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江陵刘氏

판서공(判書公)|

송화강 2012. 10. 30. 23:20

강릉유씨(江陵劉氏)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 劉治(유치)


공의 휘는 治(치: 致라고도 하였음)요, 호는 靑遊(청유)이신데 강원도 강릉부 우계현에서 天鳳(천봉)의 4남으로 출생하시었다.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이신 죽간공(竹諫公) (유전)께서 공의 11대조이시고 강릉유씨 시조이신 承備(승비)께서는 공의 증조부이시며 고려조에서 봉익대부개성윤상호군(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을 지내시고 조선에서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助功臣)이신 휘 松栢(송백)께서는 공의 조부이시고 고려에서 안악군사(安岳郡事)를 지내시고 조선에서 증충근익대수의협찬보조공신(贈忠勤翊戴守義協贊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補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령경연정판병조사(議政府右議政領經筵判兵曹事)를 지내신 휘 天鳳(천봉)께서는 공의 부친이시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시고 10세 때부터 경사(經史)를 능히 통달하시니 장형(長兄)인 문희공(文僖公)께서 사랑하여 가르치시되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동생이다" 라고 항상 칭찬하셨다.


성장해서 문희공 장형을 따라 정포은(鄭圃隱) 선생님을 찾아가니 선생께서 말씀하시되 "그 기상(氣象)이 훌륭하며 재능이 뛰어남을 보시고 과거(科擧)공부를 하라."고 권하니 공이 사양(辭讓)하되 "근세(近世)에 선비들의 풍조(風潮)가 퇴폐(頹廢)해저서 대관의 자제들이 실지(實地)를 힘쓰지 아니하고 외화(外畵)만을 숭상(崇尙)하여 시(詩) 한수 지어 읊은 것으로 젊어서 이름내는 빠른 길을 택함으로서, 요새 홍분방(紅粉榜:계집의 분단장)처럼 겉치장만 하는 방목(榜目)이라는 비웃음을 받으니 이 어찌 선비들의 수치(羞恥)가 아니겠습니까!


선비가 모름지기 경학(經學)에만 힘쓴다면 과거(科擧)는 저절로 그 가운데 있는 법이라 끝을 취하고 근본(根本)을 버릴 것이 아니오니 원컨데 선인을 배우는 근기(根基)가 무엇을 먼저 해야 된다는 것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선생이 크게 기특히 여기시고 이에 소학(小學)의 쇄소응대(灑掃應對)하는 절차와 나아가서는 대학(大學)의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道)를 가르치시니 공이 차분한 마음으로 강구(講究)하여 그 요령을 얻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큰 선비의 지취(旨趣)가 있었으며 20여세에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집에 장가 드시니, 호 陽村(양촌) 자 權近(권근)과 호 梅軒(매헌) 자 權遇(권우:두분 다 시인) 이두분과의 인척관계가 되었음으로 강론(講論)하는 법이 치심수신(治心修身)하는 도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또 변계량(卞季良) 호 春亭(춘정), 변중량(卞仲良) 호 春堂(춘당) 형제와 더불어 옳은 친구를 삼았으므로 30세안에 시(詩)에 대한 조예(造詣)가 놓아졌다.


세상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칭찬하기를 "유씨(劉氏)집안 형제들은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서로 비슷하다." 하였다. 그러나 위로 삼형제는 등과(登科)하여 국가에 공헌(貢獻)하고 또한 가문(家門)을 빛내고 있으나 막내아들만 벼슬에 오르지 않는 것을 부친께서 매우 한탄(恨歎)하시니 공이 할수 없이 뜻을 굽혀 부친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려고 과거에 응했던 것이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그리하여 곡강(曲江:경북 영일군 흥해읍의 옛이름)에서 잔치할 제 목은(牧隱) 李穡(이색), 하정(夏亭) 柳寬(유관), 기우(騎牛) 李行(이행) 세분들이 찾아와서 축하하되 "그대 형제들은 그 누구라도 당할 수 없도다. 사람수로는 순씨(荀氏)의 팔형제만 못하지만 부귀로는 석분(石奮)의 만석군(萬石君)에 비하리요! 이제 자랑할만한 집은 유씨가문(劉氏家門) 뿐이다." 라고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서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공은 출세할 뜻이 없어서 십년간을 숨어 살면서 불사이성(不事二姓)의 의리를 지켰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여 어진 인재(人材)를 구하는 데에 온갖 힘을 다하였으며 임이 사귀던 제현(諸賢)들이 모두 조정(朝廷)에 올라 좌우(左右)로 들어 앉아서 호소(呼訴)하고 끌어 당기면서 공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공의 큰 형(劉敞)이 태조의 예빙(禮聘)에 감격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도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으며 부(父) 조(祖) 이상(以上)이 증직(贈職)을 받으니 공 또한 의리상(義理上) 사양할 수 없어 벼슬에 나아갔다.


