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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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菴先生文集 | ||||||
현대어서명 |
선암선생문집 | ||||||
청구기호 |
奎 6851-v.1-2 | ||||||
편저자(한자) |
劉敞(高麗) 著 |
판본사항 |
木版本 |
간행지 |
[刊地未詳] |
책권수 |
4卷 2冊 |
편저자(한글) |
유창(고려) 저 |
간행연도 |
[高宗40年 (1903)] |
간행자 |
[刊者未詳] |
책크기 |
30.9×19.8cm |
匡郭 |
四周雙邊, 半葉匡郭:21.2×15.9cm, 有界, 9行 18字 |
版心 |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표기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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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紙,版心,卷頭書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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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跋,卷首,卷末 |
序:上之四十年癸卯(1903)申泰觀. 跋:後孫秉琥識 | ||||||
表題紙,內題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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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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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書記,內賜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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刊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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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
劉敞(?-1421) 및 그의 後孫의 詩文集 | ||||||
목차 |
卷1:詩(李牧隱-穡-權陽村-近-逮獄得釋喜詠, 山水歌, 附諸賢酬唱詩(六絶)), 會盟祝文-應進, 附錄:敎書, 日月錄抄, 國朝寶鑑抄, 朝野類輯抄, 字敘, 諡號解義, 卷2:政案宦蹟, 出處實錄, 家狀, 墓碣銘-幷序, 長城松山祠宇開基祝文, 松山祠宇上樑文, 松山祠宇記, 奉安祝文, 重修還安祝文, 常享祝文, 牟陽-高敞舊號-儉巖書院奉安祝文, 常安祝文, 永春龍溪書院上樑文, 奉安祝文, 仁同紫岡書院上樑文, 奉安祝文, 常享祝文, 卷3(續集):太宗恭定大王御筆閣上樑文, 御筆閣重修記, 實紀序, 實紀跋, 實紀重刊序, 江陵劉氏世稿序, 卷4(附世稿):判書公墓碣文, 龍溪書院配享祝文, 隱齋公行錄, 儉巖書院配享祝文, 樂軒公行蹟, 述齋公遺稿(詩:訓子(二首), 詠籬菊, 詠盆梅, 自驚, 偶吟, 當壬亂感吟), 行蹟, 遺稿序), 天放公遺稿(詩:君子花, 山水圖, 中秋月, 臥壑松, 待月爲陰雲所翳, 詠梳, 桃李, 梅柳爭春, 劒, 自詠, 書奉天寺樓窓, 田園(六言六首), 在嶺南望遠-從遊曺南溟時, 春帖, 贈樵童), 行錄, 附追錄, 長興汭陽書院配享錄, 重修還安祝文, 摠管公-夢龍-原從功臣會盟錄書, 水使公-纘先-原從功臣會盟錄書, 獅山樵老-德昭-行蹟, 縣令公-泰逸-會盟錄, 漢惺公行錄) |
仙菴先生文集 |
저자 |
劉敞(高麗) 著 | |||
현대어서명 |
선암선생문집 |
간행년대 |
[高宗40年(1903)] | ||
청구기호 |
奎6851-v.1-2 | ||||
책수 |
4卷 2冊 |
판본 |
木版本 |
사이즈 |
30.9×19.8cm |
본문 | |||||
