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한국이 서양문화와 접촉한 시기는 언제이며,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역사가들의 주요한 관심이 되어왔다.
그 첫째 접촉은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가능성이고,
둘째는 통일신라시대 아랍세계와의 접촉 가능성이며,
셋째는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가능성이다.
1)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
중국의 기독교 접촉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 바돌로매는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중국이 서방 기독교와 최초로 접촉한 교파는 경교였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일파는
선교의 방향을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 터키 동남부 등 동방으로 돌려 활동하였으며,
서방교회와는 다른 신학을 정립해가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하던 네스토리우스파는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도 칼리파(Khalifa)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762년에 본거지를 바그다드로 옮겨 계속 발전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당나라 시대였다.
중국에 경교의 전래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1625년‘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9년이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파사’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 칭하기도 했으며,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대진’을 넣어 대진교(大秦敎)라 불렀다.
그러다가‘광명정대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대진경교’(大秦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638년 7월에 경교(景敎)는 태종(太宗)의 조정이 공인하는 종교가 되었다.
태종은 국비로 장안의령방(長安義零坊)에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고 승려 21명을 두게 하였다.
태종은 경교를 공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며 심오한 신비성이 풍부하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이므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이 이유 외에도
‘당의 태종이 경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한(漢) 이래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룬 태종이 서쪽으로부터 확산되고 있는 아라비아의 회교국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로펜은 635년부터 641년까지 포교하는 한편, 「예수 메시아경」을 번역하였다.
650년에 즉위한 고종(高宗) 때에는 경교를 진종(眞宗)이라며 전국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고
알로펜을 높이어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았다.
이때부터 경교는 국교로 인정받았으며,
845년 무종(武宗) 때의 외래 종교 대박해 사건이 있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융성하였다.
경교가 한국에 전래 되었을 가능성은 있는가?
경교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635-845년까지 210년 동안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제국을 형성했던 시기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의 군사력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 통일신라가 친당 정책을 쓰면서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당의 영향을 깊숙이 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해상 무역이 발달해
중국,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에까지 무역을 확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경교의 한국 전래를 주창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논리,
즉 신라와 당나라간의 정치, 문화, 군사 교류, 신라와 아랍국들 사이의 무역 교류 등을 통해
경교가 한국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1917년 골든 여사는 금강산의 장안사에서 발견한‘경교모조비’와 경주 석굴암의 무인상, 십일서관음상 등의 옷 무늬와 신발과 유리 장식 등을 페르시아의 것으로 보고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1956년에는 불국사에서 석재 십자가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김양선은「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통일 신라 이후 능묘 제도의 특색이 되어 있는 호석(護石)에 부조(浮彫)된 12지상과
능묘 앞에 배치된 페르시아의 무인상 등이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교의 한국 전래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은 단지 추측일 뿐 결정적인 역사적 사료는 되지 못하며,
혹 전래가 되었다 할지라도 종교적인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 아랍문명을 통한 세계와의 첫 접촉
한국이 최초로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루브루크가 한국을 소개한 것보다 4세기나 앞선 9세기경이었다.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에 따르면
서양 문헌에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 것은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Ibn Khurdhibah, 820-912)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Book of Roads and Provinces) 에서이다.
당시 아랍은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랍과 중국 두 제국이 국경을 맞대고 접촉하고 있었고,
한국은 중국을 통해 아랍 상인 및 문화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랍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는 동·서 문명을 잇는 가교가 되었고,
자연히 한국이 이들에 의해 서방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다른 쪽에 놓여 있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러나 높은 산들이 조밀하게 간도(Kantu, 산동성)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산들은 신라(Sila)에 걸쳐 놓여 있는데, 신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를 방문한 회교도들은 이 같은 이점을 경험하고는 여기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삼, 녹용, 용설란(aloes), 장뇌(camphor), 못, 안장(saddles), 자기, 공단(satin), 계피(zimmit), 생강(galauga)을 수입했다.
쿠르드지바 이후 아랍세계의 문헌에는 신라가 자주 등장한다.
신라에 대한 소개는 10세기의 아랍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Masoudi, -965)의 세계 역사서‘황금초원과 보석광’에도 나타난다.
“바다를 따라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이란 없다.
그곳(신라국)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모로코의 알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는 전래의 지리 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 넣었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가 명기되어져 있는데,
그 지도의 후미에 신라에서는 금이 흔해서 개의 쇠사슬까지도 금으로 만든다는 기술이 곁들여져 있다.
이 지도는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3) 루브루크와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몽고가 세계 제패의 여세를 몰아 근동 중동의 회교도 국가들을 침공해 세력을 떨치면서
“서구의 기독교는 오히려 몽고와의 제협을 바라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까지 찾아 타진하게 되었다.
”십여 차례 십자군전쟁을 통해 수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눈에 띄는 결과 하나 얻지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난공불락의 중동의 회교국들이 징기스칸의 말발굽 아래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기독교는 징기스칸을 단지 한 민족의 통치자라는 차원을 넘어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은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차제에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일환으로
성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성지 순례의 자유를 획득해 준 몽고와 징기스칸에게 사절단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의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의 전권대사로
프란체스코회의 카르피니(Giovanni da Piandi Carpini, 1182-1252)가 선출되어
1246년 7월 22일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하였다.
마침 그때가 쿠유크(Kuyuk)가 정종으로 즉위할 무렵이어서 그 대관식에 참석,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고 정종의 우호적인 내용의 친서를 받고 1247년 가을에 유럽으로 귀환하였다.
1253년에는 다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루브루크(William de Ruburck)가
동료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 와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Ⅸ)의 사절들로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Sartach)이 기독교인(네스토리우스파)이란 사실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그와 협력하여 이집트를 공략할 정치적인 목적에서 파송된 인물들이었다.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사르탁을 만났으나 그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했으며
종교적인 토론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헌종의 친서를 받아 1254년 돌아오고 말았다.
루브루크는 귀환한 후 몽고에서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의 현황과 이때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 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이때 그는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으며
고려를‘카울레’(Caulej)로 표기하여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브루크가 한국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아니다.
루브루크가 13세기에 한국을 서양에 소개하기 4세기 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신라를 서양에 소개한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4) 임진왜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적으로는 자체 개혁을 목적하고,
외적으로는 선교를 통해 실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예수회(Jesuits)라는 선교단체를 세웠다.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와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에 의해
15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되었다.
예수회의 동양선교는 설립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의 직접 참여로 시작되었다.
