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씨(江陵劉氏) 유래
漢太祖(한태조) 高皇帝 劉邦(고황제 유방)
유(劉)씨는 중국(中國) 고대(古代) 도당(陶唐)시대에 루(累)의 이름을 가진 선조가 유(劉)의 땅을 봉강(封彊 : 제후에게 봉하여준 땅) 받아 성(姓)을 유(劉)씨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내려오다가 초한(楚,漢)시대에 와서 유방(劉邦 : 한나라의 고황제)선조가 중원 천하를 통일하고 한제국(漢帝國)을 세우시고 황제의 위에 오르시니 이분이 한태조 고황제이시며 유(劉)씨의 시조이다.
역대 황제께서 찬란한 한민족(漢民族)의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후한(後漢-삼국지)의 소열황제(昭烈皇帝)이신 유비(劉備)는 고황제(高皇帝)의 21세손 이시며, 오늘날의 유씨(劉氏)는 한태조(漢太祖) 고황제(高皇帝)의 위대한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後孫)들인 것이다.
한국의 始祖(시조) 文襄公 (문양공 유전)
우리 한국의 시조는 한(漢)나라 고황제(高皇帝) 방(邦)의 40세손으로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에 뛰어났던 휘는 전, 자는 원보(原甫), 호는 죽간(竹諫), 시호(諡號)는 문양(文襄)선조로서 송(宋)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 : 지금의 국방부장관)를 지낼 때 왕안석(王安石)이 제청한 청묘 취식법(靑苗 取息法)이 백성을 갈취하는 가혹한 세법이므로 이의 시행이 부당(不當)함을 왕에게 극간(極諫)하였으나 끝내 왕은 이법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니 이런 어리석은 왕은 섬길수 없다고 판단하고 비밀리에 평소에 의지가 상통하는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 송규(宋奎), 최호(),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등 팔학사와 더불어 약900년전인 고려문종(文宗) 36년 8월(서기1082년) 배를타고 동해바다를 통하여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기계면에 도착하여 안주하여 정착하면서 우리나라의 유(劉)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당시 춘추가 32세로 고려문종으로부터 수차 관직에 오를것을 권유 받았으나 사양하시고 유교와 정도로 국민을 교화하여 삼한시대의 사도와 악폐가 일소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예종17년 임인(壬寅) 2월 7일 천수 72세로 서거하시니 예종께서 례관을 보내 후하게 장례를 치루게 하였으며 시호를 문양공(文襄公)이라 하시고 건사우(建祠宇:사당)를 하사하시었다. 묘소는 경북 영천시 록전동에 있고 재각을 구인재(求人齋)라 하며 매년 음 10월 초하루에 거창, 강릉, 백천, 상대종하 종원들이 모여 향사하고 있다.
강릉유씨 세보(江陵劉氏 世譜)에 의하면 유전()은 처음 거창에 살았으며, 그의 맏아들 유견규(劉堅規)가 거타군(居陀君, 居陀는 거창의 옛 이름)에 봉해졌는데, 훗날 유창(劉敞 : 諱는 敬(경), 字는 太和(태화), 號는 仙菴(선암), 朝鮮 世宗 3년 69세 卒)의 증조 유승비(劉承備)가 좌복야 벼슬을 지내고 강릉으로 은퇴했다고 한다. 그 후 유창(劉敞)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지면서(옥천 : 지금의 강릉시, 옥천동이 존재함) 증조(휘:승비)를 시조로 하여 그의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강릉(江陵)과 거창(居昌) 두 본으로 갈라진 근원이다.
江陵劉氏 始祖(강릉유씨 시조) 菊齋公 劉承備(국재공 유승비)
강릉유(江陵劉)씨의 시조는 유전 죽간공( 竹諫公)의 9세손인 유승비 국재공(劉承備 菊齋公)으로 고려조에서 좌복야(左僕射:정2품)의 관직에 나가시고 고려말에 본관을 우계(羽溪:강릉의 옛이름)로 삼으셨으니 강릉유(江陵劉)씨 시조이시다. 노령으로 별세하니 증손(曾孫) 문희공(文僖公)의 귀(貴)로 이조에서 순충보조공신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玉川府院君(옥천부원군) 文僖公 劉敞(문희공 유창)
유창(劉敞)선조는 1352년에 출생하시어 일찍이 전록생(田祿生)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대성했다. 공민왕 20년에 21세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학유를 시작으로 성균관박사, 문하주서(門下注書)를 역임했다. 평소 이성계와 친하여 가까이서 학문을 얘기했고, 이성계의 건국을 뒤에서 도와 개국공신 2등이 되었다. 1392년 이성계 태조 등극할 때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정3품 당상관)에 임하시고 그후 1394년 좌부승지(左副承旨),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고, 태종(太宗) 15년에 숭정대부 옥천부원군(崇政大夫 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종대왕 원년 67세의 노령으로 직을 사직하였고 69세에 세종대왕으로부터 괘장을 하사 받았다. 69세에 서거 하시니 세종대왕은 백관과 더불어 애통해 하시고 예조좌랑 박기로 호상을 삼어 후장케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봉해 졌으며, 시호(諡號)는 문희(文僖)공이다. 유창(劉敞)선조는 문장에 뛰어나 선암문집(仙庵文集)을 남겼다. 태조 이성계께서는 그의 어짐을 높이 사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를 내렸으니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양리에 어필각이 있고 같은장소에 영정각이 있다. 文僖公선조의 묘소는 서울 강동구 상일동 산190번지에 쌍봉으로 있으며 재각은 해천재(蟹川齋)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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