"劉敞(?~1421) 및 그의 후손의 시문집으로 1903년 (光武 7)世孫인 柱昊와 친척 秉禹 , 秉琥등이 엮었다. 劉敞은 1371년(高麗 恭愍王 20)文科에 급제, 成均學諭가 되고 博 士, 門下注書를 역임했다. 初名은 敬, 李成桂와 절친하여 측근에서 항상 학문을 강론 해 주었으며 成均祭酒 등을 지냈다. 1392년(太祖 1) 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開國功臣 2 등으로 大司成에 올랐고 그 뒤 中樞院副使, 大提學, 世子右副賓客 등을 거쳐 1408년( 太宗 8) 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守墓官이 되어 3년동안 묘를 지켰다. 1410년 吉 州道察理使로 나갔고 1416년 府院君에 進封됐다. 앞에는 申泰觀의 序가 있다. 卷{1}에 는 詩(3), 文(1) 및 附錄으로 敎書, 日月錄抄, 國朝寶鑑抄, 字敍 등이 들어있으며, 卷 {2}에는 政案宦蹟, 出處寶錄, 家狀, 祝文(9), 書院上樑文(3) 등이 수록됐다. 卷{3}에 는 太宗恭定大王御筆閣上樑文이, 卷{4}에는 江陵劉氏의 世稿(6), 會盟錄書(3) 및 世稿 의 行蹟과 詩 등이 포함돼 있다. 世稿 가운데 述齊公遺稿에는 詩(7), 行蹟이, 王族公 遺稿에는 詩(15), 行錄이 곁들여 있다. 끝에 후손 秉琥의 識가 있다. 劉敞의 詩에서는 李穡, 權近과의 관계 및 당시 文人들과의 交友 상태를 엿볼 수 있으며 <會盟祝文>은 66명의 開國功臣 이름과 그들의 행동 등이 포함돼 있어 開國史를 연구하는 자료가 된 다. 漢良(玄孫), 世분(4代孫), 德文(6 代孫), 景聖(10代孫) 등 劉敞의 후손들 가운데 漢良에 관한 기록은 壬辰亂 연구에 도움이 될것이다. 隱齊 漢良은 茂長縣監으로 있을 때 壬辰亂이 일어나자 義兵을 이끌고 적진에 뛰어 들었으며 포위된 晋州城에서 싸우다 함락되자 南江에 投身했다. 祝文이나 上樑文 가운데 나오는 永春 龍溪書院, 長興 汭陽 書院 仁同紫岡書院 등은 書院연구에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다. |
선암집 (仙菴集)(15-16c) | ||
간략서지 |
奎 6851仙菴 劉敞의 시문집. 4권 2책. | |
간략해제 |
고려대 소장본으로 ≪仙菴實紀≫라는 책이 있다. 그것은 1826년(순조 26) 후손 興七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黃景源의 서문이 있고‚ 상권말에 吳翰源의 발문이 있고‚ 하권 말에 흥칠의 발문이 있다. 그 책의 체제를 보면 卷上은 유창의 실기부분이고 나머지 卷下는 <下代實紀>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규장각 소장본은 <실기> 부분 이외에 유창이 쓴 몇편의 시문집과 후손들의 문집이 합집되어 있다. 규장각본의 체제를 살펴보면 본 문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유창의 시문집과 실기를 합친 부분이다. 그러나 유창의 저술은 시 3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부분은 <-抄>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서적에서 유창관련 내용을 전재하거나 후손들이 유창을 여러 서원에 배향할 때 쓴 글이거나 행장과 비슷한 실기류의 글로서 유창의 가계와 경력을 적은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른 한 부분은 유창의 후손들에 관련되는 문헌이다. 이 부분을 다시 두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번째는 劉德文과 劉好仁과 같이 약간의 시문이 남아 있는 경우 <유고>라는 형식으로 글을 묶고 있고(유덕문의 ≪述齋公遺稿≫와 유호인의 ≪天放公遺稿≫)‚ 두번째는 시문이 전해지지 않는 후손 劉漢良·劉世玢·劉景聖 각각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문집명은 ≪선암집≫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유창과 유창 이후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춘 후손들의 행적을 함께 다룬 유씨 가문의 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문집의 수록 내용을 본다면 <-抄> 형식의 글을 통해 유창과 태조 및 태종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실기류의 글을 통해 유창의 출사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出處實錄>은 유창이 정몽주의 제자이면서 다른 출처관을 가지게 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 |
편저자 |
유창 (劉敞) | |
저자개요 |
1352-1421 (공민왕1-세종3)初名: 敬‚ 字: 太和·孟儀‚ 號: 仙菴‚ 本貫: 江陵‚ 父: 天鳳‚ 母: 喬桐 田氏 | |
