣唐使船接近大陆,多次写水

 

色:“海色浅绿”、“白、绿”“至白水,其色如黄泥,人众咸云,若是扬州大江口流

 

水……”,船上新罗译语说“闻道掘港难过,今既逾白水,疑逾掘港欤?”这充分说明,在

 

圆仁等一行之前,肯定有人到过掘港或者至少到过掘港附近的海域。因为日本第十二次

 

 

 

遣唐使在公元804年于福州附近登陆,所以说不定圆仁船上的新罗译语对掘港海域的了

 

解来自第十一次遣唐使船上的新罗译语。这也从侧面印证了第十一次遣唐使完全可能在

 

掘港附近停留过,或者是登陆,或者是启程回国,或者是修理船舶,也许这三者都有可

 

能。

 

 

十一  唐使泛海献身 

 

 

公元770年,年届62岁的日本光仁天皇即位,取年号为宝龟,他于781年去世。他在位

 

的11 年里,曾经两次派出遣唐使团。如前所述,其中于宝龟八年(唐代宗大历十二

 

年,公元777年)派出的第十一次遣唐使很可能到过如东,更有可能从如东启程回国,

 

这要早于圆仁一行50多年。

 

 

从《日中文化交流史》所载:“光仁天皇宝龟六年(775年)六月,最初任命正四位下佐

 

伯今毛人为大使、正五位上大伴益立、从五位下藤原鹰取为副使。但到次年十二月,罢

 

免益立等,改任从五位小野石根、从五位下大神末足为副使。到了宝龟八年(777年)

 

四月将出发时,大使今毛人称病不动,朝廷因以石根为持节副使,行大使事。”“宝龟七

 

年(776年)闰八月,庚寅,先是遣唐使船到肥田国松浦郡合蚕田浦,积月余日,不得

 

信风,既入秋季,弥违水候,乃引还于博多大津,奏上曰:‘今既入于秋季,逆风日

 

扇,臣等望待来年夏月,庶得渡海。’是日敕:‘后年发期,一并来奏。’”和王芸生《古

 

代中日关系之追溯》一文所载:“帝御殿,授节刀,命之曰:‘卿等奉使,言语必和,礼

 

患必笃,毋生嫌隙,毋为诡激。判官以下,违者便宜从事!’乃各赉御服。船发至肥前

 

松浦郡,阻风不能前,还博多,请待来岁。寻罢益立,以中左辨小野石根、备中守大神

 

末足代之。八年春,令使者拜神祗于春日山下,行至摄津,今毛人以病引还,令副使

 

持节服紫,假行大使事。燕赏有差。”中,我们可以知道这批遣唐使团因大使佐伯今毛

 

人害怕海上出事而“称病不动”,最后在代行遣唐使大使职责的副使石根的率领下,于宝

 

龟八年(777年)出发,抵达海陵(如东),后到扬州,准备去长安,然而“海陵观察使

 

陈少游言:寇乱以后,馆驿凋散,得中书门下牒,限二十员进京,石根请加二十三人

 

,许之。”这样,其中有43人被批准从扬州出发到长安。“九年(778年),朝见代宗皇

 

帝于宣政殿,时上元日也。逾月,复见于迩英殿”。

 

 

九年(778年)9년(AD 778년에)

代宗 임금을 선정전(宣政殿)에서 알현했는데 이때가 정월 보름이었다.달포 지나서 이영전(复见于迩英殿)에서 다시 알현하다.

 

 

 

 

 

四月,在他们准备离开长安回国之际,唐代宗“遣中使赵宝英为押送使”陪同他们回日

 

本,赵宝英时任内侍省掖庭令,是一位宦官。而日本遣唐使持节副使石根考虑到海上航

 

行风险很大,因此向唐代宗婉辞曰:“海路渺茫,风汛无常,万一颠踬,惧损盛意。”但

 

是,唐代宗告诉他已经命人在扬州为赴日使团打造船舶,“诏仍护行”。六月,唐朝赴日

 

使团一行39人在大使赵宝英、判官孙兴进等的率领下与日本遣唐使一行由监使杨光耀陪

 

送至维扬。然而,他们到扬州时发现赵宝英乘的船还没有造好,经过朝廷批准,唐朝的

 

使者便搭上日本遣唐使船

 

于是,“秋九月,舣船各出扬子江,候风两月”。 赵宝英坐第一舶,船上还坐着副使小

 

野石根、 判官大伴继人等一百六十多人。于十一月五日从常熟出发,驶进大海,八

 

日,在海上突然遇到强烈风暴。武安隆在《遣唐使》一书中说:“第十一次遣唐使第一

 

船,归途中,副使小野石根等三十八名日本人和唐使赵宝英等二十五名中国人,都被卷

 

入海底。此后,该船被倒下的桅樯打成两半,判官大伴继人和终老唐土的藤原清河的女

 

儿喜娘等四十一人在船尾,另五十六人在船头……”。

 

 