사비에르는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 고아(Goa)에 진출했으며,
1549년 8월 15일에 토레스(Come de Torres)신부, 페르난데스(Joas Fernandes) 수사, 안지로와 함께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해 일본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1552년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불과 2년 3개월 만에 사비에르는 1천 5백 명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후대 이들은 일본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는 그 후 놀랍게 증가하여
1570년에 약 3만 명, 1579년 10만 명, 1581년 15만 명, 1587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가 이처럼 급증하게 된 것은
천주교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어,
교토와 규슈의 명문들이 기리시단으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기리시단 다이묘들의 출현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주민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기리시단의 수가 급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교세를 가진 예수회가 수난을 겪기 시작했는데,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상을 떠난 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포르투갈이라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예수회 세력의 급속한 신장은
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인 위협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 7년만에 예수회에 대한 금교령을 발표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내적불안 요인들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1592년에 시작되어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이 전쟁 중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전쟁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잡혀 간 많은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순교에 이른 사람도 있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유명한 기리시단 다이묘 중의 하나였다.
불과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고 평양까지 진출했던 고니시 부대는 조선 의병들의 저항을 받아 후퇴,
경상도 남단의 웅천(熊川)을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고니시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한 사람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웠다.
휘하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이 요청에 따라
1593년 12월 27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Foucan Eion)이 파견되어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은밀하게 천주교 신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고 1595년 초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년 동안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을 뿐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입국은“조선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방한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서양 사람으로서 더구나 크리스천이며 전도자인 그가 한반도의 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역사상 특별히 기록할 만한 가치가”있다
하겠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한국인은 약 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 가정의 노비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 멀리는 마카오, 마닐라, 인도 및 이태리에까지 끌려갔다.
1597년 6월에 일본에 상륙했던 프란시스코 카를레티(Francisco Carletti) 수사는
5명의 한국인 노예를 사서 세례를 주고 인도 고아로 데려가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그 중의 안토니오 꼬레아(Antonio Corea)는 수사와 함께 프로렌스까지 가서 공부한 후에 로마에서 살았다고 한다.
포로된 한국인 중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자가 7천여 명이나 나왔다.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에서는 2천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그
러는 중에 한문으로 된 교리서가 한글로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뒷날 포로 중의 일부가 귀국하였을 때 그 일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은밀히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던 것 같다.
일본에 체류한 한국 신자들 중에는 권(權) 빈센트같이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1605-1637년에 걸친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천주교박해 시대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이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쿠가와 궁전 안에서 궁녀로 있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고오즈시마란 조그만 섬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절명한
오타 쥴리아(Ota Julia)를 비롯하여 6명의 증거자들이 일본 천주교회사에 기록되고 있으며,
최근 일본인 성인 26인중 3인이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1595년경, 세스페데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간헐적이지만 서양인들이 국내에 입국한 일이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 朴燕),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816년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군함을 이끌고 입국한
영국 해군대령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을 들 수 있다.
(1) 박연 일행의 한국 표착
박연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는 화란 리프(Riip) 지방 사람으로
1627년 무역선 우베르케르크(Ouwerkerck)에 올라 일본으로 교역 차 항해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일행 세 사람과 함께 경주 앞바다에 표착하였다.
박연은 같은 동향 출신인 디렉 헤리스베르쓰(Direk Gijsbertz)와 암스텔담 출신 얀 피테르츠(Jean Pieterz)와 함께
물을 구하기 위해 단정(短艇)을 타고 육지에 상륙했다가 그곳 주민에 의해 사로잡혔다.
박연 일행은 경주로 압송되어 동래부사 앞에 끌려가게 되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동래부사는 이들을 나가사키로 보내기 위해 동래의 왜관(倭館)으로 보냈으나
왜관이 저들을 받지 아니하고 되돌려 보내므로 저들은 부산에 4, 5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일행은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인조 대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다시 간청했으나 왕이 이를 거절했다.
저들은 심문을 받고 얼마 후에는 군대(訓練都監)에 편입되어 전투에도 참전했다.
박연은 3인 중에서 그 용모, 지식, 인격, 기술이 출중하여 호겸과 함께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서 한·왜군의 영솔자가 되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고 두 사람은 그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전쟁에서 공을 인정받은 벨트브레는 얼마 후 조선 여인과 결혼이 허락되어 1남 1녀까지 두었다.
그가 과연 개신교도였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618년 화란은 개신교 국가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며 세계 개신교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박연 역시 독실한 개신교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김양선은 정재윤의 한거만록(閑居漫錄) 제2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벨트브레는 일개 상인이었고 전도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기독신자로서의 행위와 언사를 십분 이행하여 접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환경이 바뀌어지면 신앙에 변화가 오기 쉽다.
더구나 외국에 가서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곳에서 신앙의 절조를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벨트브레는 일평생 신앙을 지켜서 생면부지의 사람들로 그를 훌륭한 종교인으로 추존케 하였으니 그의 신앙은 실로 놀랄 만하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신교 신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정재윤이 한거만록에서 지적한바
박연이“매양 선악화복(善惡禍福)의 이치를 말하고 툭하면 하늘이 갚는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도(道) 있는 자의 유(類)하더라.”는
사실은 성해웅의 연경제전집과 탐라기년 제2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박연을 보는 주변의 인물들은 그가 하늘의 신을 믿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연은 조선에 정착, 자신처럼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이국 조선에서 보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2) 하멜 일행의 한국 표착
1653년 1월 10일 본국을 떠난 화란 상인 하멜 일행을 실은 네덜란드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Sparrow Hawk) 호는
자바의 수도 바타비아와 대만을 거쳐 일본을 향하여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월 15일 제주도 남해 앞바다 화순포에 표착하였다.
저들이 육지를 발견하고 안도감을 가지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배를 강타하면서 세 겹의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닥치고
그와 함께 배가 쪼개져 선창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익사당했다.
갑판 위에 있던 몇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 내렸고 남은 사람은 물결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탑승원 64명 중 선장 에흐베르츠(Egbertz)를 포함한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가까스로 물에서 기어올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8월 18일 하멜 일행은 현감 권극중에 의해 생포되었고,
역관을 불러 문정을 하려 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주현감은 하멜 일행이 난파된 배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건져 낼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으며,
여러 날 동안 파선된 배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건져 내게 하였다.
효종실록, 하멜의 표류기, 연경제전집에 의하면
하멜 일행이 건져 낸 물품들은 식료, 의료, 적포도주, 서적, 양기, 천리경, 조총, 망원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고,
그 양도 상당했다고 한다.
1653년 8월 21일 하멜 일행은 제주 감영에 압송되어 제주 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화란 사람으로 일본으로 가려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하고,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목사는 국왕의 지시에 따르겠다며 정확한 답을 보류했다.
하멜 표류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문정관과 역관 벨트브레가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두 달이 지난 10월 29일이었다.