저자내용 |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 成均館學諭가 되고‚ 博士와 門下注書를 역임하였다. 1375년(우왕 1) 通禮門祇候가 되고‚ 典法佐郞·禮儀正郞·軍簿正郞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成均司藝‚ 이어 成均祭酒를 역임하였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成均館大司成이 되고‚ 이어 左散騎常侍로 천직하였다. 1393년(태조 2) 中樞院左副承旨가 되고‚ 다음해 中樞院副使를 지내고 玉城君에 봉하여졌으며‚ 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承寧府尹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하였으며‚ 예문관대제학·世子右副賓客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守墓官이 되어 3년간 능을 지켰다. 1410년 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參贊議政府事·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 世子貳師가 되고‚ 1416년 玉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21년(세종 3) 궤장을 하사받았다. 李成桂와 일찍부터 사귀어 그에게 經史를 강론하였으며‚ 특히 송나라 眞德秀의 ≪大學衍義≫를 즐겨 강론하여 世道를 만회할 뜻을 품게 하였다. 개국 후에도 대사성에 있으면서 ≪대학연의≫를 여러 차례 진강하였다. 그는 성격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며 언행이 謹篤하여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이 겸손하여 사람들이 당나라의 婁師德에 비유하였다. 시호는 文僖이다. 사승관계를 보면 유창은 처음에 야은 田祿生(1318-1375)에게서 수학했고 나중에 이색과 정몽주 문하에서 ≪소학≫과 ≪대학≫을 집중적으로 연마했다. 유창은 사후에 長城의 松山祠宇·牟陽의 儉巖書院·永春의 龍溪書院·仁同의 紫岡書院에 배향되었다. | |
1903. 申泰觀(신태관)은 평소 유창의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剛齋 宋稚圭(강재 송치규:1759-1838)와 梅山 洪直弼(매산 홍직필:1776-1852) 문집의 서문과 발문을 보고서 유창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유창은 정몽주와 이색의 학문적 정통을 계승했고 ≪대학≫ 格致의 올바른 공부를 습득하여 조선조 개국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문집의 간행 경위를 보면 후손 秉琥와 一源 등 4-5인이 유문을 적극적으로 수집했고‚ 柱昊와 秉禹의 부탁으로 서문을 쓰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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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제:권제목: 卷之一 |
仙菴集 내용개요 | |
詩 |
李牧隱-穡-權陽村-近-逮獄得釋喜詠 (이목은-색-권양촌-근-체옥득석희영) 山水歌‚ 附諸賢酬唱詩(六絶) | |
會盟祝文-應進 (2) |
1404년(태종 4)에 왕이 여러 공신을 거느리고 上帝와 종묘사직에 맹서한 축문으로 66명의 공신명단이 부기되어 있다. 맹서예식을 통해서 군신이 한 마음이 되어 상호 충성을 다짐하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서 양자의 관계가 골육처럼 절친하고 쇠와 돌처럼 단단하게 되어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에 힘쓸 것을 결의하고 있다. 구체적인 인물을 보면 義安大君 和·金士衡·河崙 등이 열거되고 있다. 유창은 <推忠協贊開國功臣資憲玉川君>으로 되어 있다. | |
敎書 (8) |
1393. 유창의 공업과 학덕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인물평. 먼저 인품이 강직하고 순수하며 신중하고 겸손하다고 평가하고서 유창의 현실참여(조선개국)를 정당화해 주면서 자신을 도와 왕조 개창에 탁월한 업적을 세운 데 대해 치하하고 있다. | |
日月錄抄 (9) |
1309. 이 부분은 ≪日月錄≫에서 유창 관련 기록을 전재한 글임. 고려 공양왕 2년(1309) 尹彛와 李初의 무고로 옥사가 발생하였는데 이색과 권근이 이에 연루되어 淸州獄에서 고초를 치르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사태의 전개를 비관적으로 보았지만 유창은 두 사람을 하늘이 낸 위대한 인물로 간주하면서 반드시 이변이 발생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다. 라고 예언을 했다. 실제로 갑작스런 비가 내려서 감옥을 무너뜨리니 두 사람이 화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 일로 유창의 선견지명이 세상에 회자되었다. | |
