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考证资料

刘承备

송화강 2014. 7. 9.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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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유씨(江陵劉氏): 강릉유씨 본관 시조 승비(承備)

 

 시조 및 본관의 유래 : 강릉은  강원도 영동지방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예국(濊國) 이었는데 한사군을 정할 때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 하였고, 통일신라  선덕왕(善德王)이 소경(小京)으로 삼아  사신을 두었다.

 

685년(태종무열왕 5) 하서주(河西州)로 개편, 경덕왕(景德王) 때 다시 명주(溟洲)로 개편하였으며,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凍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으며 940년(태조 23) 다시 영주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쳔을 거쳐 1388년(우왕 14)에 교주강릉도(校州江陵道)로 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1395년(조선 태조 4) 강원도로 개칭하고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1666년(현종 7) 원양도(原襄道)로 개칭하여 강릉현으로 강등되었고, 1675년(숙종 1) 다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정조(正祖) 때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도명(道名)을 원춘도(原春道)로 개칭하였다가 1789년(정조 13) 강릉부(江陵府)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관찰부(觀察府)를 두었으며 1896년(고종 33)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이 되었다.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고, 1955년 강릉읍과 성덕면(城德面)·경포면(鏡浦面)을 편입하여 강릉시(江陵市)로 승격되었다.

 

강릉유씨(江陵劉氏)는 거창유씨(巨昌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도시조(都始祖) 유 전(劉 筌)의 9세손 유승비(劉承備)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벼슬이 누진하여 좌복야(左僕射)로 치사(致仕)했고, 그의  증손(曾孫) 창()이 조선개국2등공신(朝鮮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말에 둔촌(遁村) 이 집(李 集 : 학자)이 목은(牧隱) 이 색(李 穡)에게 좋은 사윗감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목은 이색은 자기 문하에 재주꾼이 많지만 권  근(權 近)과 유 창(劉 敞)을 당해낼 재주는 없다 하자 이 집(李 集)은 유 창을 사위로 맞이했다고 한다.

 

 특히 창은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어 소요산(逍遙山)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대제학(大提學)·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역임한 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이르러 궤장(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창의 증손 한량(漢良 : 이조 좌랑 계주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진주성(晉州城) 방어에 참전, 왜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창(竹槍)으로 대전했으나 성(城)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으며, 창의 현손(玄孫) 세분(世분 )은 진원 현령(珍原縣令)으로 나가 청백(淸白)한 정사(政事)로 소문났었다.

 

 참판(參判) 선보(善寶)의 아들  호인(好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학문(學問)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1574년(선조 7) 여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祇雨)할  결심으로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정좌(正坐)하고 기원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왕(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를 하사했다.  특히 호인(好仁)은 일생을 낙천적으로 살았는데, 자기가 사는 동명(洞名)을 자하동(紫霞洞), 자기 거처를 정정당(定靜堂), 바깥 사랑채를 불우당(不憂堂), 집앞에 있는 못을 완묘호학지심지(玩妙好學之心池)라 이름하고 풍류와 환락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밖의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나갔던 덕문(德文)과 전주(全州)에서 "유효자(劉孝子)" 유명했던  경달(景達)이 뛰어났으며, 그의 아들 기원(基源)은 가뭄 때 기민(飢民) 구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효(孝)와  충(忠)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동원(東源 : 경달의 아들), "효도삼대(孝道三代)"  정맥(旌脈)을 이은 병관(秉瓘 : 동원의 아들)과 함께 강릉 유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38,844 가구,  161,634 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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