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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한글을 함께 기록한 광평군 유서(1754년)

송화강 2014. 3. 8. 23:25

이글을 통하여 250년전의 사회상과 먹을것이 부족했던 선조들의 간난()을 볼 수있다.

 

 복사전재 출처

http://cafe.daum.net/ahn25/JqW2/35?q=%BE%C8%BE%BE%20%B9%AE%C1%DF%20%C0%AF%BC%AD&re=1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는 글이므로 존칭을 생략함.

 

이 유서는 조선왕조 영조때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광성군(廣成君)순암공 안정복의 부친인 광평군 안 극

 

(廣平君 安 極 = 광주안씨 시조로 부터 30세,1696~1754)공이 아들과 손자들에게 유언한 내용을 기록한

 

것인데 한자로 기록한 옆에 한글 (당시에는 언문)로 기록한 것이 특이하다,

 

이 점은 한자를 잘 모르는 집안의 아녀자와 노비들도 모두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그 당시에는

 

여성과 노비의 권리가 그만큼 크지않았으므로 한글을 병기한 이유는 아마도 아직은 한자를 익히기 어려운

 

어린 손자 손녀들과 증손자 손녀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유서에서 고려하여야 할 사항중의 하나는 비록 유서깊고 뼈대있는 선비의 집안이나 대를 이은

 

빈곤함이 글중에 표현되어있다 는 것인데, 이는 직계선조이며 선조임금의 매부인 25세 광양군 안황(廣陽君

 

安 滉,)의 호성공신2등의 공적에 의한 사패지로 광주 텃골의 영장산 일대를 받았다는 주장에 의문이 있고,

 

오늘날에는 웃대선조인 19세 사간공 안 성(思簡公 安 省,1344~1421)이 사후지(死後地=선산 또는 묘역)로

 

장만하여 직계후손 들이 묻힌 영장산 묘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서의 이미지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 고도서/문중고문서/광주안씨 순암종택/209 광평군 유서

 

 

 

 확대하여 봅니다. 한글을 현대글로 해석합니다. 다만 완전한 해석은 못됩니다.

 

.........................................

 

광평군 유서

 

아이들은 보거라

 

우리 집안은 세대마다 과거와 사환(관직에 종사)으로 문호를 보전하더니 내 몸에 이르러 궁하여 한 선비(匹士)가 되어서

 

불능히 선세를 현양치 못한지라 항상 유한이 되어서 구구한 한 생각이 정성을 선조에게 다하고저 하나 정성을 다한 길이 

 

오직 제사에 있을 따름이라 내가 치산에 졸직(졸렬)하여  가업이 박락하여 봉 제사 하는 물건이 다만 광릉묘하 (사간공묘

 

아래) 약간의  밭이 있어 양식이 자(資)라하야(소출이 있으나) 도리어 집식구에 넉넉지 못하고 제수범절은 한갖 둘째일이

 

되니 그 통한함을 가히 어찌 말로 다하랴. 나의 자손중에 능히 나의 이 마음을 몸으로 받고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다시

 

현양하는 일이 있다면 모름지기 다시 말할 것이 없거니와, 만일 관환(관직을 받음)을 반드시 얻지 못하고 빈곤이 날로

 

심하여 온 즉 십여대의 신령(조상)으로 하여금 (후손에) 의탁하여 장차 돌아가실 곳이 없으면 내기 비록 죽으나 어찌

 

이 눈을 감으랴. 묘(사간공묘)아래의 밭은 아버님이 사두신 바도 아니고 또한 내가 산 것도 아니다.

 

종손이 서로 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위로 몆대의 선조님이 사두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나의 아버님께서 비록 지손(支孫=종손이 아닌 방손)으로 계자(系子)로 승계하셨으나 집이 항상 빈핍하여 능히 조상을

 

받드는 일을 잘하지 못하여 불초한 나는 더욱 할말이 없다.

 

이제보니 너(손자)의 아비가 내가 병이 중함에  마을바깥의 네두락 밭을 팔아서 장례에 대비하는 물품으로 하니

 

사람된 아들의 마음이다.  도차지두하야(땅에 머리를 두어?) 무소조수즉(손을 쓸 도리가 없은 즉?) 어찌 그 마음을

 

계획하리오. 가히 이르되 내가 비록 불행하게 된 후에도 이 논은  너(손자)의 무리가 비록 남의 고용살이를 하더라도

 

기어코 물려주어 조상이 전하여 온 물건으로서 나의 몸에 써서 나로 하여금 불효한 대로 돌아감이 없게 하라.

