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考证资料

18학사의 뜻/8학사란?(김포 공씨 시조 포함)

송화강 2013. 12. 3. 20:36

18학사란

 

8학사 참고 사이트  http://www.hyongc.com.ne.kr/chinju/8haksa-1.htm (클릭)

                            http://www.hyongc.com.ne.kr/chinju/8haksa-2.htm

http://www.hyongc.com.ne.kr/chinju/8haksa-2.htm

 

 

진주형     족보(族譜)에 등재된 학사(八學士)

학사(八學士)를 생각하면서

   시조(始祖) 옹(옹)은 서기 634년에 고구려(高句麗)에 8학사(學士)로 우리나라에 왔다. 이후(以後)에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의 삼국(三國)은 서로 계속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여오다가 서기 660년에 백제는 신라에게 망하고 또한 서기 668년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의 지원(支湲)을 받아 고구려(高句麗)는 패했다.

   신라(新羅)는 무력(武力)으로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하였다. 당(唐)나라에서는 싸움의 패국(敗國) 백성(百姓)인 고구려(高句麗) 사람 28,200명을 당(唐)나라 여러 주에 분산 이주(移住)하였다.

   이와같이 나라가 망하고 관리(官吏)들은 본토 고구려(高句麗)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으니 당시의 관리(官吏)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상태이라는 것을 능히 알수 있다.

   또한 8학사(學士)의 기록(記錄)을 살펴볼 때에 고구려(高句麗)때부터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8학사는 동시(同時)에 입국(入國)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족보에 등제된 팔학사(族譜登載八學士)

   시조(始祖) 휘(諱) 옹(옹)은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족보(族譜)의 기록에 팔학사를 찾아본 바에 의하면.....

1. 서기 1808년 무진대동보(戊辰大同譜)의 서문(序文)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人物)로서

    18세(世)    매안(梅岸)    휘(諱)    효동(孝東)    67세(歲)

    17세(世)    능주(綾州)    휘(諱)    택규(宅奎)    61세(歲)

    20세(世)    운봉(雲峰)    휘(諱)    사인(思仁)    68세(歲)

    19세(世)    매안(梅岸)    휘(諱)    국필(國弼)    48세(歲)(이상은 대동보에 등재된 순서와 당시의 나이들임)

  들이며, 휘(諱) 국필(國弼)의 서문(序文)에 팔학사(八學士)로서 동래입국(東來入國)의 팔학사와    서기 1924년 갑자보(甲子譜)의 팔학사(八學士) 기록에 따라 서기 1979년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에 등재되어 있는 팔학사는 성의 일부가 일치하지 않아 확실한 기록을 이곳에 하기가 어렵다.

   그 외 파보(派譜)에는 팔학사의 기록이 또 달리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각기 소견이 구구(區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8학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 하기가 어려워 정확하게 기록하기가 어려우며, 한민족 대성보에는 18학사가 동래입국(東來入國) 하였다고 등재되어 있으며 그 연차를 보면 다음의 내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 대성보에 의한 팔학사(八學士)

한민족 대성보에 의한 팔학사 상황(韓民族大姓譜八學士狀況) 

   서기 1997년 1월 15일 발간(發刊)된 [한민족대성보(韓民族大姓譜)]에 등재되어 있는 팔학사(八學士)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성(姓氏)를 조사한바 팔학사(八學士)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성18성(姓)의 학사(學士)이고, 팔학사의 기록없이 학사(學士)의 신분(身分)으로 동래입국(東來入國)한 분은 11성(姓)의 학사(學士)이다. 이를 우리나라에 들어온 년차순(年次順)에 따라 기록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남양홍(南陽洪氏)

  시조(시조) 홍천하(홍천하)는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서기 618~서기 641년)때, 당(唐)나라에서 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강명(講明)하고 문화를 널리 혁신(革新)시켰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유학(儒學)발전에 공(功)을 세워 문무왕(文武王)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으며, 신문왕(神文王)이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고 효소왕(孝昭王)은 당성후(唐城侯)를 삼았다.

2. 남양방(南陽房氏)

  시조 방계홍(房系弘)이 고구려(高句麗:BC 38~서기 668년)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한다.

3. 의령옥(宜寧玉氏)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하여 당(唐)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才士)중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에서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서 의령(宜寧)에서 살게되면서부터 시원(始源)을 이룬다.

4. 진주형(晋州邢氏)

  시조 형옹(邢옹)은 당(唐)나라 태종(太宗)때 사람으로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甲午 서기 634년)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보급에 공헌하였다. 관직(官職)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냈으며 남양(南陽:지금의 수원부근)의 관적(貫籍)을 하사(下賜)받았다.

5. 장흥위(長興魏氏)

  시조 위경(魏鏡)이 신라 태종(新羅太宗:서기 654~서기 660년)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게된 것이 우리나라 위(魏氏)의 시조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신라에서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게되였다.

6. 온양방(溫陽方氏)

  중국 산동사람인 방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신라문무왕(新羅文武王) 9년(서기 668)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동래하여 설총(薛聰)과 같이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國譯)하였다.

7. 밀양변(密陽卞氏)

  당(唐)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서기 742~서기 755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변원(卞源)이 경덕왕 2년(서기 743)에 왕명(王命)을 받들어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孝經)을 가지고 동래(東來)하여 신라(新羅)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8. 평택임(平澤林氏)

  도시조(都始祖) 임팔급(林八及)은 당(唐)나라 문종(文宗: 서기 827~서기 846년)때 한림학사(翰林學士)였는데, 간신(奸臣)들의 참소가 있자 8학사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라(新羅)때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하였다.