박연이 화란어로 하멜 일행에게 국적과 여행 목적을 물었고,
서로 같은 화란인인 것을 확인한 하멜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연에게 자신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박연은 외국인이 내지에 들어오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사실,
일본 역시 바다 선상에서만 외국인과의 교역이 허용된다는 사실,
더구나 기독교인과는 교역조차 금하고 있어 전에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대마도로 보냈는데 다 죽였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으로 간다고 해서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자신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훈련도감에 예속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멜 일행은 비록 일본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여전했지만, 박연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4년 5월 말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을 만나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입국한 외국인을 도로 국외로 내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므로 보내주지는 못하지만
왕으로서 이들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또한 당시 상선에 승선한 대부분의 화란 사람들이 총포에 능숙한 이들이어서 전투 훈련관으로 적합하였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훈련도감 대장 이완 휘하에서 박연의 지도를 받으며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해양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박연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화란의 우수한 과학문명이 조선에 접목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항해술은 모든 과학지식의 집약을 요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있는 서양 과학에 대한 기술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생활에 잘 적응을 한 박연과는 다르게 하멜 일행은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657년 전라도 작천병영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10년의 감금생활 동안 하멜 일행은 선관을 만나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는 조선의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산사를 돌면서 수도승과 환담을 나누며 조선 종교와 문화에 대한 많은 식견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이 기록들은 후에 하멜표류기를 기술하는 데 상당히 훌륭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천병영에 유배되어 살던 10년의 대부분은“악관의 학대와 흉년과 기근이 그들을 한없이 괴롭혔으며”
이로 인한 식량부족으로 한 때는 구걸행각에 나선 일도 있었다.
”유배생활 7년 만에 33인(탈출 시도로 사망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사망한 상태임) 중 11명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흉년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문제가 극에 달하자 그들을 책임 맡은 감사는 1663년 3월 이들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행을 여수 좌수영에 12인, 순천에 5인, 그리고 남원에 5인 등 세 곳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오랫동안 조선을 떠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하멜 일행은
전라도 여수의 바닷가로 보내지자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664년부터 3년간 나무를 해다 파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이들은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탈출 준비를 하였으며,
1666년 9월 4일 여수 좌수영에 유배되어 있는 12명 중 하멜을 비롯한 5명과 다른 곳에서 방문 온 2명,
그리고 순천에서 불러온 조선인 뱃사공 등 도합 8명은 한밤을 이용해 여수를 떠나 일본 이쓰시마(五島)에 도착하였으며,
그곳 관리를 만나 자신들이 화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가사기(長崎) 화란상관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68년 7월 20일, 일행은 화란 상관의 주선으로 고국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또한 조선에 남아 있던 생존자 8명도 일본 대마도주의 요청에 따라 1668년 4월 12일 대마도로 보내어졌고,
고국 화란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약간의 풍랑을 만난 후 이들 배가 1668년 7월 20일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우리는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간구했다.”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지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14년간의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표류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하멜은 그 동안 경험한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등 조선의 물정과
조선인의 기질, 풍습, 군사, 법속, 정치, 종교, 사회관습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관한 모든 지식을 소상히 기록했다.
하멜의 표류기는 유럽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얼마 후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유포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출판 동기와는 달리 표류기는 조선선교와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선교 후보생들에게 유용한 조선입문서가 되었으며,
그리피스는 하멜의 표류기를 담아‘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32년의 귀츨라프의 서해안 항해 및 선교와 1865년의 토마스 목사의 조선선교는 모두 하멜의 표류기에 힘입은 바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박연과 하멜은 개신교도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조선과 접촉이 있었던 박연과 하멜이 개신교도였다는 점에서
조선과 개신교와의 접촉 역사는 청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의 역사보다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하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영국 해군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과 리라(Lyra) 호의 바실 홀(Basil Hall) 대령이었다.
이들은 1816년 9월 서해안을 항해하고 돌아가
바실 홀의 조선 항해기와 맥레오드(John McLeod)의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서양세계에 조선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이들은 처음으로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건네주었고,
후에 귀츨라프 일행이 서해안을 탐사할 수 있도록 서해안 해도를 작성했으며,
조선 항해기를 저술하여 조선을 서양에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동양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
영국이 1793년 매카티(Macarthey) 경을 수석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고
이어 1816년 암허스트(Amherst) 경을 수반한 사절단을 중국에 파송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과의 외교적인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풍토와 역사와 지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순조 16년인 1816년에 맥스웰을 선장으로 한 순양함 알세스트(Alceste) 호와 바실 홀을 선장으로 한 리라(Lyla) 호
두 함선을 파송해 이들이 조선의 서해안에 와서 해도를 측량하고 조선에 대한 일련의 정세를 연구하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 서해안 해도 작성의 임무를 띤 맥스웰 함장의 프리게이트 함 알세스트 호와 바실 홀의 브리그 함 리라 호는
8월 29일 위해위(威海威)를 출발하여 9월 1일 동틀 무렵 조선의 육지가 동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황해도 대청군도에서 남하하면서 처음으로 해도 작성을 착수했다.
저들이 조선인을 처음 목격한 것은 소청도 남쪽 바다 입구에 있는 소청리에서였다.
제일 남쪽 섬을 바라보는‘아름다운 만’에 닻을 내리자 얼마 안 있어 5, 6명의 주민이 작은 배 하나를 타고 왔다.
50야드 가까이에 이르자 배를 멈추었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으나
섬 주민들은 오지는 않고 호기심과 경계의 빛으로 바실 홀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보트를 타고 그들 가까이 갔으나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이 해안으로 노를 저어 어느 마을에 상륙하자 그들이 뒤따라왔다.
촌락을 이룬 그곳에 일행이 상륙하자 부녀자들이 마을을 버리고 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펄럭이는 넓은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닿는 상의와 짚신을 신었고, 중키에다 체격이 좋고 힘세게 보였다.
그들이 바실 홀 일행을 따라온 것은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조용한 마을에 외국인이 입국하자 경계의 태도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이 소청도 촌에 들어가 조선의 실정을 살펴보기를 원했으나 촌민들은 완강히 저들을 거절했다.
비록 조선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어떤 교류를 할 수는 없었지만,
바실 홀 일행은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바실 홀 일행의 눈에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은“무뚝뚝하고 쌀쌀한 표정”을 지닌,
그러면서도“놀랍게도 호기심이 없는 고만(高慢)한 태도를 지닌 족속”이었다.