國朝寶鑑抄 (10) |
1392-1393. 이성계와 유창에 관련된 두가지 일화를 ≪국조보감≫에서 전재한 글이다. 첫번째는‚ 대간이 태조에게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경연자료로 활용할 것을 요청해서 大司成 유창과 內舍人 柳寬이 입직시에 진강한 일이다. 대간의 주장에 따르면 ≪대학연의≫에는 성현의 교훈과 고금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군주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이치와 마땅히 실행해야 할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두번째는 유창의 學仙에 대한 태조의 반대와 관련된 일이다. 이 부분은 ≪문집≫의 여러 곳에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태조의 仙에 대한 반대의견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1393년에 좌산기상시로 있으면서 사직하여 仙術을 공부하겠다고 요청하자‚ “그대가 나와 만나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은데 지금 그대가 갑자기 나를 떠나 간다면 앞으로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소? 仙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君父를 버리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면 불충이 되고‚ 어버이를 버리면 불효가 될 것이다. 그대가 선을 배우고자 하는 뜻은 무엇이요?”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 |
朝野類輯抄 (11) |
1413. 고려 왕실의 후예인 王庥의 서자가 민간에 생활하고 있었는데‚ 知申事 金汝知가 이 사실을 접수하고 사실여부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태종이 “개국초 고려 왕족이 목숨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는데‚ 그러한 일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라 한 두 대신의 생각이었다.”며 고려 왕실 후예에 대한 처벌을 금지시켰다. 이에 유창은 “전하‚ 오늘 말씀은 우리 종묘 사직에 영원한 복을 가져올 것입니다”라고 찬성하는 반면에 대간들은 왕씨의 주살을 요청했다고 한다. | |
字敘 (11) |
이색이 가까이에서 유창을 관찰한 내용 및 이색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 이색이 大司成에 재직할 당시 자기 문하 80여 인의 제자가 있었는데 유창의 학업 태도와 행동거지가 출중했다고 한다. 일례로 유창은 ≪書經≫ <益稷>의 “敕天之命‚ 維時維幾” 8자의 의미를 완미하느라 오랫동안 소리내어 읊조렸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이색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학자들은 요임금·순임금·문왕을 ‘生而知之者’로 치부하고서 그들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世道와 人心이 타락한 데에 연유한다. 그러나 聖賢과 愚不肖는 모두 天地로부터 동일한 것을 품수받았으니 厚薄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단지 욕망의 취향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뿐이다. 그러므로 수양의 과정을 통해 本然之善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에는 劉敞의 이름이 초명대로 劉敬으로 기록되어 있다. | |
諡號解義 (13) |
유창의 시호인 ‘文僖’를 풀이하는 글. | |
政案宦蹟 (1) |
1405. 政案은 고려시대 관원의 인사관리를 위하여 특별히 작성하는 기록으로 오늘날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에 해당된다. 내용에는 관원의 성명‚ 생년월일‚ 관직 경력‚ 4代祖 및 장인의 성명과 관직‚ 친가와 외가의 본향‚ 공적과 과실 등이 있다. 이 부분도 일반적인 정안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 |