9. 행주은(幸州殷氏)

  은(殷氏)는 신라 문성왕 12년(서기 850)에 8학사 중의 한 사람인 은홍열(殷洪悅)이 우리나라에 들어서 부터 그 시초가 된다. 신라때에 태자태사(太子太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의 벼슬을 지냈고 덕양(德陽)에 정착하여 살게되므으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으로 삼고 있다.

10. 효령사공(孝令司空氏)

  당(唐)나라 희종(喜宗)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사공도(司空圖)가 신라 효공왕 원녕(서기 897)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하여 동방의 거유(巨儒)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유하며 당문화(唐文化) 보급에 앞장섰다.

11. 남양송(南陽宋氏)

  시조 송규(宋奎)느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난신(亂臣)의 참소를 입고 후당(後唐) 면종 원년, 신라 경애왕(서기 926년)에 동료 7학사와 같이 동래하여 경순왕의 후대(厚待)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12. 옥천육(沃川陸氏)

  시조 육보(陸寶)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서기 927년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절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新羅)에 선교사(宣敎使)를 보낼 때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왔으며, 공을 세워 경순왕(敬順王)이 관성군(管城君)에 봉(封)하였다.

13. 원주원(原州元氏)

  원경(元鏡)을 시조로 하는 운곡파(耘谷派) 위(衛)나라 원훤(元喧)의 후손이며, 당(唐)나라 태조(太祖:서기 907~서기 914년) 때 고구려(高句麗)에 파견된 8학사 중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와 돌아가지 않았다.

14. 남원독고(南原獨孤氏)

  시조 독고공순(獨孤公舜)이 신라말엽(신라는 서기 935년 멸망)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방으로 와 세거(世居)한 것이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계대(系代)를 잇지 못하다가 그의 후손 독고신(獨孤信)이 인물이 출중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으므로 기일세(起一世)하다.

15. 남양서(南陽徐氏)

  시조 서간(徐간)은 중국에서 귀화해 온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당성(唐城:남야의 별토)에 정착세거하면서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라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 서후(徐厚)가 고려 현종(顯宗: 서기 1010~ 서기 1031년)때 대장군(大將軍)으로 거란의 침입을 격토하는데 공(功)을 세워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서간(徐간)을 시조로 하고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16. 영산, 영월신(靈山, 寧越辛氏)

  시조는 고려중엽에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인 신경(辛鏡)으로 동래하여 인종(仁宗) 16년(서기 113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17. 해평길(海平吉氏)

  당(唐) 나라에서 귀화한 8학사 중 한 사람인 길당(吉唐)이 고려 문종(文宗: 서기 1047~서기 1082년)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길(吉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18. 곡산한(谷山韓氏)

  시조 한예(韓銳)는 중국 송나라 출신으로 고려 희종(熙宗) 2년(서기 1206)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高麗)에 들어와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봉해졌다.

학사(學士)로서 동래입국성(東來入國姓氏)

 19. 경주섭(慶州葉氏)

  시조 섭공제(葉公濟)는 중국 송나라 고종(高宗: 서기 1127~서기 1162년)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장차 정란(政亂)이 일어나 송(宋)나라가 망(亡)할 것을 미리 알고 주잠(朱潛) 등 7학사(學士)와 같이 바다를 건너 동래하여 나주(羅州)에 정박(定泊)한 후 능주(陵州)에 살다가 담양(潭陽)에 정착하였다.

20. 광산광주노(光山光州盧氏)

  노해(盧垓)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아버지와 함께 동래하여 신라(新羅)에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다.

21. 개성방(開城龐氏)

  원(元)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 학사(學士)에 이르러 충정왕(忠定王) 3년(서기 1351)에 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하여 개성(開城)에 정착하였다.

22. 면천복(沔川卜氏)

  당(唐: 後唐 서기 923~서기 936년) 나라의 학사(學士) 한 분이 신라말엽(新羅末葉)에 오계(五季)의 나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였다. 면천(沔川)을 비롯하여 홍천(洪川) 오천(烏川) 연주(延州) 평산(平山) 구성(龜城) 등 10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하여 왔다.

23. 함양여(咸陽呂氏)

  여어매(呂御梅)는 중국 래주(萊州)사람으로 당(唐)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다가 그곳에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서기 877)에 신라에 귀화하여 경북 성주군 벽지면에 정착(定着)하였다.

24. 김포공씨(金浦公氏)

  공윤보(公尹輔)가 당나라 18학사의 한 사람으로 당(唐)나라 장군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피하여 신라 경덕왕(景德王) 서기 755년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金浦)에 자리를 잡아 시조(始祖)가 되었다.

25. 안음서문(安陰西門氏)

  원(元) 나라의 하남성(河南省) 출신(出身)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서문기(西門記)가 고려 충정왕(忠定王) 3년(서기 1351), 공민왕(恭愍王)의 비(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동래하여 안은군(安隱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26. 해주오(海州吳氏)

  시조 오인유(吳仁裕)는 중국 송나라 때 명성을 떨쳤던 대학사(大學士)로 서기 984년 고려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고 해주(海州)에 정착(定着)하였다.

27. 청주좌(淸州左氏)

  형소(亨蘇)는 원(元)나라 천관시랑(天官侍郞)으로 고려때 동래하여 탐라(耽羅:제주도) 목마장(牧馬場) 감목관(監牧官)이 되면서 부터 그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28. 달성하(達城夏氏)

  시조 하흠(夏欽)은 송나라에서 대도독(大都督)을 역임한 사람으로 고려 인종(仁宗: 서기 1123~서기 1146년)때 귀화하여 달성(達城)에 정착(定着)하였다.

29. 파릉호(巴陵胡氏)

  시조 호극기(胡克己)는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사신(使臣)으로 내조(來朝)하지 않고 가평군(加平郡)에서 은거(隱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