처음 만난 조선 사람에게 “멸시와 오만”을 접한 바실 홀 일행이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중국 정부에는 대단한 예물을 동원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서해안을 탐험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도 조선에 전혀 통보조차 하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되고 오만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박용규는 한국기독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1816년 맥스웰과 바실 홀이 서해안을 탐사하는 동안 마량진에서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저들의 배에 올라 문정을 하였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최초로 성경이 건네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배가 마량진에 정박한 지 이틀째 되던 9월 5일 첨사 조대복이 비인현감 이승렬을 대동하고 리라 호를 재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의 상황을 바실 홀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그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a Bible)의 장정에 상당한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비록 대단히 마지못해서이지만(주저하면서)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배를 막 떠나려 할 때 다시 건네주자
이제는 아주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성경)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후 조대복과 이승렬은, 외국과의 교류를 철저하게 금하고있던 조정이
외국 함대의 국내 입항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을 저들에게 물어 관직에서 해직되었으며,
조대복이 받았던 성경을 포함한 3권의 책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다가
후에 서울로 보내져서 서울 관부나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김양선 목사는 주장한다.
이후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아쉬운 것은 바실 홀과 맥스웰의 입국이 복음 전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해안 해도 작성에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전한 성경이 영어 성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조선에 전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 성경을 통한 직접적인 역사를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선교 이전에 이 땅에 찾아왔던 평신도들의 방문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첫째는, 이 땅에 복음을 가져다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는,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셋째는, 선교사가 이르기 전에 성경과 평신도가 먼저 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저들은 선교사가 아닌 상인 또는 군인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선교하지는 못했지만,
저들의 언행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었고,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임을 나타내었다.
넷째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므로 극동에 있는 은둔의 땅 한국이 선교지로서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및 정착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상주토록 한 것은 예수회에 의해서다.
예수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프란시스 자비엘은
동방 선교에 나서서 1549년 일본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에 나섰으나 1552년 광동 앞바다의 섬에서 돌아갔다.
그 뒤 카르네이로(1568년), 발리냐니(1573년)와 40명의 선교사들, 루기에리(Michael Ruggien, 羅明堅)가 파송되었고,
루기에리의 권유로 선교 길에 오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중국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자비엘이 돌아가던 해에 출생한 같은 예수회 신부로 이태리 태생이며,
1581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후 남경(1595년)을 거쳐 1600년에는 북경에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 교회당(南堂)을 세우고 동지 카타네오, 판토쟈와 함께 열심히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603년「天主實義」등의 책을 저술하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천주교는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지식층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朱子學)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회·경제의 제반 체계가 굳어져 있었고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통하여 그 사회적 모순이 여러 곳에서 노정되고 있었던 만큼,
조선의 지식층,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를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천주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당시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남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현(昭顯)세자가 한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초기에 천주교와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볼모 생활을 할 때였다.
병자호란 후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1644년 북경으로 옮겨진 후
당시 예수회 신부로서 청(淸)나라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에 오른
아담 샬(J. Adam Shall van Bell, 渴若望)과 사귀게 되었다.
서양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는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세자를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환국할 때 선교사들은 중국인 궁녀 감독관인 환관 5명을 교인으로 구성하기까지 하였지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세자가 돌아감으로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1777년 정조(正祖) 원년에 이벽(李蘗), 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고 한강가의 산사인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토론을 하였다.
이벽은 서학에서 신앙을 얻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다른 이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쳤다.
1783년 정조 7년에 동지사 겸 시은사 황인점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이요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은 천주교의 진리를 잘 알아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일행을 따라 10월 14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1일에 북경에 당도하여
남당(南堂)을 방문하고 신부에게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귀국하기 직전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수십 종의 교리 서적과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이벽에게 교리 서적들을 전해 주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증, 중국과 조선에 있는 미신에 대한 반박,
7개 성사(聖事)에 관한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 복음 해설, 매일의 성인전, 기도서 등을 통하여
신앙에 더욱 확신을 하고 전도하였다.
이벽은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양반계층보다는 중인(中人) 계층에 먼저 전도를 시작했다.
역관인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지황, 김종교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입교했다.
이들 중인계층 역관 출신들은 전통 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이미 서학의 정신과 문명세계의 진보성을 보아 알고 있던 터였기에 이벽의 권유에 찬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계층에게 전도하려는 이벽의 시도도 계속되었다.
이가환, 이기양과 같은 학자들과 공개토론까지 벌이면서 입교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1784년 9월, 경기도 양근(양평)에 사는 권철신, 권일신에게 전도하여 그중 권일신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훈이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서
한국내에서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이벽, 권일신, 유항검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때 그들은 교황청의 허락도 없이 최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하고
이들에 의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시대(假聖職時代)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제도의 모순을 곧 깨닫고 북경 교회에 알려 지시를 받게 되었지만,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가성직제의 출현은 한국 천주교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적 성격을 이해토록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천주교회는, 초기의 학문적인‘서학’,‘ 천주학’의 단계에서 신앙적인 단계로,
초기의 기호(畿湖) 지방의 몇몇 학자들 중심의 단계에서 양반 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 계층의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천주교회의 제사 문제로 인한 수난
한국의 천주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1789, 179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신부의 파송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교회에서 오랜 동안 논란을 겪었던 제사문제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받아온 답은 조상 제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예수회의 독점적인 전교 시기에는 제사 문제가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예수회가 처음으로 현지 적응 정책을 써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서 프란시스코(방지거)회와 도미니쿠스(도밍고)회 및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여 예수회의 제사 용납 정책에 대해 교황청에 제소함으로‘典禮問題’가 시작
되어 거의 120년 간 계속되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제사 금지’로 결론짓게 되었는데,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 정부는 예수회 이외의 선교 단체들을 추방하였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윤유일이 받아온 조상 제사 금지 결론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규제하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주자학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가 조상과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위를 없애는 천주교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가정적인 효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됨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이라 할 주자학적 충(忠)을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례 문제가 한 구실이 되고 정치 역학 관계가 상승하여 몇 차례에 걸친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었다. 이 같은 박해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다.
1785년(정조 9년, 乙巳)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이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회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벽과 이승
훈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이백은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번민하다가 1786년 봄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핍박이 가라앉자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 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
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사건이 터졌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사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러던 중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는 소문을 통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도 역시 홍낙안이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는 박해라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최인길,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는데, 천주교의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후대 개신교 선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가 진행되었으므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신유박해와 조선천주교
천주교회가 형성되면서 신자들은 모두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상의한 끝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정하였다. 1789년 10월, 교회의 지도자들은 윤유일에게 동지사 이성원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주교를 만나 서울에서 교회가 조직되었음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경에 주재하는 주교 구베아(Gouvea)는 평신도가 행할 수 있는 세례성사만 인정할 뿐 성직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1793년 구베아 주교는 서울의 신도들이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북경 천주교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謀) 신부를 선정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주문모는 1794년 12월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에 서울에 숨어들어왔다. 그러나 약 6개월 후에 밀고로 인하여 관의 체포령이 내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6년 동안 용케 피해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며 지방으로 순회하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가 입국할 때 4천 명이던 교인수가 5년 후에는 만 명이 되었다.