出處實錄 (7) |
유창의 인생 경력은 여말 혼란상으로 인한 은거결정‚ 이성계의 三顧에 비롯된 현실참여‚ 말년의 學仙 과정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 문헌은 그의 인생유전의 전개과정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먼저 사승관계를 보면 그는 처음에 야은 田祿生(1318-1375)에게 수학하고 그 뒤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대학≫ 공부를 해서 여말의 학문적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윤이와 이초의 무고사건 이후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실제로 은거하며 거문고와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성계가 3차례에 걸쳐서 군주와 신하의 이상적인 회우를 거론하며 출사를 권유했다. 이에 유창은 왕업을 쌓는 군주란 천명을 어기거나 만인에 대한 사랑을 방기해선 안 된다고 자기주장을 명확히 하고서 이성계의 요구에 응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정몽주는 진퇴란 사람마다 다르다면서 자신은 절의를 지킬테니 그대는 마땅히 충성을 다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창의 出世 이후에 金士衡·河崙·成石磷 등도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조와 유창의 각별한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태조는 천명과 인사에서 의문점이 생기면 유창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다. 유창은 ≪대학≫과 ≪서경≫ <홍범>의 五事의 내용을 치자의 덕목으로 태조에게 항상 강조했다. 특히 學仙의 문제에 대해서 태조는 漢 高祖와 張良의 관계를 원용해서 반대하고 있다. 유창은 말년에 歸山伴仙의 소망을 이룬 뒤에 자식들에게 자신의 처세관에 대해 “나는 당나라 裵度의 진퇴에서 時中의 의미를 자득했고 항상 范仲淹의 先憂後樂 자세에서 현실구제의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너희들도 아버지의 뜻을 계승해서 輔國盡忠하라”고 당부를 했다. 유창의 진퇴에 대해 龜齋 南在(1351-1419)·騎牛 李行·夏亭 柳寬 등이 칭찬했다는 기록을 말미에 부기하고 있다. | |
家狀 (10) |
유창의 선조·관직경력·후손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말미에 장례시 정부가 개국 공신에 대해 기울였던 관심을 적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는 致祭文·墓表·태종의 친필 등이 어디에 보관되었는가와 후손과 학자들이 長城에 松山祠宇를 건립하고 牟陽 儉巖書院에 유창을 배향한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 |
墓碣銘-幷序 (13) |
李光正이 유창의 일반적인 인적사항과 사승관계‚ 학덕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유창의 증조부 承備가 관직에서 은퇴한 뒤 江陵 羽谿에 터전을 잡게 되어 강릉이 유씨의 본관이 되었다. 태조로부터 ‘선암’이라는 호를 하사받고도 자신의 소망을 성취하지 못하다가 玉川府院君에 진봉될 무렵에 休退할 수 있었다. 그때 누린 산수의 즐거움을 <山水歌>로 읊었다. 사후에 長城과 牟陽 이외에 永春의 龍溪書院·仁同의 紫岡書院에 배향된 일 등을 담고 있다. | |
長城松山祠宇開基祝文 (18) |
후손 命臣이 쓴 글이다. 유창을 추모하려고 사우를 건립하기 위해 터를 닦으면서 지은 글이다. 그 당시 유창이 不祧의 은전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 |
松山祠宇上樑文 (18) |
사우는 제사를 지내는 단과 터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지만 목적은 후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에만 있지 않고 士林이 鄕賢을 추숭하는 데에 있다. 邊相瓚이 썼다. | |
松山祠宇記 (20) |