从航线和航程推算,唐使赵宝英等中日使节遇难处当在如东以东海域。

 

 

唐使赵宝英等25名中国人和38名日本人为了增进两国人民的友谊和加强文化交流,献出

 

了他们宝贵的生命。在古代中外交通史上,赵宝英是第一位见于记载奉皇帝之命出使远

 

国的宦官,可以说是郑和的先驱。同时,赵宝英也是唐代历史上唯一以身殉职的遣日高

 

级使臣。

后来,中国使团的其他成员在日本受到十分热烈而隆重的欢迎,日本天皇并且下令为他

 

们返唐专门打造新船。同时任命从五位下布势清直为送唐客使。据《续日本后记》载:

 

在为唐朝副使孙兴进等饯行之际,日本天皇特别“赙赠宝英絁八十匹、绵二百屯,以慰藉死者”。

赵宝英,这位为国捐躯的唐朝赴日使者和曾经到过海陵(如东)的日本遣唐副使小野石

 

根的名字永远镌刻在中日友好交流的史册上。(未完待续)


 

고증문 <출력용>

http://blog.daum.net/rosy900/5664606

 

註:

한 氏族의 족보는 至高至純한 민족의 遺産이며 한 門中의 歷史다.

이와같이 貴重한 족보의 오류를 放置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국 唐 德宗朝 연호의 변동

서기 779년(乙未) 당 德宗 취임                              신라 惠恭王 15年

서기 780년(庚申) 당 德宗 建中 1年                        신라 宣德王   1年

서기 781년(辛酉) 당 德宗 建中 2年                        신라 宣德王   2年

서기 782년(壬戌) 당 德宗 建中 3年                        신라 宣德王   3年<劉荃始祖 한반도 오심>

서기 783년(癸亥) 당 德宗 建中 4年                        신라 宣德王   4年

서기 784년(甲子) 당 德宗 興元 1年                        신라 宣德王   5年

서기 785년(乙丑) 당 德宗 貞元 1年                        신라 元聖王   1年

서기 786년(丙寅) 당 德宗 貞元 2年                        신라 元聖王   2年

서기 787년(丁卯) 당 德宗 貞元 3年                        신라 元聖王   3年

서기 788년(戊辰) 당 德宗 貞元 4年                        신라 元聖王   4年

서기 789년(己巳) 당 德宗 貞元 5年                        신라 元聖王   5年

서기 790년(庚午) 당 德宗 貞元 6年                        신라 元聖王   6年

서기 791년(辛未) 당 德宗 貞元 7年                        신라 元聖王   7年

서기 792년(壬申) 당 德宗 貞元 8年                        신라 元聖王   8年

서기 793년(壬申) 당 德宗 貞元 9年                        신라 元聖王   9年

서기 794년(甲戌) 당 德宗 貞元 10年                      신라 元聖王   10年

서기 795년(乙亥) 당 德宗 貞元 11年                      신라 元聖王   11年

서기 796년(丙子) 唐 德宗 貞元 12年                      신라 元聖王   12年<丙子年 三月十五日 長子堅規 生>

 

AD 782년 唐德宗朝 건중 3년에 劉荃 始祖께서 八學士의 일원으로 한반도 東渡해 오신 다음 다음해인

AD 784년에는 연호가 建中에서 興元으로 바뀌며 또 다시 이듬해인 AD 785년에는 다시 연호가 貞元으로 바뀐다.

멀리 일생일대의 개인적 대 변혁기인 한반도 이주후에 당시 교통도 통신도 없던 시절 고국의 연호가

바뀐것을 알지 못하고 그 뇌리에는  오직 오매불망 고국을 떠나올 당시의 임금과 연호만이 기억되고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이주하여 오신후 14년이 지나 陇西李氏(농서는 지금 경상북도 星州이다)와의 사이에서

맏아들을  建中丙子(새 연호로는 貞元丙子 해당)  3월 15일에 長子堅規를 얻었다고 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劉荃(유전) 都始祖 一行 八學士

東渡 年度 밝혀지다.

 

AD 1082年(=> AD 782(

 

즉 서기 AD 782년(壬戌)德宗建中3年

에 오시다.5갑자(五甲子) 300년 족보편찬 착오로

밝혀지다.

 

 

서론(序論)

 

강릉유씨 도시조 되시는 劉荃 할아버지와 함께 한반도에 동도(東渡)

해 오신 분들은 모두 여덟분으로써 劉荃,林八及,宋奎,薛仁敬,崔 沍,

權之奇,孔德狩,許 董 이상 여덟분이시다.

 

그러나 이분들중 후손들이 도시조로 모시고 있는 분들은 劉荃(강릉,

거창 유씨 시조) 林八及(평택임씨 시조) 宋奎(남양송씨 시조)

 

세분이시다. 이중에서 평택임씨 시조와 남양송씨 시조 되시는

문중에서는 도시조의 한반도 동도 시기를 당나라로 기록하고는

 

있으나 정확한 연대를 모르고 강릉,거창유씨 시조 문중에서느 정확히

연대를 AD 1082년(고려 문종 36년)이라고 확정코있지만 아직까지

이를 증명할 아무런 문헌도 고려및 중국 송나라 역사에서 찾을 수없다.