박해가 완화되기를 기다렸으나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는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회의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발각되지 않도록 명주에 라틴어로 쓴 다음 옷 속에 꿰매 철저하게 보안장치를 한 편지는 1797년 1월 28일 동지사 일행 틈에 끼어 북경에 입국한 두 명의 조선의 천주교인을 통해 중국 주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주 신부의 편지는 포르투갈 왕이 조선 왕에게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을 대변해 줄 것과 조선 왕과 수호조약을 맺을 것, 그리고 조선의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청은 주 신부가 볼 때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 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거부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천주교 전래의 자유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가 이와 같이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주신부의 그와 같은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사건은 1791년에 있었던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주문모 신부는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귀국하려고 가다가 많은 교인들이 자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되돌아와 자수하고, 1801년 음력 4월 19일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위와 같이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고 100여 년 간 조선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순교적 신앙으로 일관했다.
신유박해와 관련, 주목되는 점은‘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다.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의 은거지에서 비단에 글을 써서 북경에 보내려 하다가 중간에서 발각되었다. 1만 3천여 자나 되는 이 글에는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 등 순교자들의 사적,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과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나라와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민족적 주체성 사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서 신앙 외적인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일로 정부는 더욱 천주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이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는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이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조상숭배 문제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토착화 선교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까지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는 이유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약 2세기 간이나 엄격히 금지되어 오던 동양제례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문제화 된 것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이 국민의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당황한 교회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이 아
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가적 예식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토착화 정책을 선교의 기본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던 교황 비오11세는 1935년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만주 주교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례시 사자(死者)에 대한 사회적 경의 표시로서의 절도 허용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군국주의의 일본정부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였다. 이에 교회당국은 신사참배의 의의와 성격에 대해 정부에 질의를 하였고, 정부는 이 의식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교황청은 정부의 해명을 근거로 하여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하면서 선교사들은 조국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사랑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하며 신자들에게 일반 국민들에 못지않은 애국심을 갖도록 고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의 주장대로라면, 그 직무에 있어서 무흠한 교황과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가 어떻게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이같이 번복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그 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조상제사나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일로 인해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아니라 교회의 잘못된 결정에 의
해 어이없이 희생되어진 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만 보아도 천주교가 때를 따라 본색을 달리하는 단체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박연(벨트브레), 하멜, 영국 해군대령 맥스웰과 홀이 상업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면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Karl August Friedrich Gutzlaff, 1803-1851)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 2차 대각성 운동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중엽이 되었을 때, 세계는 근대화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은둔의 나라로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조선에 대한 관심은 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제국주의 정책의 붐
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유럽과 북미의 강대국들도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즉 선교와 상업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극히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불가분의 관계처럼 병행되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선교를 추진하고 타진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국의 힘을 의지하여 선교사역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한 영국선교나 그 이전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남미 선교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다행히 한국선교는 비교적 순수한 목적으로 복음이 전래된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의 내한
① 귀츨라프의 선교준비
개신교의 동양선교는 18세기 말에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영국인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의 인도선교(1793년)를 비롯하여,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의 중국선교(1807년), 미국인 저드슨(Adoniram Judson)의 버마선교(1812년)가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어서 스코틀랜드 출
신의 밀른(William Milne, 米燐)이 1813년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영국 회중교회의 중국선교사로서 매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麥都思)가 같은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17년에 말래카에 도착, 모리슨과 밀른을 도와 출판선교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의사이며,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꿈에 그리던 경건주의의 중심지인 할레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 특권을 얻는 귀츨라프는 학업을 마친 후 베를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the Missionary Institute)에서 국비로 선교사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여섯 개 언어를 동시에 공부했다. 이와 같은 훈련 과정을 통해 그는 학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장차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충실히 갖춘 뜨거운 신앙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영국 여행 중에 영국 선교사로서 중국 선교의 선구자였던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 중국선교 보고를 듣게 된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1827년 1월 네덜란드선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고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인 동남아의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했다. 1828년 8월 23일 시암, 방콕으로 선교의 거점을 옮긴 후 그의 선교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귀츨라프와 그의 아내는 시암어로 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Cochin-Chinese 사전을 편찬하고 신약성경을 다섯 개의 방언으로 번역하였고, 난파한 일본 선박의 한 선원과 친숙해져, 그와 협력해서 1838년에는 일본어로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할 정도로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827년부터 네덜란드선교회와의 관계를 끊은 귀츨라프는 영국 회중교회 선교사인 월터 매드허스트의 제안에 따라 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시도해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고 4년 뒤인 1831년에 원래 자신이 바라던 선교지인 중국으로 옮겨 갔다.
1831년 그는 요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모리슨과 합류하였다. 귀츨라프는 그
가 마카오에 도착했던 1831년 6월에 중국 동해안과 만주를 거쳐 오는 약 6개월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이 선교여행에서의 성과 때문이었다.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② 귀츨라프의 내한
1831년 선교여행 이후에 한국 선교를 모색하며 본격적인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을 때, 마침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까지 교역을 확대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조선, 일본, 오키나와, 대만까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1천 톤급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무역선을 이끌고 항해할 때 그 배에‘통역관’으로 동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로드 암허스트 호의 선장 휴 린세이(Hugh H. Lindsay)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실한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귀츨라프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귀츨라프에게 통역, 선의(船醫), 선목(船牧)을 제의해 이 역사적인 한국 선교여행이 상업적인 목적을 띤 상선을 타고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귀츨라프는“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서구에서 온 첫 개신교 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록 그가 통역관으로 승선하긴 했으나 그의 입국 목적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와 백령군도의 어느 한 섬에 정박하였고, 지방 관헌을 통하여 정부 당국과 접촉을 시도하였다고 하나, 그가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역사는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만 1832년 7월 17일, 충남 장항 앞 창선도에 도착한 이후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어 그의 활동을 잠시 엿볼 수 있을 뿐이며, 이 일에 비추어 황해도에서도 이와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 외에는 별로 큰 진전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7월 17일, 강한 바람에 밀려 한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섭리로 중국 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많은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셨으며, 오! 그로 인해 우리는 진실로 감사드린다.”
“7월 17일, 고깃배를 타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두 어부를
만났고, 그 중 한 노인에게 성경과 사자표 단추를 주었더니 매
우 좋아하였다.”