金允秋가 썼다. 처음에 不祧의 신주를 서울에서 海西의 延安으로 안치했다. 그 뒤 유창의 4대손 世玢이 陰補로 珍原(장성군 소재) 현령으로 부임할 때 장성에 별도의 사우를 설립하여 옮겨와 봉안하게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사우가 소실되었지만 <勳誥盟券>만이 소실을 면하여 다시 사우를 중건하게 되었다. | |
奉安祝文 (21) |
장성부사 李英敎가 유창의 不祧를 봉안하며 쓴 글임. | |
重修還安祝文 (22) |
金章煥이 유창의 학덕을 기리는 글임. | |
常享祝文 (22) |
柳光寅이 유창의 학문연원을 정몽주와 이색에 연결시키며 조선 개국의 공업을 적고 있다. | |
牟陽-高敞舊號-儉巖書院奉安祝文 (22) |
유창의 학덕을 기리는 글이다. | |
常安祝文 (23) |
朴仁壽가 유창이 세속의 스승이자 모범으로 사림의 한결같은 추앙을 받고 있음을 적은 글이다. | |
永春龍溪書院上樑文 (23) |
유창이 정몽주와 이색에게서 ≪소학≫과 ≪대학≫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받은 일‚ 태조에게 군주로서 천명과 仁을 강조한 일 등이 실려 있다. 그의 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평소 선술에 관심을 가져 功名 때문에 초래될 수 있는 화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속의 화려한 평가나 부귀영화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민생 안정을 자기 문제로 삼고 왕업의 기틀을 자기 책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淵泉 洪奭周(1772-1842)가 썼다. | |
奉安祝文 (25) |
金喆遠이 유창의 학덕과 진퇴가 출중했음을 기리고 있다. | |
仁同紫岡書院上樑文 (25) |
申宅京이 유창의 학덕을 소개하면서 끝부분에 서원의 위치와 건축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 |
奉安祝文 (28) |
유창의 학문을 ‘格致誠正’으로 규정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 |
常享祝文 (28) |
張仁遠이 유창의 학덕과 후세에 대한 영향을 적고 있다. | |
太宗恭定大王御筆閣上樑文 (1) |
태종이 친필로 ‘公心一視’라고 써서 유창에게 하사했는데‚ 후손들이 인동 숭산리에 각을 세워 그것을 안치할 때 쓴 글. 유창을 유림의 종장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그를 정몽주와 이색의 嫡傳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출사하여 경연을 통해 군주의 덕을 함양시키고 文苑에서 일세의 기준으로 활약했다고 평가한다. 張福樞가 썼다. | |
御筆閣重修記 (2) |
舫山 許薰(1836-1907)이 ‘公心一視’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먼저 心은 온몸을 바로잡고 모든 변화를 낳는 근본이고‚ 公은 공정하게 일처리함이다. 마음이 사사롭게 작용하게 되면 군주는 국가를 보지할 수 없고 신하는 가문을 보호할 수 없게 된다. 즉 義理에 바탕을 둔 공정함으로 한결같이 일을 처리해야지 사사로운 人欲이 개재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대상과 내가 역할면에서 차이가 있을지라도(物我雖分) 공정한 원칙에 의거해서 한결같이 대우할 수 있게 된다. | |
實紀序 (4) |
유창이 이성계의 개국에 참여한 일을 伊尹과 夏나라 湯王‚ 呂尙과 周나라 武王의 관계에 견주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인재와 국가를 위해 국량을 펼칠 수 있는 지식인(士)은 어느 시대에나 항상 있지 않고 특정한 시기(운명)와 부합해야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에 유창의 학덕이 후손인 天放公 好仁과 隱齋 漢良에게 계승되어 간 점을 특기하고 있다. 江漢 黃景源(1709-1787)이 썼다. | |
實紀跋 (6) |
진나라 말에 蕭何와 曹參이 유방(劉邦:한 고조)를 보필하여 漢나라를 개창했고 수나라 말에 房喬와 杜如晦가 李淵(당 고조)을 도와 극심한 혼란을 수습했다. 이 일을 은연 중에 유창이 이성계를 보좌하여 조선을 개국한 일과 연결시키고 있다. 유창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왕조 건설에 가담했는데 이는 그가 ≪대학≫의 修齊治平의 도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현실을 구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몽주의 盡節과 유창의 盡忠은 시대를 파악하는 관점의 차이일 뿐 義와 王道의 측면에서 보면 양립될 수 있다고 본다. 말미에 후손 好仁이 이이의 학문을 전수했고‚ 漢良이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사실을 특기하고 있다. 吳翰源이 썼다. | |
