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옥폴포주차장을 나오면 골짜기 오른편을 따라 오르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길로 오르면 폭초위의 조그만 저수지제방위로
오르게 되는데 이곳 주차장은 무료이다. 잠시 차에서 내려 제방주위를 서성거려보지만 카메라를 들이댈만한 피사체는 없다.
조그만 저수지인 수옥정지를 지나면 아주 조그만 마을이 나오는데 한중합자 내몽고 민속촌마을이라는데 별 특징은 없다.
조금 더 올라가면 역시 조그만 마을이 있다. 수옥정 관광단지이다. 폭포입구의 작은 마을은 수옥폭포 관광단지였는데 이곳은
수옥정 관광단지인 것이다.두 마을을 합해도 조그만 마을임에 틀림이 없는데 나누어있으니 두 마을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자동차길은 삼거리가 되는데 좌로가면 소조령쪽 입구이고 오른편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조령산 자연휴양림입구가 나온다.
이를 지나 왼편길로 조금 더 오르면 조령관문 식당주차장이 나오고 이 주차장을 지나는 길에는 쇠사슬이 걸려있다. 우리가
들어온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그대로 차로 통과하여 들어가니 잠시 후 왼편에 제3관문이 보인다. 이 근처는 주차장이 없어
계속하여 조금 더 들어가니 승용차 10여대쯤 주차할 수있는 공간이 있다. 이는 이근처 자연휴양림 통나무집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주차장이지만 염치 불구하고 주차를 하였다. 돈을 받는곳은 없다. 다시 제3관문을 향해 내려간다.
제3관문 앞에는 조그만 소공원이 있다.
이 소공원에 있는 비석의 앞. 뒤 사진과 선비석상이다.
석상의 좌대에는 과거길이라는 설명이 있다. 읽기 편하게 옮겨본다.
과거(科擧)길
옛부터 영남(嶺南)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漢陽)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길은 남쪽의 추풍령(秋風嶺)과 북쪽의 죽령(竹嶺), 그리고 가운데 새재(鳥嶺)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秋風落葉)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끌어진다는 선비들의 금기(禁忌)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관문 앞에는 이런 표지석도 보인다.
문으로 들어가 돌아본 제3관문의 모습이다.
영남 제3관(嶺南第三關)이란 현판이 보인다.
문 밖(소조령 방향)에 서 있는 안내에는 문경관문(聞慶關門). 사적 제147호로 되어있다.
이 관문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城主) 흥딜(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고려초부터 이곳초참(草站)을 새재라 한으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 곁에는 적당한 거리에 이런 쉼터도 마련되어있다.
이 새재는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 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이곳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동화원터에 세워진 이정표이다.
임진왜란당시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申砬)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변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왜병이 새재를 넘고자할때
신립장군이 농민 모병군(募兵軍)의 제2진의 본부를 설치했던 이진터(二陳址).
색시폭포를 지나면 나타나는 귀틀집이다.
이런 귀틀집은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우리나라 전래의 통나무집으로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는 기록이 있다.
바위굴과 새재우라는 안내가 있다.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를 피해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여 아비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너의 아비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비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산골 주막에서 비를 만났는데,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이 선비가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임을 알게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천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깉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새재우를 지나는데 구슬픈 아리랑의 선율이 들린다.
아리랑 같은데 가사가 처음들어보는 내용이다.
조금 더 내려가니 쉼터가 있고
문경새재 아리랑의 가사를 적어놓은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석에 써 있는대로 새재로 가는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니 어느새 제2관문에 이른다.
동화원에서 2.3km를 내려온 셈이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嶺南 第二關門 鳥谷關)이다.
사적 제147호인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1592년(조선 선조25년) 왜란이 일어난 후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이곳에 성을 쌓은것이 시초가 되었다.
1708년(조선 숙종34년)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鷹岩)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中城)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였다.
현재의 문은 그 후 폐허가 된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조곡관을 지나 제일관문으로 향하는 산책로곁에는 이런 폭포도 보인다.
물레방아를 돌리기위해 나무를 다듬어 이런 물길을 만들어놓았다.
스위스 오지마을 "지날"에서 산책할때 본 물통과 닮았다.
스위스의 물통에는 꽃장식을 하여 놓았는데 여기는 꽃이 없다.
그래도 운치는 있다.
조령 산불됴심 표석이다.
성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 비석이다.
현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主屹山)의 자연에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이 비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있어,
이 비는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길가에는 이런 돌탑도있다.
소원성취탑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몸이 아픈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이런길을따라 쉬엄쉬엄 걷다보면 옆으로 빠지는 작은 소로가 보인다.
이 길은 많은 여행객들을 위하여 정비한 길이지만,
샛길은 예전에 과거보러 이 조령을 넘던 선비들이 걷던 바로 그 길이다.
이 옛길은 문경의 예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된다."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길이다.
꾸구리 바위라는 안내 표시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가 살고있어
바위위에 앉아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바위를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을 하였다고 한다.
산책로 곁에는 종종 이런 비석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잠시 쉬어가며 한번쯤 읽어보고 지나가는 것도 좋으리라.
윗 사진의 비석을 보고 용담이 보고싶어 내려가 보았다.
왼편 아래에 조그만 담(潭)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담 보다는 이 바위가 더 볼만하다.
용담(龍潭)이다.
비록 조그만 웅덩이이지만 물은 업드려 마셔도 좋을만큼 맑다.
조금 더 내려가니 왼편에 정자가 보인다. 교귀정(交龜亭)이다.
이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인처(交印處)로
1470년경(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하여 사용하다가 1896년(건양1년)3월 의병전쟁 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내려오다가 1999년 복원한 것이다.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있다.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1칸규모이다.
교귀정 옆에는 이런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는데 교귀정 소나무란 안내가 있다.
이 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정자와 역사를 함께 한 나무로 뿌리가 정자방향인 북으로 뻗어잇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향해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듯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나무이다.
보면 볼 수록 특이한 형태의 수형으로 그 신비감을 더해준다.
경상감사의 행차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바위에 새겨놓았다.
조선시대의 미암일기초(尾巖日記草)와 탐라순력도(眈羅巡歷圖)를 기초로하여 재현한 것으로,
총 300여명으로 구성된 행차이다.
교귀정 옆 바위절벽에는 이런 기록도 보인다.
당시 현감의 선정을 새겨놓은 것이다.
제3관문에서 열심이 걸어 교귀정을 지난다.
사진의 분량이 많아 오늘은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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