주민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복음서를 주려고 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이 책을 받고는“불가”(不可, pulga)라고 소리치며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 말을“불질러라”(fire), “그것을 불태워버려라”(burn it)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일기에서 밝힌 대로 그곳에서는 “직접 복음서를 주는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하지만 귀츨라
프는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한국에 대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외국인들에 대해 무조건 폐쇄적이고 닫혀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귀츨라프는 비록 한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적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복음서 선물에 대해 보답할 수 없어서 그들은 대단히 감사하며 우리에게 잎담배 몇 잎을 주었는데, 우리는 겸손하게 그것들을 받았다. 그 후 어디서든지 조선인을 혼자서 만나면 이 어부들처럼 인정에 넘쳤으며 은혜를 베풀었다.”
장산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7월 23일에 안면도 근해에 이르러 안개가 짙게 깔린 가운데 한 섬에 정박했다. 그날 어부 몇 사람이 와서 귀츨라프 일행을 초청, 소금에 절인 마른 물고기와 신 액체(막걸리)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7월 24일 사람들이 갑판에 올라와 문안하며 현재 배가 정박한 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강경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하고 또 고관을 만나 무역 상담을 하며,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7월 25일, 한국 관원의 요청으로 고대도 안항으로 옮겨 정박하였으며, 섬 사람들은 신기한 서양 배와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고관과 만난 일행은 왕에게 헌상할 서신과 선물 준비를 서둘렀다. 성경도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능한 곧 왕에게 서신과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을 포장하는 데 한나절을 넘게 시간을 보냈다. 린세이 선장은 내가 갖고 있는 성경 한 질과 전도문서 전부를 함께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다.…두 교섭위원인 텡노와 양치를 대동하고 우리는 선물을 갖고 출발했다. 그 선물은 유리그릇, 옥양목, 낙타모직물,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인데 붉은 비단으로 싼 것이다.”
한양에서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정부 관리의 감시가 없는 해안의 해변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온 서적, 의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를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를 자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백낙준 박사가 지적했고 후에 제임스 그레이슨(James Huntly Grayson)이 한국의 초기 불교와 기독교(Early Buddhism and Christianity in Korea)에서 진술한대로, 이 첫 개신교 선교사는 한국의 천주교와 달리 처음부터 복음을 공유하는 일, 곧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③ 귀츨라프의 성경 반포
그의 일기에는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염원이 군데군데 짙게 나타나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건네주기를 원했고, 선물과 함께 성경을 동봉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츨라프 일행은 7월 30일,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포도 재배법과 포도에서 미주(美酒)를 얻는 방법과 자신들이 가지고 온 감자 씨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파종법과 재배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외국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었다며 반대하던 주민들도 새로운 농산물로 재배 농업의 혁신을 이루어야 이윤을 얻을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말없이 승낙했다.
귀츨라프 일행은 이들 중 몇이라도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를 희망하며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고대도에 암허스트 호가 도착하자 마량진에서 관리들이 입국 목적과 배를 시찰하기 위해 귀츨라프가 탄 배에 승선했다가 그만 일기불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배에 올라온 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적어 주고 그 옆에 한글로 토를 달게 하여 주기도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가 번역한 주기도문 기록은 찾을 길이 없지만, 이것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가장 훌륭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귀츨라프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경과 육신의 양식인 감자까지 주고 간 고마운 선교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김인수는 말한다.
1832년 8월 7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특사가 내려왔는데, 그는 조선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인과 통상이나 교역을 할 수 없으니, 즉시 물러가라고 엄하게 말하였다. 또한 선장이 국왕에게 보낸 선물도 성경과 함께 되돌려 보내었다.
그러나 실상은 지방 관리가 통상과 선교 사업을 요청하는 귀츨라프 일행의 청원서와 선물을 아예 중앙정부에 전달도 하지 않고 되돌려 준 것이었다. 린세이와 귀츨라프 일행은 그것들을 되돌려 받기를 거부했다.
왜 한국 지방 관리들이 선물과 서신을 한양의 국왕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6년 전 첨사가 바실 홀과 맥스웰 대령과 접촉한 뒤 불이익을 당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던 지방 관리들에게는 또다시 외국인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선물과 서신을 조정에 전달하는 것이 큰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8월 11일 어렵게 조선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이들은 영국 선박이 이곳에 오면 양식을 공급해 줄 것과 서해안에 배가 난파당하면 북경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고 청원했고, 관리는 두 가지 모두 동의했다.
귀츨라프는 더 이상 그곳에 체류하며 선교를 강행할 수 없어 훗날을 기약하며“아주 작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신앙”을 심어두고, 정들었던 주민들과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이 되어 거둘 때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고대도를 떠날 수 있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안에 그들에게 은혜가 임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고대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교리를 전파함으로 그 날을 앞당기려고 매우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고대도의 관리들과 많은 서민들이 성경을 받았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미약한 시작일지라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더 좋은 때가 한국에 임할 것임을 희망하자.”라고 회고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비록 자신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백성들에게 성경과 근대 농업기술,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며칠 후 제주도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을 선교 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귀츨라프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응답되었다. 미개한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가려진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한국선교를 타진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이 나라의 작디작은 섬 고대도에 뿌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 1882년 그리피스가 그의 저서‘조선: 은둔의 나라’(Korea: The Hermit Nation)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록 지금은 미개한 민족이지만, 장차 동방의 복음의 빛이 되어 동방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 소원은 머지않아 역사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1834년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후 귀츨라프는 중국주재 영국 대사관의 통역 겸 서기로 임명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책을 갖고 있었다. 중국인, 중국 역사, 언어,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귀츨라프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 동안 1842년 난징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44년 그는 본국 전도사 양성소를 창립해 48명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기도 했고, 1849년에는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통해 중국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그는 1834년 『중국사개관』, 『칼 귀츨라프 항해기』를 저술하고, 1838년에는 중국
개항을, 1833-1837년에는『이스턴 엔 웨스턴 이그재미너』(The Eastern and Western Examiner)지를 간행했으며, 그 외에도 정기 간행물『차이니스 리파지토리』(Chinese Repository), 중국어 월간지 등을 간행하고 수많은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1851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극동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귀츨라프는 많은 저술과 발자취를 남겨 극동 선교 역사에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고난과 개척의 25년간의 선교사역을 마감했다.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①
귀츨라프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 34년 후인 1866년,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崔蘭軒) 선교사였다.
그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New College, University of London)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철저한 신앙과 선교의 사명감으로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863년 6월 4일이었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던 해에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 하겠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 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 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소속 선교사로서 서해안으로 떠났다.
1865년 9월 13일 항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런던선교회로부터 그의 새 임지로 북경이 정해졌음을 통고받았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런던선교회 총무 티드맨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한국 선교 보고서를 보냈다.