實紀重刊序 (8) |
유창이 경연에서 태조에게 <홍범>의 五事(貌言視聽思)의 중요성을 설명하자‚ 태조가 그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충고를 부탁한 일이 실려 있다. 말미에 유창의 시문이나 관련 문헌이 남재 등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遊軒 張錫龍(1823-1906)이 썼다. | |
江陵劉氏世稿序 (世稿序1) |
왕조가 오랫동안 안정을 누리려면 지배층이 世德을 쌓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주나라를 들면서 ≪시경≫ <文王>의 “濟濟多士‚ 秉文之德(원문에 보면 뒷구절이 文王以寧으로 되어 있다. ≪漢書≫<賈山傳>에 보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앞뒤 귀절 사이에 秉文之德을 삽입하고 있다.)” 부분은 先人의 도덕 수양을 말하고 “凡周之士‚ 不顯亦世” 부분은 후인이 선조의 덕을 追念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부분이 강릉 유씨의 세고인만큼 유창이 학덕과 공업에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漢良·世玢·德文·好仁 등이 유창의 학덕을 계승하고 있는 점을 비유하고 있는 듯하다. 말미에 또 선조의 덕이 담긴 유문의 수집과 문집 간행을 통한 가업의 계승을 ≪주역≫ 同人괘의 “君子以類族辨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吳治善이 썼다. | |
判書公墓碣文 (1) |
金履牧이 유창의 동생인 治의 가계와 불행을 적고 있다. 그는 北靑으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또한 그의 구체적인 사적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워 하고 있다. | |
龍溪書院配享祝文 (2) |
유창을 용계서원에 배향할 때 重潤이 그의 학덕을 기리며 쓴 글이다. | |
隱齋公行錄 (3) |
大玉이 유창의 증손 漢良(1548-1593)의 학덕과 의병활동에 대해 쓴 글이다. 자는 忠謙이고 호는 隱齋이다. 1590년 茂長 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어 淸白吏로 평판이 높았다. 얼마 뒤 임진왜란을 당해서 그는 아들에게 “신하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왜냐하면 임금이 준 의복을 입고 임금이 내려준 봉록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한편 吏校와 士庶들에게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직분과 생업을 충실히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뒤 군비점검과 출동준비를 하던 중 高敬命의 패사 첩보를 듣게 된다. 그는 비분강개하면서 정예병을 이끌고 왜군을 星州 開寧까지 추격하며 전공을 세웠다. 김천일이 방어하는 진주성이 위급하다고 소식을 듣고 海美 군수 鄭名世·거제 군수 金浚民과 합세하여 진주성으로 진격했다. 성에 합류한 뒤 치열하게 방어전을 하다 張潤의 전술에 따라 開門接戰을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될 즈음 한량은 남강에 투신하게 된다. 그는 宣武原從勳에 올랐고 그의 행적은 ≪牟陽邑誌≫<人物篇>과 도내의 ≪節義錄≫ 등에 실리게 되었다. | |
儉巖書院配享祝文 (6) |
방손 馥奎가 유한량의 殞身尊君의 뜻을 기리고 있다. | |
樂軒公行蹟 (7) |
후손 澤修가 유창의 4세손 世玢의 학덕을 기록하고 있다. 자는 溫汝이고 호는 樂軒이다. 진원 현감의 임기를 마친 뒤 그곳의 鰲山 서쪽에 있는 杜洞村에 정착했다. 그는 화훼·거문고·독서로 즐거움을 삼았기 때문에 樂軒으로 호를 짓게 되었다. 자신이 본향과 떨어져 사는 연유로 자손들에게 학업을 정진할 것을 당부했고 자신도 四書·六經·≪중용혹문≫·≪대학혹문≫·≪심경≫·≪효경≫·≪근사록≫·≪주자가례≫·≪공자가어≫ 및 당송대가의 시문 등을 완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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