 

그러나 이번 강릉유씨 문중의 지석문(誌石文)에서 劉荃 도시조의 맏아들 되는 堅規께서 당나라 덕종조의 연호인 건중병자(建中丙子)년

3월 15일 탄생했다고 명기(銘記)되어 있는 기록을 발견함으로써

 

유전 강릉,거창유씨 시조를 비롯한 팔학사(八學士)의 동도 년도가

확실한 근거로 밝혀지게 된것이며 따라서 강릉,거창유씨 문중에서는

지금까지 알고있던 중국 송조(宋朝)고려문종 36년(AD 1082년)

 

동도 기록을,아울러 팔학사의 문중중 두분 林八及시조 문중과, 宋奎시조 양 문중의 당나라 년대중 년도를 확정 짓지 못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팔학사가 동도해 오신 정확한 년도는 당나라 덕종 건중 3년

임술년(壬戌年)AD 782년이 되는 것이며 아래와 같이 導出된다.

 

劉荃

현재 강릉,거창유씨 문중 족보에는 유전 시조의 한반도 오심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출생: AD 1051년(辛卯年)

동도: AD 1082년(壬戌年)

장자 견규탄생:AD 1096년(宋朝哲宗 연호紹聖3년생이 되므로 틀림)

 (建中丙子라고 지석문에 나오므로 되야 맞음)

劉荃卒年:AD 1122년(壬寅年) 

 

위에서 보면 장자 견규께서 탄생한 년도는 분명히 建中丙子년 이라고

지석문에 명기되어 있으므로 송나라 철종때인 연호紹聖3년이아니며

 

建中丙子는 唐나라 德宗貞元12년(建中 연호 환산시 建中 17年에 해당)되며 따라서 상기표에서 劉荃시조의 동도년도 AD 1082년(壬戌)은 AD 782년 唐나라 德宗 建中 3년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항이 정확히 일치하며 꼭 300년의 오차 즉

60년(一甲子)x5 갑자만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統一新羅宣德 三年에 해당 년도.

 

 

 

 1.지석문(誌石文)을 보자.

 

中朝○○大夫行兵部尙書 劉公諱荃 辛卯四月初八日生 壬寅 二月初七日卒 享年七十二

配陇西李氏 对辰韩国夫人 己未生 癸卯六月初七日卒 享年四十五 墓永阳郡北鸣山面花枝洞亥坐上下封

建中丙子三月十五日 子居陀君堅規生

 

建中丙子三月十五子居陀君堅規生

 

 

위의 지석문(誌石文)은 금년 2012.2월 발간된 종보 제4호 유맥 53항에 기재돼 있음는 내용임.

 

 

 

종보 제 4호 53페이지 劉脈

 

 

 

한국 역사에서 나오는 中朝라는 용어는 중국 왕조를 지칭하며

신라시대의 中朝는 당나라를 고려시대의 中朝는 송나라이다.

 

 

 

 劉荃 都始祖 현재와  修正후의 연대

 

출생년도 AD 1051년(辛卯)宋仁宗皇祐三年/

                                     高麗文宗五年(수정전)

            AD 751년 (辛卯)唐玄宗天宝10年/

                                    新羅景德王十年(수정후)

 

东渡년도: AD 1082년(壬戌)宋神宗元豊5年/

                                    高麗文宗36年(수정전)

            AD 782년(壬戌)唐德宗建中3年/

                                   新羅宣德王3年(수정후)

 

卒年度:AD 1122년(壬寅)高麗睿宗17年(수정전)

           AD   822년(壬寅)新羅宣德王14年(수정후)

 

 

도시조 할머니

출생년도: AD 1079년(己未)高麗文宗33年(수정전)

            AD  779년(己未)新羅惠恭王15年(수정후)

 

 卒年度:   AD 1123년(癸卯)高麗仁宗1年(수정전)

            AD   823년(癸卯)新羅憲德王15年(수정후)

 

長子견규 탄생

출생년도 AD 1096년(丙子)3月15日(수정전)

            AD   796년(丙子)3月15日(수정후)

 

 

2.시대적 배경(時代的 配景)

 

팔학사가 궁궐을 떠나 멀리 이국땅으로 몸을 피해 떠나 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당시 유전 도시조 일행 팔학사가 넘어온 시기는 당나라 덕종 건중 3년으로써 이때 조정은 중국역사에 가장 惡毒한

 

奸臣 (노기(盧杞 Luqi ?~785年)가 폭악한 전횡을 펼치던 때로써 노기( 盧杞)는 삼년간 궁중에 근무 하던중의 중간의

년도 (AD 782)에 해가 되며 八學士는 신라땅으로 피신케된다.