“우리는 한 작은 중국 목선을 타고 9월 4일 지푸를 떠났고 한국 해안에 도착한 날은 1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안에서 2개월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 나는 한국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그 불쌍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가장 귀중한 진리 중 얼마를 가르치기에 넉넉한 한국말을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백성으로 말하면 대체로 외국인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나, 나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책 한 두 권씩을 받도록 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책을 받을 때에는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벌금형이나 투옥될 것을 각오하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책을 얼마나 읽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었다. 이 접촉을 통해 그는 지난해 한국에서 전했던 성경이 평양에까지 흘러들어 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인은 한국에 대한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한국에 달려가려고 하였다.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의 원정이 논의되었을 때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로즈 제독이 거느린 프랑스 함대가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었으므로 그의 한국행은 무기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천진을 거쳐 지푸에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실망이 컸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배를 타고 한국 선교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②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는 미국 프레스톤 소유로서, 중무장한 일종의 상선이었다.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이 영국의 메도우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트기 위해 선적한 면포, 유리그릇, 철판,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Wilson) 그리고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 19명의 동양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1866년 8월 19일 셔먼호가 송산리 앞바다를 떠나 황주 송림리 연봉포로 올라오자 정부는 급보를 전해 듣고“요새 이상한 배가 우리 바다에”많이 나타나니“행동이 수상한 무리를 살피고 국방을 엄히 하라”는 특명을 하달했다. 황주 목사의 입국 불가 전갈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밤 토마스와 그의 일행을 태운 셔먼호는 드디어 대동강 입구, 용강군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를 거쳐, 25일 평양을 향해 강 상류로 계속하여 거슬러 올라와 평양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草里坊一里新場浦)에 닻을 내렸다.
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감사 박규수는 급히 중군 이현익, 군관 방익진, 평양부 서윤, 신태정을 파송해 상선의 입국경위와 정황을 알아보도록 보냈다. 토마스는 입국의 목적이 통상과 선교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들은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교(耶蘇敎) 신자들이라고 전해 주었다. 왕조실록에 있는 대로 토마스는 문정관에게“백서에
덕이 되고 인성(人性)에 선이 되는 진도(眞道)가 야소교(耶蘇敎)에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문정관은 그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탐문을 통해 한국 측은 이 배가 산동 반도를 떠나 백령도를 거쳐 평양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통상 및 야소교 전파를 목적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가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한국 관민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처음에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친절을 보이던 한국 측도,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위협을 느껴 병졸들과 성민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면서 셔먼호가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상류에서 병졸들은 작은 배들을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거기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자 이 불타는 작은 배들이 떠내려가 셔먼호에 닿아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배가 불타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은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병졸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가 되돌아갈 때 이것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安州)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레널즈(William Reynolds)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장사포에서 성서를 받은 소년 홍신길, 석정호에서 성서를 받은 김영섭과 김종권, 만경대에서 성서를 받은 최치량 등도 후에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의 창설자들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칼을 맞고 개신교 목사로서 이 땅에 최초의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 성민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는“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터툴리안의 말이 한국교회사에도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5월 8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토마스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대동강의 쑥섬에 모여 기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33년 9월 14일에는 기념 예배당이 준공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와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신앙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과 선교회들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비록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선교에 대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이었다. 윌리엄슨은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일찍이 런던선교회 소속선교사로서 1855년에 중국에 와서 그리피스 존(Griffis John) 등과 같이 상해에서 선교하던 중, 토마스 목사의 생사도 알아 볼 겸 한국 사정을 알려고 1867년 만주에 내왕하는 한인들과 두 차례 접촉하였다. 윌리엄슨은 4월에 요동 지방의 잉체코에서 한국인 상인들
과 여행자들에게 진리의 말씀과 서적들을 주면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달 19일에는 천장대에서 귀국 도상의 한국 동지사 일행을 만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만다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지사는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런던선교회도 방문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 사람이 로버트 토마스를 만났었다고 하는 사실을 1866년 4월 4일 날짜의 토마스의 서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지사 일행이 방금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북경에서 다른 외국인들보다 훨씬 이들과 친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조선에 관한 지식 그리고 조선말을 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저들이 묵고 있는 공적인 숙소에 아주 쉽게, 환영을 받으면서 왕래할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윌리엄슨은 상당한 정도의 한국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토마스를 통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직접 만난 두 사람의 조선인 천주교인을 통해 얻은 지식, 그 외에도 고려문 전도시에 만났던 많은 조선인들을 통해 그는“분명히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한국인의 지성과 성품과 윤리적 생활이 우수한 점, 그리고 명민한 판단과 담 큰 결단력을 지적하고는, 지력(地歷)과 지하자원에까지 언급하고 수운(水運)의 편리함도 서술한 후“이 나라에 없는 것은 다만 서양의 종교와 그 문명의 박차(迫車)와 지도(指導)”라고 갈파하였다.
1866년 토마스가 순교하기 1년 전부터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는 1867년에도 그곳의 한국 상인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 토마스의 죽음이 한국 선교열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복음은 이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 윌리엄슨은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섰는데, 이때는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중국인과 물건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윌리엄슨은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고 그 일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도,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 대국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이 문호를 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대영제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선도하여 한국같이 그 나라들에 반대하여 어리석고도 무식하게 폐쇄하는 나라들을 개방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나는 믿는다.”고 하였다.
윌리엄슨은 누구 못지않은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지만, 선교방법론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한국의 개방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개방하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일종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중국으로 박해를 피해갔던 리델 신부가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한국 선교의 문을 열려고 한 것이나, 토마스가 불란서 함대의 통역으로 국내에 입국하려고 한 이면에서 우리는 당시 영국과 불란서 등 유럽 강대국 출신 선
교사들의 내면에 복음의 열정이 제국주의 패권의식으로 채색되어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범위로 확대된 서구형의 기독교회는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한 교파형의 미국 기독교회에 비해서 이러한 과오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귀츨라프, 토마스, 윌리엄슨에게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불타는 선교의 열정, 복음의 열정을 발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의식세계가 역시 당시 강대국 백성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패권의식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복음 본래의 순수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이들은 후대 한국선교를 위해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토마스나 윌리엄슨같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한국 선교를 타진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와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 선교사였다. 이들은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일찍이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자신의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한국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지적할 만큼 존 로스는 한국개신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스(羅約翰)는 제임스 그레이슨이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개신교 선교사였다.
① 존 로스의 한국 선교 준비
1872년 존 로스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달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결코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로스는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 선뜻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로스는 1881년 재혼할 때까지 7, 8년을 여동생 캐더린의 도움 속에 홀로 지내며 한국 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수 있었다.