 

이 뒤에 혼인과 초상의 급한 변이 있더라도 가히 힘을 다하여 경영과 판비(대비)할지니, 옛적에 가난한 선비가

 

혹 관(棺)을 마련하지 못하여 어버이의 장례를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다 불효이랴.

 

그 마음의 정성치못함이 되어 이같으니라.

 

 

 

 

집이 구차하고 가난하여 조치할 바가 없은 즉 비록 발(주렴)로 싸서 장사지냄이 어찌 부끄러움이 되겠느냐.

 

다만 그 효심을 다할 따름이다. 항상 세상사람을 보니 처와 자식을 배부르고 따뜻하게하는 계책이 먼저이고

 

조상을 받드는 데는 소홀하여 선대 제사일이 되어서야 공연히 궐지(闕之=?)하고 안방에서 자며 거처하고

 

고기먹고 술을 마시니 이러한 족속은 금수(禽獸=새와 짐승)와 다름없으니 손자들아 너희들은 어찌하겠느냐.

 

사간공 묘 아래의 나무 하나 풀 한포기 흙 한줌 반 마지기가 선조님들의 땀과 노력으로 지켜 내려온 것이니 

 

너희 무리는 마땅히  받들고 잃지말아서 선대에 죄를 얻지않는 것이 지극히 옳고도 지극히 옳다.

 

이러한 도리는 너희들의 아비로 부터 교훈을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능히 알지라.

 

다만 나의 소회를 말하지 않음은, 또한 너희들은 장손이니 (내가) 질병으로 죽어가는 중이라도 힘을  강하게

 

하고 입으로 불러주는 것이니 너희가 마땅히 알 것이나, 가히 한을 가진 내가 매양 제사를 갖추지 못함으로서

 

 항상 산소로 부터 먼곳에 벌목과 숯 묻는 것(숯 만들기)과 혹 화전(火田)을 일구는 것이니 구급할 때의

 

방책으로 하였다. 이것이 비록 마지못한데서 나온 것이나  마음이 불안함을 가히 말로 못할지니라.

 

이 후에 너희의 아비가 만일 능히 가업을 요리함에 전일에 혹 성립함에 이른 직전에 지난번에 벌목한 나무와

 

일구어놓은 화전에  나무를 심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함이 지극히 옳고도 옳다.

 

 

그 외에 사랑하고 지킬 것은 웃사람을 받들고 화목한 일가를 만들어 벼슬함에 나라에 충성하고 청백함을

 

스스로 지켜서 너희 아비가 또한 능히 말하니 다시 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들은 오직 가업을 보전하여

 

여러 대의 신령으로 하여금 의탁하심이 있게함을 지극히 바라고 지극히 바라며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오늘은 어머님의 기일인데 나의 병 또한  심히 급하니 마음이 비감한지라 불러서  (유언으로) 알리노라

 

갑술(1754년)6월초 7일 병으로 인하여  조 부  수결(極)

 

집필 장손 경증(景曾) 수결.

 

시좌 장자 정복(鼎福)  수결

 

둘째아들  정록(鼎祿)  수결

 

 

..........................................

 

오호(嗚呼)라 ! 선조의 묘소를 지키며 선비의 올곧은 생애를 살아오심이 이렇듯 어려웠을 줄이야...... 

 

조선조의 첫번째 청백리인 사간공 안 성(安 省)의 후손이며 대대손손이 출사하여 사간공후 감찰공파

 

문중에서 다섯분이나 군(君)의 봉호를 받는( 24세 광계군 여경, 25세 광양군 황, 26세 광원군 응원, 

 

30세 광평군 극, 31세 광성군 정복) 영광이 있었음에도 모진 빈곤과 병고속의 생애를 사셨음이 위의

 

유언장에 절절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한 중에도 고결함과 청백함과 문행으로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또한 씨족의 역사를 밝혀온 분들입니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어리석으나 [글 따라가기] 를 해보았습니다.

 

해석이 잘못된 점은 가차없는 질타를 바랍니다 .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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