 

 

당시 노기는 홀로 독제적 조정을 휘두르면서 한걸음 한걸음 다른 재상과 대신의 鮮血을 밟아 나가던중 이었으며 그의 장기(長技)라면 바로 모함,

 

 축출, 알력, 보복이었으며.장익(张镒)과 어사대부 엄영(嚴郢)등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의 손 에 죽어갔다.

 

卢杞,唐德宗建中二年至四年任宰相,为政期间,天下怨声载道,百辟疾之若仇,六军思食其肉。被贬之后,天下大快。独独德宗对其念念不忘,认为卢杞"忠清强介"。于贞元元年(785年)多次为 ... 详情>>

 

 

在卢杞巩固相权独揽朝政的过程中,每一步都踏着其他宰相和大臣的鲜血。他最擅长的事情就是陷害、排挤、倾轧、报复。宰相杨炎、张镒、御史大夫严郢等人,都先后死在他的手上

 

 

이러한 간악한 간신의 전횡은 AD781~783의 삼년간을 지속되다가 드디어 783년에는 涇原兵变이 일어나며

 

 王은 한달 간 포로로 잡혀있다가

 

 奉天(今陝西咸陽乾縣)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盧杞는 또 가옥(家屋)에 대해 “間架税”、“除陌 税”,라는 세금을 징수해서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盧杞 드디어 新州司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또 ,澧州로 옮겨가게 되던중 AD 785년 배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조정도 왕도 지휘도 질서도 잃고 방황하던 시대에 피흘리는 살육의 궁궐을 떠나서 8학사가 멀리 타국에 몸을 피해 온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문중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우리 도시조

 

劉荃 할아버지께서 서기 1082년도 당시 송나라 조정의

유명한 제상 王安石과의 불화로 8명의 조정 신하들이

고국을 등지고 멀리 고려로 피신하지 않을 수없었다고 하는지금까지의 설명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지를 살펴보자.

 

8명의 朝臣들이 한명도 아니고 조정을 떠나 멀리 他国으로숨어 몸을 피할 때에는 긴박한 政变 이 아니라면 있을 수없는일이다.

 

왕안석은 우리 유전 도시조가 한반도의 고려나라로 8학사와

피신해온 해보다도 6년이나 전에 이미 재상의 자리를 영원히 버리고 한거(闲居)生活에 들어간지 오래였으며 송의 조정도 평온했다.

 

왕안석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王安石

 

AD 1021.1.18-1086.5.21

1070년 송나라 神宗熙寧三年에 재상이 되어 新法운동을 펼침.

청묘법,균수법,시역법,면역법,방전균세법,농전수리법,또 군사상의 보갑법,보마법을 펼침과 동시에 과거제도도 개혁했다.

 

그러나 1074년이 되면 왕안석의 신법운동은 황실 인척과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며 드디어 1074년 4월에는 제상을

물러나게 된다.강녕 지사로 갔다가 잠시 다시

재상자리로 돌아오나 1076년이 되면 영원히 제상자리를 떠나

이제 한거생활로 들어갔다가 1086년 5월 21일 영면케된다.

 

우리 도시조 할아버지랑 7학사가 당시 평온한 송나라의 朝臣

자리를 버리고 낮설고 물설은 타국으로 올 이유가 전혀 없다.

 

1067年神宗继位,起用王安石为江宁知府,旋即诏为翰林学士兼侍讲,为摆脱宋王朝所面临的政治、经济危机以及辽、西夏不断侵扰的困境,1068年,神宗召王安石“越次入对”,即上书主张变法。次年任参知政事,主持变法。为指导变法的实施,设立三司制置条例司,物色了一批拥护变法的官员参与制订新法。

 

1070年王安石任同中书门下平章事,位同宰相,在全国范围内推行新法,

 

宋神宗迫于皇亲贵戚和反对新法大臣的压力,于1074年四月接受王安石辞去相位,再任江宁知府。次年虽又起用为相,但因新法派内部分裂及保守派的挑拨离间,王安石实际上难有作为,至熙宁九年十月再次罢相,出任江南签判,次年隐退江宁,过着闲居生活。

 

 

이제는 우리의 都始祖이신 刘荃 할아버지와 동료 7학사가

왕안석 때문에 송나라 朝廷의 大臣자리를 버리고 멀리 타국

고려로 피신왔다고 하는 예기를 더이상 해선 안될 것이다.

 

 

 3.竹諫逸集의 詩文에서 본다.

 

죽간일집의 시문을 통해서 나타난 통일 신라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자.

죽간일집의 시문은 134수로써 유전 도시조의 생활하던 시대의 모습이 많이 담겨있다.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시들을 종보 제일호(창간호)에서 골라본다.

 

 

가.新羅懷古(신라 옛생각)

 

 公子繁華地(귀공자 많던 번화한 땅에)

 年年秋草荒(해마다 잡풀만 우거져있네)

 興亡天有命(흥망은 하늘이 시킴이기에)

 曾未繫苞桑(뿌리박힌 국가인들 어찌하리오.)