로스는 아내와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1873년 가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산동 지역 특히 서간 지역으로 1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만주 우장을 떠난 존 로스는 봉천 홍경을 거쳐서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갔다 거기서 우연히 한 한인촌을 발견했다. 이미 윌리엄슨에게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공을 찾았지만 나서는 뱃사공이 없어 배라도 빌려 비밀리에 도강하려고 했으나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 하면 처형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 선교사를 태워다 줄 사공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포기하고‘개국(開國)의 날’이 속히 이르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 사람의 한인과 친하게 되어 자기가 갖고 있었던 한문 성서 몇 권을 그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배포한 성경을 읽고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로스는 1873년 가을, 만주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했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한국어 선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중국인 여사(旅舍)에 짐을 풀고 매일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만났으나 별 소득이 없이 영구로 돌아갔다.
1874년 4월 말에서 5월 초 로스는 자선 사업가 아딩톤(R. Arthington)의 재정 후원으로 서기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에 가서 자신의 어학 선생을 찾기 시작했다. 서기를 통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의주 출신 중인 이응찬(李應贊)이었다.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갑자기 남서풍을 만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물에서 나왔으나 물건은 찾을 길 없게 되었고, 갑자기 무일푼의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1890년 로스는 이응찬을 만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술회한다.
“일을 하자니 힘이 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다. 이러한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우연히 한국말 선생을 구하기 위하여 한국 사람들 사이에 파견된 나의 서기와 만나게 되었다. 하루 저녁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나를 만나자 그의 친구들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에 곧 나의 선생이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 앞에서나 모르는 척 해달라고 신신부탁한 다음에 뛰어나가서 친구들이 여관에 채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따라갔다.”
이응찬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순간에 로스 일행을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로스의 사역을 지원한 것이다. 로스는 이때가 1874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래 한학에 뛰어난 이응찬의 지도를 받으면서 로스의 어학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응찬의 어학 지도로 로스는 1877년 한국어 교본『한영문전입문』(韓英文典入門, A Corean-English Primer)을 저술하였으며, 1879년에는『한국, 그 역사, 생활 습관』(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 1875년에는『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도 출판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글에 대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는 표음문자인데다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쉽게 또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②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한글 성경 번역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
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로스는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해서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였다.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해 로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맥킨타이어는 네 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같은 의주의 청년인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 장사를 하기 위해서 영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서상륜은 그곳에서 심한 열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스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즉시 서상륜을 그곳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퇴원을 한 후 같은 해인 1879년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4년 후 1883
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80년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는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최근에 한국인들을 위한 저녁 집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우리 번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관하는데 자기네들 방에서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다. 나도 늘 참석하지만 듣기만 한다. 나는 한국어를 단지 번역 수단으로만 이용해서 문자로만 알았지 번역인들과 대화할 땐 중국어를 썼다. 그러나 이처럼 소외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적어도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결심이다. <지금은> 이 일에 제외되어 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집회를 내 자신이 인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까지 열두 달 동안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 초기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하겠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9년 존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내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로스는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을 그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렸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해외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 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로스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번역에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English Revised Version)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사용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한 데 이어서 1883년에는 재 교정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합본이 3,000권, 재 교정된 요한복음이 5,000권 발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서를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정식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1) 권서인들의 활동
외국의 선교 과정을 보면 선교사가 피선교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 글과 말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선교 개시 이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나라 성경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복음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청년들이 외국에
가서 복음을 받고 선교사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외국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한국에 반입되었으며, 선교 이전에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먼저 세워지는, 기독교 역사상에 보기 드문 선례를 갖고 있다.
귀하게 만들어진 우리말 성경은 권서사업을 통해 한국에 반입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성서공회의 권서사업(성경 반포)의 목적은 사람에게 단순히 성경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여 성경의 지식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용한 부속기관은 성경 보급소, 권서인, 성경 교사 등이었다. 성경 보급소는 성경의 보관 창고, 판매 서점 및 설치된 지방의 전도 중심지 역할을 했다. 권서인(매서인)은 성경 반포의 주역이자, 전도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전도의 선구자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경 교사 제도는 채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① 한문서적의 도입
1879년 말, 2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가 의주에 거하게 되자, 맥킨타이어는 기독교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굶주린 상태를 외면할 수 없어 서적 운반을 자청하는 한 한국상인을 통해 과학서적을 포함한 한문 성경과 전도책자 한 꾸러미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짐은 국경에서 압수되었고, 편지가 개봉되어 의주의 백홍준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백홍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신앙고백을 맥킨타이어에게 하였다.
이 최초의 박해 사건으로 인해 그 후 2년간 수세 청원자가 없었지만,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초기 개종자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져 갔으며, 1880년에는 30여 명이, 이듬해에는 1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우장의 맥킨타이어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반에 참석, 일주일까지 머물다가 돌아갔다.
② 김청송의 서간도 한인촌 전도
1882년 3월, 로스는 일단 한글성경의 반포가 가능한 만주 한인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김청송을‘최로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겸 최초의 권서인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즙안현 이양자를 중심으로 수천 권의 복음서와 소책자를 팔았다. 그의 전도로 많은 세례 지원자가 한인 계곡에 생기게 되었다.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 김청송은 심양(瀋陽: 봉천)으로 돌아와 로스 목사에게 즙안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즙안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했다. 1884년 여름 어느 날, 김청송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은혜를 받은 청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봉천까지 떼를 지어 왔다. 이들 중의 더러는
본국에서 임오군란 때 변경으로 좌천된 고급 군인들이 즙안현으로 망명해 온 이들이었다. 그해 가을에 로스 목사는 웹스터(Webster) 목사와 함께 즙안에 가서 75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음해 다시 25인에게 세례를 주어 100여 명의 세례 교인이 생긴 큰 교회로 발전되었다.
③ 미 제본(未製本) 복음서의 밀반입
만주에서는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당시에 조선은 외국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는지라, 어떻게 이 신간된 복음을 조선에 수입할까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의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 번역이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글)성경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있었고, 또한 백홍준 등의 전도 활동이 잘 수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종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무보수로 성경을 전달하는 일을 자청하였고, 별 사고 없이 수백 권의 복음서가 의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로스로부터 몇 십 권의 복음서와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던 한 개종자가 사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경 반입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가지 묘안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밀반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이 ‘편견과 두려움이 세워 놓은 장벽’을 넘어, 창문 창호지로 장식됨으로써 집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읽히게 되었는데, 성경 종이가 한지였기에 구멍 난 곳의 문종이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 복음서 낱장은 공허한 조선인의 가슴에 풀칠되어 붙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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