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音符号胎动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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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버리고 표음문자를 쓰다
간체자 시대
그러나 한자의 표음화는 처음부터 암초를 만났다. 바로 서양 선교사들과의 자존심 싸움 때문이었다.
로마 라틴 문자로 한자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초기 발상은 사실 중국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1605년 명나라 때, 이탈리아인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베이징에서 중국어의 라틴어 표기 책인 『서양 문자의 기적(西字奇蹟)』이라는 책을 펴낸다. 당시로서는 그저 그런 것이 있었구나 하며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편전쟁이 끝난 뒤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고 들어온 라틴어 『성경』을 읽으면서 중국인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 십자가, 부활 등의 난생 처음 보는 『성경』의 내용에 놀랐고, 자신들의 방언으로 기록된 라틴어 표기 때문에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선교사들은 중국 연해 지역의 지방 사투리에 맞는 17종의 라틴어 『성경』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17종의 번역본은 1850년대부터 1921년여까지 20여 만 권이 인쇄, 보급되었다.
하지만 이들 라틴어 『성경』은 곧 중국인들의 한자에 대한 애착 정서와 마찰을 일으키고 말았다. 몇 개의 라틴 알파벳을 익혀 발음을 해보면 자신들의 사투리와 흡사한 것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정방형으로 균형이 잡힌 한자가 보이지 않으니 실로 미덥지가 않았다.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깁슨(John C. Gibson)이라는 선교사는 중국인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글자는 단지 관념과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라틴 알파벳은 간편하다. 때문에 신속하게 사상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대문을 열 수 있는 열쇠다.”
이런 설득이 처음에는 먹혀들었다. 하지만 깁슨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자는 중국인들에게 또 다른 종교라는 사실을.
한자는 중국인들도 모르게 이미 자신들의 마음속에 신성한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틴 알파벳에 의해 한자가 빠르게 잠식되는 것을 느끼면서 중국인들은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성경』의 내용은 나중 일이었다. 결국 중국인들은 모양은 없고 소리만 있는 이상한 글자를 버리기로 했다.
민족적 자존심 때문에 라틴 알파벳을 배격하기는 했지만 중국 지식인들은 라틴 알파벳이 문맹들을 빠르게 개화시켜 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한자는 과학 교육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서양 선교사들의 충고는 귓가를 맴돌며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2년, 중국 동남 해안 푸젠 성의 루깡짱(盧戇章)은 중국 최초의 자체적인 표음문자를 선보이게 된다. 그는 알파벳을 흉내 낸 55개의 부호를 만들어 자신이 살던 샤먼(厦門) 사투리를 표기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수많은 유사 표음문자들이 등장하게 되고, 급기야는 일본식 가나까지 흉내 낸 표음문자들이 등장하였다.
한자를 대체할 표음문자를 찾아가던 시대의 흐름은 1911년 급기야 신해혁명이라는 현대화의 여울목에서 크게 소용돌이를 치게 된다. 민족주의를 표방한 혁명 지식인들은 혁명 이듬해인 1912년, 베이징에서 ‘중앙임시교육회의’를 열고 주음자모(注音字母) 방안에 관한 연구를 시작, 1913년 전국에서 44명의 학자들을 뽑아 ‘독음 통일회’를 조직한다. 이 과정에서 ‘독음 통일회’는 이른바 주음자모를 만들게 된다.
당시의 주음자모는 모두 24개의 자음과 16개의 모음으로 구성된 표음체계다. 그러나 이 주음자모는 모든 한자를 대체하는 문자체계가 아니었다. 그저 한자 하나하나의 표준음을 표시하는 일종의 발음부호일 뿐이었다. 즉 당시 혁명정부는 6,500개의 상용한자와 500개의 속자 및 새로운 글자를 제정하고, 그 글자들에 주음자모로 발음을 달아주었다. 문맹자들이 한자의 발음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자도 살리고 발음 문제도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결국 문맹의 해소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또 하나 주음자모의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주음자모를 주도한 것은 당시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세력이었기 때문에 천두슈 등이 이끄는 좌파 지식인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중국 문자의 완전한 알파벳화’였다.
이 아이디어는 신해혁명 당시 열렬한 좌파 문인이었던 취치유바이(瞿秋白)가 당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 얻어온 것이었다. 1920년 소련, 즉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전국적으로 문맹 퇴치와 사상통일을 위해 소수민족들의 모든 언어를 라틴 문자를 기초로 한 새로운 문자로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효과는 상당해 보였다.
문자 통일을 통해 문맹률을 낮추고 효과적인 통합을 이루어가는 상황에 깊은 인상을 받은 취치유바이는 중국 혁명의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를 동일한 맥락에서 얻으려 했다. 1927년,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그 원인이 인민들의 낮은 의식수준에 있다고 판단, 중국 문자의 근본적인 개혁에 몰두한다. 그리고는 2년여의 연구 끝에 『중국어 라틴어 자모』를 발표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한자의 표음화’ 담론은 수많은 중국 좌우파 지식인들을 열병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와중에서 한때 주음자모를 찬성했던 루쉰마저 표음화에 찬성표를 던지게 된다.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니 모두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중국의 인민들이 무지한 것은 사실 한자가 어려워서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들의 무지는 어쩌면 감수성 짙은 자연환경 속에서 형성된 노자류의 뿌리 깊은 흙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흙을 깨고 씨앗을 심고 계절따라 바람따라 살면서 ‘제왕의 삶이 나와는 관계없음’의 삶을 살아온 것이 중국의 일반 대중이었다. 그 삶의 철학 속에서 퇴적된 무관심이 바로 문맹의 모습이었다. 결국 중국인들의 문맹은 그들 나름의 또 하나의 처세술이었다. 이런 이유로 표음문자의 보급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자 역시 중국인들과 함께 삶과 죽음의 역정을 건너왔기에 중국인들은 그 글꼴들을 쉽사리 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깊은 애착이 필획마다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혁명에 바쁜 사람들은 그것을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라틴어 부호로는 크게는 일곱, 많게는 수백 개에 이르는 사투리 모두를 충분히 표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었다. 모든 사투리를 다 살리려면 많은 양의 특수 부호가 필요했다.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담이었다.
표음화 논의를 엉망으로 만든 것은 한자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거창한 것들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각 지방 대표들이 자신들의 토속 발음을 적당히 죽여 버리고 있는 로마 라틴어 표기에 대한 강한 반발심이었다.
결국 사투리 때문에 표음화는 불가능했다. 그것을 깨닫고 간체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된 때는 1955년이다. 돌이켜 보니 중국어의 표음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수십 년이 걸린 것이다. 역설이지만 결국 사투리가 한자를 살린 셈이다.
다른 하나는 한자가 지니고 있는 상형의 힘 때문이었다. 싫든 좋든 중국인들 마음의 가닥가닥은 한자의 글꼴 하나하나마다에 맺힌 상형의 이미지와 올올이 연결되어 있었다.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글꼴과 그 글꼴 주변에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이미지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음만 급했던 혁명 지식인들, 그들은 결국 중국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중국인들을 구출해내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국 ‘완전한 알파벳화’의 아이디어는 갈대숲의 불길처럼 한때 왁자지껄했으나 이내 수그러들고 말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주음자모는 살아남았다. 그 후 1930년, 주음자모는 정부의 주도하에 ‘주음부호’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후 주음부호는 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퇴각하면서 함께 가지고 갔으며, 지금까지 타이완 정부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 출처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김경일, 2005. 11. 7., 바다출판사, 제공처의 다른 책보기표제어 전체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한자를 버리고 표음문자를 쓰다 - 간체자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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