태조(太祖)께서는 공을 정헌대부병조판서(正憲大夫兵曹判書) 예문관대제학(禮文館大提學)의 직첩(職牒)을 내리시니 사양하며 받으셨다. 그후 1393년에 정구(鄭矩)의 농간으로 공의 선산(先山)인 양주군(楊州郡) 동구용산(東九龍山)에 계시는 부친 天鳳(천봉) 산소와 백형(伯兄) 사후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정한 유댁(幽宅)을 태조 이성계에게 능지(陵地)로 채정(採定)하여 부당히 빼앗기자 이 일을 분히 여겨 벼슬도 버리시고, 1401년에 청유작(靑遊作) 삭발도진세존염표장부(削髮逃塵世存髥表丈夫: 머리 깎고 진세를 피히여 장삼을 입었으나 수염을 둔 것은 장부의 마음을 표시함이라.) 청류작 오행시를 남기시고 태종(太宗)을 피하여 북청(北靑)으로 가서 은신하셨다.


공이 북청으로 가신 까닭은 옛 친구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芝蘭)과는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사이였으므로 이지란을 찾아서 북청으로 은거하기 위하여 떠나셨던 것이다.


이지란을 소개하면 이공(李公)은 1331년 충혜왕(忠惠王) 1년 출생 본성(本姓)은 동씨(氏)였는데 태조가 성을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했다. 자는 식형(式馨) 익호는 양렬(襄烈) 원(元)나라 말기에 그 일당을 이끌고 투항(投降)하여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서 공양왕 4년에 지문하부사판도평의사사(知門下府事判都評議使司)를 지내고 이성계를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左命功臣)이 되어 명(明)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청해백(淸海伯)에 피봉(皮封)되었다.


공이 가족을 이끌고 북청에 와서 마을터를 선택한 것이 별안대(別棧臺)였다. 그러나 그 지방이 본래에 숙신(肅愼)의 옛 서울이요, 말갈(靺鞨)의 고을이라서 되놈의 풍속(風俗) 그대로였다. 지방민들이 오로지 활쏘기 말달리기만 숭상할 뿐 예의(禮儀)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교육과 혼상(婚喪)에 법도와 예의가 없었다.


공께서는 이것을 바로잡고 싶으나 고을 설립(設立)도 미비(未備)하고 관(館), 장(場) 학교도 없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이 드디어 개탄한 나머지 이웃에 사는 청해군(淸海君) 이지란과 상의하되 "이곳 국민들이 짐승처럼 되어 있는 것을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청해군이 대답하기를 "나는 무인(武人)이라 병법(兵法)만 알지 학문에는 소범하오니 예절을 가르치는 방법은 공이 책임(責任)지소서" 하였다. 공이 드디어 마을 늙은이들과 상의하여 서재(書齋)를 건립하고 수제 십여인(十余人)을 구하여 가르쳤다. 그로 인하여 배워가는 길이 밝아지고 점점 학문을 읽혀가니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불교(佛敎)의 예를 쓰지 않고 혼인에도 납폐(納弊)의 예를 행하니 이웃 고을에서도 또한 많은 사람이 이를 본받았다. 북쪽지방에 문학과 예절이 있는 것은 대개 공으로부터 시초가 된 것이다.


공이 1422년 8월9일에 서거하시니 세종4년(世宗四年)이었다. 묘소는 북청부남이십리(北靑府南二十里) 량가사(良可社) 별안대(別安臺) 금동곡(金童谷) 해좌원(亥坐原)인데 배위(配位)이신 정경부인안동권씨(貞敬夫人安東權氏)는 진사(進士) 윤보(允保)의 따님이신데 공과 같이 합장했다. 슬하(膝下)에 6남을 두셨으니 장남은 仁夫(인부)인데 삼척진수군첨절제사(三陟鎭水軍僉節制使)요, 차남은 仁秀(인수)인데 성균관진사내선전관승점마어사(成均進士內宣傳官升點馬御使)요, 삼남에 仁德(인덕)은 가선대부예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禮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總官)이요, 사남에 仁奉(인봉)은 충의교위좌군사직(忠毅校尉左軍司直)이요, 오남에 仁智(인지)인데 진사호조정랑(進士戶曹正郞)이요 육남에 仁好(인호)는 의장고사직(義長庫司直)이시다.


공의 강직(剛直)한 충절(忠節)과 예의 도덕을 숭모하여 1619년 봄에 공의 묘하(墓下)에 사우(祠宇)를 짓고 안덕사(安德祠)로 명명하여 춘추로 정일(丁日)을 택하여 그곳 유림(儒林)들이 향사(享祀)하여 왔으며 충북 단양 영춘()에도 유림들이 사우를 세워 용계사(龍溪祠)라고 이름짓고 매년 춘추로 정일(丁日)을 받아서 향사하여 왔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으로 훼철(毁撤)당하고 다시 복원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북한 땅에, 일부는 우리 남한에 빈터만 남아있어 궐향(闕享)하고 있으니 매우 슬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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