 

 

나.金陵古蹟(금릉의 고적들)

 

  駕洛千年國(가엽다 천년된 가야나라가)

 人亡餘古都(님은 가고 옛터만 남아 있구나)

 樓臺多壯觀(궁전만은 굉장히 볼만 하구나.)

 良可擅名區(그렇기에 명승지로 이름났기도.)

 

 

다.遊鷄林寺贈法侶(계림사에 놀면서 법려 중에게)

 

 鷄林眞別境(계림이란 정말로 좋은 곳일세)

 僧在白雲間(중들은 흰구름에 에워 싸이고)

 好伴松陰鶴(소나무 그늘아래 나 르는 학)

 高飛絶俗寰 (세상을 싫다하고 이곳에 있는지)

 

 

라.過鷄林古都聽玉笛

  (계림 옛터를 지나면서 피리소리 듣다.)

 

 嫋嫋還淸絶(피리소리 가늘고 맑은데)

 獨雁下長風(그때야 기르기 바람타고 내려앉네)

 莫奏前朝恨(행여나 신라의 한을 풀어볼거나)

憑樓思未窮(누각위에서니 서글픈 마음 그지없어라)

 

 

마.登鷄林鳳凰臺(계림 봉황대에 오르다)

 

 昔聞此臺好(봉황대 좋다는거 옛날부터 들었지만)

 今上此臺遊(이제야 올라와서 놀아를 보니)

 風景多奇絶(경치가 좋아 서 사람들로 하여금)

 今人去復留(갔다가 다시와서 머물라 하네)

 

 

바.逢芬篁寺玉上人問答(봉황사에서 옥상인을 만나 문답하다.)

 

 爾在芬篁寺(네 이곳 분황사에 있으면서)

 芬篁景若何(분황사를 구경하니 경치가 어떠한가)

 煙霞超世廻(연기와 노을 이세상이 아닌 듯)

 水石繞門多(물과 돌은 문앞을 둘렀군요)

 傳法師元曉(전통은 원효대사 스승삼았고)

 

 

上記의 모든 詩句들은 하나같이 지금의 경주鷄林 에서 현장을 보면서 또는 지나 가면서 그 현장들의 소회(所懷)를 읊고 있는 詩文들이다.

위의 詩文들이 어떻게 高麗때 쓴

詩文들이 될 수있는가.

 

이러한 시들이 고려 중기의 문종 36년에 한반도에 이주해온 중국인 선조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新羅,金陵,鷄林,또는 鷄林을 지나면서.鳳凰臺에 올라, 분황사(芬篁寺)옥상인(玉上人)을 만나서 문답"등 가능한 싯구인가. 신라의 서울 계림의 現場에서 지은 살아있는 詩文들이다.즉 고려시대에 살면서 신라인들과 대화하며 시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분황사에서 옥상인을 만나 문답하다(芬篁寺玉上人問答)

 

지금 분황사에서 옥상인을 만나 문답했다고 하는 시를 보면서도 고려때 사람이 쓴 詩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일까?

 

통일 신라에 관해서 잠시 서술해 보기로 하자.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BC 57년에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세운 나라. AD 676년 文武王때에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멸망했다.

 

우리 유전 도시조 는 AD 782년에 한반도에 이주 오셔서 경주에서 직선거리 불과 27~8Km 떨어진 지금의 포항시 기계면 팔학산 아래서 사시면서 당시의 서울인 경주를 토대로 시를 읊고 또는 정무에도 종사 하셨다.

 

 

그리고 당시의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류는 번창해서 장보고 같은 해상 무역자와 수많은 유학생으로 분주했다.

 

 

경북 영천의 도시조님 묘소 비석 모습

 

 사.客中寒食(객지에서 한식날에)

 

長安寒食又今年(장안에서 맞던 한식을 올해도 맞는구나)

萬井千家忽斷煙(집집마다 불안때고 찬밥 먹겠네)

鷰子子遲來 春晝寂(제비 아직 오지않고 봄낮 고요하고)

杏花初發雨聲連(보슬비 내리는데 살구꽃 망울지네)......

 

이 시에서 長安 장안이란 당시 당나라(AD618~907) 수도 장안,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唐의 조정 서안 즉 장안에서 맞던 한식을 생각하면서 읊은 시구로써 만일

 

 AD 1082년 北宋朝(AD960~1127) 때에 한반도 에 오셨다면 그 당시의 北宋의 수도는 하북성 鄭州에서 가까운 開封이었으므로 長安을 화두 삼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도시조께서는 중국의 장안 즉 당나라의 수도 長安 떠올리면서 寒食을 생각하신 것이다.

 

장안에서 맞던 한식을 올해도 맞는구나(長安寒食又今年)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였다.

 

장안은 전한(前漢-劉邦 우리 선조가 세운 나라

및 수나라와 당나라의 (隋唐)의 수도였다.

