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上代研究

曺子奇

송화강 2012. 9. 20. 14:07

    http://cafe.daum.net/cho2002/3Fs8/119?docid=AbEM|3Fs8|119|20100430224616&q=%C6%F2%C0%E5%BB%E7%20%C1%B6%C0%DA%B1%E2

 

조자기 공은 무사이나 과거 급제 기록이나 평장사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려사절요 1010년 기록

○ 갑인일에 숙주(肅州 평남 평원군(平原郡))가 무너졌다. 이날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격서를 가지고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ㆍ함질(咸質)ㆍ양택(楊澤)ㆍ문안(文晏) 등과 이미 항복할 표문을 만들었다. 채문 등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이르니 성문이 닫혀 있었다. 최창이 소리질러 분대어사(分臺御史)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걸음을 배로 늘려 왔는데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이냐?" 하니, 자기(子奇)가 노이와 유경이 항복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고 드디어 성문을 여니 채문이 들어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하였다.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 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는데 종석이 따르지 않자,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살랐다.


상동 1012년 5월 기록

○ 5월에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ㆍ군의 군사를 독려하여 이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이로 보아 조자기 공은 군대의 연대장 급 이상의 무인으로 고려사절요에 딱 2건만 나옵니다. 아울러 군대의 지휘부로서 1012년에 활동했다면 근 4-50세는 되었을 것인데, 이 분이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내다가 32살 때인 1081년 고려로 건너와 강릉유씨의 시조가 됐다는 유전(劉筌)공의 묘비명을 썼다는 것은 연내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전 공이 사망했다는 1122년 이후에 비갈을 세웠을 텐데, 그럼 조자기 공은 150-160세에 해당되므로 도저히 불가능하다할 것입니다.


아울러 유전 공에 관한 중국이나 한국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그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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