 

지금까지 송나라 즉 고려때 동도해 오셨다면 "長安에서 맞던 한식을 올해도 .............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려때의 한반도에는 수도 개경(開京/현재 開城)

중국측에는 송나라 수도 河南省 開封이었다.

즉 長安은 唐나라의 수도였다.(隋唐共히 장안수도)

 

 

따라서 송나라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왕조이던 당나라 때에 오셨음을 알수 있다.

 

 

4.평택 임씨 임팔급,남양송씨 송규 시조의 연구 현황

 

八學士로 오신 나주,평택임씨 시조 되시는 林八及 후손들의 선조 동도 시기 연구 결과를 보기로 하자.

 

"평택 임씨는 우리나라 임씨의 도시조(都始祖)로 알려진 임팔급(林八及)이 당나라 문종(당의 14대왕. 재위기간;827- 840)때 한림학사로 동래(東來)하여 팽성(평택의 고호) 용주방(龍珠坊)에 세거 (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평택 (平澤)으로 하였고, 나주임씨는 고려때 대장군을 지낸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學士公 八及의 동도(東渡)시기는 당나라 문종조와 그후 후당의 명종조로 밝히고 있으나 년대로 보아 서기 827 년에서 933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약100년의 기간이 되고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후가 된다. 혹은 거금 3,000년 전으로 소급되는 주무왕원년 의 동도설도 있다."

 

 

상기 글은 평택임씨네 문중의 글을 복사해온 것으로써 그들 시조 임팔급의 동도 시기를 확정치 못하고 있다.

 

1997.1.15일 발간된 한민족 대성보(韩民族大姓譜)

평택임씨 시조 임팔급,남양송씨 시조 宋奎 두분의 동도 시기를 공히

중국 당나라/한반도 신라 시대로 적고 있다.

 

평택임씨 시조 林八及:중국 唐나라 文宗(서기 827~서기 846년)때 한림학사(翰林学士)였는데,간신들의 참소가 있자 팔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라(新羅)때 이부상서(吏部尚書)의 벼슬을 하였다.

 

남양송씨 시조 송규(宋奎):중국 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学士)로 난신의 참소를 입어 후당(後唐) 면종 원년,신라 경애왕(서기 926년)때에 동료 7학사와 같이 동래하여 경순와의 후대로 이부상서(吏部尚書)를 지냈다.

 

강릉 거창 유씨 시조 劉荃 始祖만 高麗문종 36년 (서기 1082년)으로 지금까지 기록하고 있다.

 

 

5.왜 300년의 착오가 생겼나.

   甲子착오 발생

 

그러면 왜 AD 782년을 1082년 즉 五甲子(60년X五甲子=300년)의 착오를 냈을까.

 

그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일반 민중의 삶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476년 안동권씨네 집안에서 제작된 성화보임을 볼때에 이 전에는 족 보가 한반도에는 없었다고 볼 수있다.

 

 

AD 782년도에 우리 선조가 중국 당나라에서 한반도에 이주해 온 이래 우리의 족보는 그후 1800년대초에 비로써 작성되게 된다.

 

 

즉 1000년 이상을 족보없이 살다가 그시대에 통신과 교통도 없던 시대에 전란과 초근목피로 생명을 이어가면서 살 아온 터에 이제 족보를 처음 생각해 볼 때에 어떻게 그 설계를 할 것인가.누가 선조들의 이름을 알겠는가.

 

족보를 연구하는 쪽에서는 우리나라의 어느 문중의 족보이건 도시조 밑에는 거의 수직으로 외아들 계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선조는 누구나 모두 벼슬을 했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그 당시의 사회는 모두 외아들만 두었을까. 모든 문중의 시조와 그이하의 오랜 기간 동안의 조상을 모른다는 이야기 를 하는 것다.즉 신화와도 같다고나 할까.어느 문중이나 예외는 없는 것이다.

 

그럼 우리 유전 도시조가 1082년도가 아닌 그보다 300년 즉 5갑자가 더 일찍이 연대가 올라갈 경우 한세대를 약 30년으로 본다면 300년의 기간은 열분의 선조 할아버지들께서 족보에서 누락된채로 작성되어 있는 것이된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가 발생한다.그러면 차라리 고증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그냥 묻어두자라고 한다면 등불을 켜서  덮어두자는 심히 논리에 역행하는

 

 처사가 되어 이 개명한 문명시대에 불가능한 일이되고 만다.

 

 

 

 

6.지금까지 여기 진행해온 상기의 고증에 부족한 점은 없는가.

 

가. 우선 고증의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지석문(誌石文)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석문에서 建中이라는 연대는 어떻게 명기되어 있을까.

건중은 송나라 연호가 아닌 당나라 德宗朝의 연호이다.

 

그 러면 멀리 한반도에 사는 우리 도시조의 후손이 어떻게 당나라 연호인 建中을 알고 誌石에 새기어 넣었을까 .

그냥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그 돌에다 새겨 넣었던 것인가.

 

 

한글자 한글자를 비석에 새길 때에는 그

영혼이 깃들어 있을 때만

 

가능한 행위이므로 이 建中丙子 정확히 도시 조 유전 할아버지의 아들 견규가 태어난 년도(AD796년)인 것이다.

 

誌石文이 세워진 년도가 분묘를 세운 때로부 터 오랜후 후손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경우이던 建中이란 연호는 도시조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 내려 왔던 결과이지 후손이 자의로 이러한 연대를 조작해 넣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아닌가.

 

이렇게 볼 때에 할아버지가 한반도에 동도해 오신 년도는 당나라 덕종조 시대인 建中三年 AD 782년이 변할 수 없 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귀중한 사실을 오늘 발견함에 있어 오늘날 많은 문중들이 자기 문중의 근원을 알지 못하여 노력하 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매우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간 일집의 팔학사 "친구분 들에게" 라는 시문 을 보면 여덟분이 함께 오신 것도 틀림이 없음을 볼때에 한반도에 사는 팔학사 후손 각 문중에게도 같은 희 소식 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나.왜 정확히 300년 즉 五甲子가 차이가 날까.

 

300년으로 정확한 오차가 발생함이 바로 갑자의 착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동도 年度가 高麗라고 했던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것은 지금도 항상 발생하는 인터넷상에서 한편의 소식이나 좋은 글을 올리면 무한정 복사 재생산 돼서 퍼져나가 는 현상과 전혀 다를바 없다.

 

각자 검증의 방법도 능력도 없던 시대에 어느 한 문중 어른되시는 기록자가 착오로 발생시킨 사항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傳受되 내려오면서 계속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또는 계속해서 조상을 美 化시켜오면서 그 행위가 누대를 거쳐 累增되어온 결과 외에 다름 아니다.

 

 

라.중국의 연호에 대해서 생각해 보.

 

중국 대륙에는 이루 셀 수도 없는 국가 왕조가 흥망을 이어갔으면 그 연호의 총숫자가 수천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당나라 덕종조의 建中이라는 연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나라 德宗 임금은 대종(代宗王)으로부터 정권을 인수 한면서 첫 연호를 建中이라고 했으며 그 연도가 AD 780년 이다. 다음해인 AD 781년은 악명높은 포악한 간신 노기(盧杞)가 정무를 틀어쥐게 되고 다음해 즉 建中三年 AD 782년도에는 팔학사가 함께 한반도로 들어오게 된다.

 

 

다음해 AD 783년 建中4년을 마지막으로 建中이라는 연호는 끝을 맺고 다음해 AD784년도에는 새 연호인 興元元年 이 된다.

 

또 다시 다음해인 AD 785년도에는 연호를 貞元元年으로 바꾼후 AD 804년까지 德宗의 연호는 계속된다.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의 맏아들 堅規가 태어난해 建中丙子는 따라서 AD 796년이므로 엄밀히는 德宗貞元12년이 되 는 해이다.그러나 멀리 한반도에서는 덕종시대의 초기 연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을 것이다.

 

도시조 할아버지가 한반도에 오신 연도는 AD 782년에 변함없다.

 

 

7.그러면 문중에서는 이러한 발표를 반가워 할까.

실로 이제 와서 후손된 도리로써 난감한 일이 아닐 수없다 하겠다.지금까지 우리가 정중히 모셔왔던 족보에 300년 의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다.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없다.문중의 모든분들의 의견은 매우 다양하리라고 본다.

 

한번 생각해 보자.이 지구가 존속하는 한 한반도의 우리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의 후손들도 영원히 생존과 氏族의 繁盛을 해 나갈 것이다.

 

 

 우리 후손들도 열심히 韓中間 조상을 찾는 후손들도 나올 것이다.

이유는 지금 이 싯점이 아닌 영원한 후손을 중심으로 한 사고의 전환을 갖어 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事實이 명확하다면 어떻게 어느시대까지 수용치 않을 수있겠는가.

시대는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8.이제 이쯤해서 반론의 자료를 미리 준비해 보자.

 

  . 연호 건중(建中)에 관하여

 

 

  중국 역사에 건중연호는 "建中"과 "建中靖國"둘이 있다.

    

     건중(建中)병자(丙子)

 

     중국 당나라(唐朝) 제 9대왕 덕종(德宗)朝의 년호로써 건중

     (建中) 연호는 아래와 같이 변화한다.

 

     당나라

     AD 780년 (庚申) 唐德宗 建中1年

          781년 (辛酉)唐德宗 建中2年

          782년 (壬戌)唐德宗 建中3年

          783년 (癸亥)唐德宗 建中4年

          784년 (甲子)唐德宗 興元1年

          785년 (乙丑)唐德宗 貞元1年

                            ~

          796년 (丙子)唐德宗 貞元12年(建中17년 해당

                             刘荃都始祖의 長子堅規탄생 년도)

                            ~

          804년 (甲申)唐德宗末年 貞元20年.

 

     

      建中靖国에 관하여

      건중정국(建中靖国)은 건중(建中)이 아닌 다른 연호이다.

      건중정국(建中靖国) 송나라때의 연호로써 AD 1101년도

      단,1년만 쓰던 송 휘종(徽宗)때 연호로써 "辛巳年"이다.

 

      (1)연호란 건중(建中)과 건중정국(建中靖国)완전 다르다.

      (2)건중정국(建中靖国)1101년도는 辛巳年으로

          丙子年은 없고 해당 안된다.

 

 

     나.796년 (丙子)唐德宗 貞元12年의 "貞元12年"의

        "丙子"년을 즉  長子堅規탄생 년도를 왜 "貞元丙子"라고  

        하지 않고 "建中丙子年"이라고 했을까.

 

        당시의 당나라 시대나 우리 한반도의 통일 신라 시대나

        지금같은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이 있던 시대가 아니다.

 

        시조 할아버지는 멀리 浮海 東渡해 오신 이국의 먼나라

        에서 고국의 재상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나올 때에 그 

        당시의 연호에 고착된 관념이 곧 "  建中"이었지 그후

        연호의 변동이 개념화 될 상황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있

        다. 

 

      나.왜 그럼 신라시대에 오신분이 "新羅懷古"란 시를 쓰셨을

        까. 혹시 고려 시대 오셨으니까 신라회고라고 하셨겠지.

 

        이문제에 관해서는 이렇게 생각된다.

       (1)신라 왕조는 BC 57년 朴爀居世에 의해서 건국되어

           일찌기 법흥왕 15년 (BC 528년)이 되면 佛國寺를 건

           립하는 등 통일신라 이전의 구 신라 왕조시대에서 이미

           상당한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우리 유전 도시조 할아버지께서 신라땅으로 거너오신

           년도는 BC 782년선덕왕(宣德王3年)으로써 이미

           BC 676년도 文武王 16년에 신라는 통일된다.

           즉 당시의 사람들로써는 구 신라왕조를 회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诗文들이 상기 열거한 바와 같이 말하고

           고 있지 아니한가.

 

 

9.팔학사 동도시(八學士東渡詩)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八學士東渡詩

 

林八及(翰林学士,兵部尚书) : 入人浮海兮 桂棹蘭檣

           여덟사람이 바다를 건넴이여

           계수나무 돛대와 난초의 삿대로다

 

薛仁敬 ;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李씨(중국)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를 당하는도다

 

許 董 : 吾徙東矣兮 可以免禍

          우리들은 동으로 가니

          가히 화를 면하리로다

 

劉 荃(翰林学士,兵部尚书) : 二老入海兮 殷道衰亡

         二老(箕子,微子)가 바다로 가니

         殷나라도 망하더라

 

宋 奎 御史大夫): 接淅而去兮 謝暗投明

         절강(淅江)에서 떠남이여<해석오류>기존문집에서

         "接淅(서둘러)떠남이여."<정정함>

         어두운 곳 버리고 밝은곳 찾아가네

 

              cf:쌀일을 ""字를

           浙江省 할때의 절(浙)字로 잘못 해석해 놓았음

           기존문집에서...

             

             

 

  崔 沍 (吏部侍郎): 波濤濶矣兮 舟楫利逝

         파도가 넓음이여

         뱃길을 편히 가누나

 

權之奇(翰林) : 見機而作兮 疏廣之徒

         기미를 보아 행동하니

         疏廣같은 사람들이로다

 

孔德狩(中郎将 : 賢士出東兮 竭誠盡忠

           賢士들이 동으로 가면

           정성과 충성을 다 하리로다

 

“賢士들이 참소를 당하는도다”

 “ 가히 화를 면하리로다”

 “ 어두운 버리고 밝은곳 찾아가네”

 

이러한 팔학사의 동도시는 당시 당 조정에서

 惡毒한 奸臣 (노기(盧杞 Luqi ?~785年)와의

험악한 궁중을 피해서 절박하게 8명의 조신

(朝臣)들이 함께 행동하는 대 변란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의 都始祖 劉荃 할아버지는 AD 782년 唐나라 조정의 兵部上書로 계시다가 오셨다는 根本이 뚜 렸한 자랑스런 분인 것이다.

134首의 죽간시문 가운데는 兵衛講武(무술을 강의하다) 兵衛試射(연무장 에서 활쏘기 연습하다.)이러한 시를 지으셨다.

병부상서 경력도 틀림없는 자랑스런 시조 할아버지시

 

함께 멀리 이국땅에 와서 생활하던 팔학사 동료들에게도

각기 시를 지어 위로했던 점을 볼때에 우리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는 일개 평민 백성이 아니었음이 이곳에서 증명된다.

 

 

 

 

  

 

 

 

 

최종 완성 고증문 보기:

http://blog.daum.net/rosy900/5663709

 

 

 

저의 이와같은 고증문에 관하여

 

기탄없는 다른 의견과 지적 기다리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제 2차 고증문


제 2차 고증문(第二次考證文)

http://blog.daum.net/rosy900/5667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