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씨 거창유씨 유전시조의 중국고향 하남성 길리구 하양 탐방기
劉荃의 고향 중국 낙양시 길리구(吉利區)
중국 唐나라 서기 782년 음력 8월에 한반도 신라로 건너 오신 거창,강릉유씨 시조 劉荃의 고향은 당시의 지명 중국 하남성 하양(河陽)이다.현재의 중국 정부의 공식 지명은 하남성 낙양시 길리구(吉利區)와 하남성 맹주시(孟州市)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옛 지명 "하양" 河陽이다.
지도 주소
http://www.go007.com/ditu/chuzhong/1360196.html
한반도 유전(劉荃) 도시조의 고향 중국 하남성 옛 지명 하양(河陽)을 찾은 그 발자취를 연재해 나간다.
제 1차 방문/유전고리(劉荃故里) 옛 지명 하양 방문
시기: 2016년 4월 17일
방문지역:맹주시 제북두촌
방문자: 유풍종(劉豊鐘),유경상(劉慶相)
1.중국 하남성 평정산시 노산현 유루(劉累) 대제사 행사장/유루 시조전(劉累始祖殿)에서
2016.4.19일 중국 하남성 평정산시 노산현 소재 유루(劉累) 선조 시조전(始祖殿) 재례행사장에서
2.맹주시(孟州市) 제북두촌(堤北頭村)
2016.4.17일 중국 하남성 맹주시(孟州市) 종친들과 본 고장출신 당나라 대문호 한유(韓愈) 사당에서
제 2차 방문/유전고리(劉荃故里) 옛 지명 하양 /初度訪問
시기: 2018년 4월 20일
방문지역:
낙양시 길리구(中国洛陽市 吉利區)--- 옛 지명, 하양(河陽)
초도 도시조 고향 방문단 명단(2018.4.20일)
인솔 대표: 단장 유종식(劉鍾植)
유기찬(劉基燦),유영경(劉永京),유승조(劉承祖),유준상(劉準相),유재정(劉載正)
유영식/도영숙(劉永植/都榮淑),유재흥(劉載興),유상종(劉尙鍾),유풍종(劉豊鍾)
유재흠(劉載欽),유한종(劉漢鍾),유일남(劉一南),유경상(劉慶相),유규상(劉奎相),
유영호/공종자(劉永鎬/孔鍾子),유경수(劉京守),유미광(劉美光),유영옥(劉永玉),
유명상/황치봉(劉明相/黃治鳳)
2018.4.20일 유전(劉荃) 도시조님의 중국 옛 고향 하양광장(河陽廣場)에서 초도 고향방문단 기념촬영
2018.4.20일 낙양시 길리구(吉利區) 하양광장을 활보하는 유전(劉荃) 도시조의 한반도 후예들
2018.4.20일 낙양시 길리구(吉利區) 하양광장을 활보하는 유전(劉荃) 도시조의 한반도 후예들
제 3차 방문/유전고리(劉荃故里) 옛 지명 하양 방문
시기: 2019년 7월 10일-14일
방문지역: 1.낙양시 길리구(吉利區) 옛 하양
2.맹주시 제북두촌(堤北頭村)
방문자: 유경상(劉慶相)
2019.7.11일 중국 하남성 맹주시(盟州市) 유씨 종친회 劉愼堂원로 ,劉謙義종장 ,劉榮光 종친회장 外
2019.7.14 중국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길리구(吉利區) 하양광장(河陽廣場)앞 새벽시장 모습
이번 선조의 고향을 찾는 여행은 2019.7.9일-7월 16일간 시행되었다.
갑자기 고향방문 여행을 떠난 이유는 항시 해외 배낭여행을 즐겨 다니기도 하지만 선조의 고향 맹주,길리
지역을 그리고 낙양과 그 주변 도시들을 일괄해서 봄으로써 전체적인 개황을 파악키 위한 것이었다.
원래는 산동항공 청도행표를 15박 16일을 끊고 갔는데 7박 8일째 되던날 갑자기 치아에 문제가 생겨서
급히 귀국했으나 중요한 고향방문 일정은 이미 이 기간동안 거의 모두 마치었다.
인천공항에서 산동항공 청도행 비행기를 타고 청도공항에 내린 시간은 불과 한시간 반을 넘기지 않았다.
청도공항에서 바로 차로 마중나온 중국측 숙소에 짐을 내려 놓고 오랬동안 오지 않았던 청도시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시내 뻐스를 타고 종횡무진 다녔다.곧 그 변화상이 들어 왔다.
이튿날 2019.7.10일 날은 청도(靑島)에서 중국 국내선 비행기로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로 갔다.
비행시간은 두시간이 걸렸다.청도에서 중국 사천성 청두(成都) 직행 비행기가 다니지 않는 관계로 정주공항에서 환승하여 사천성 청두로 가는 비지니스맨들이 주로 타고 있었다.
정주의 신정공항(新鄭空港)에 내리니,바로 장거리 뻐스 정류장이 있고,나는 그곳에서 나의 목적지인 하남성 맹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두시간도 안 걸려 이번 목적지인 맹주(河南省 孟州)에 도착했는데,뻐스로 오는 도중에 공의(鞏義市)를 지났는데,이곳은 그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고향이다.즉 중국에서는 유명한 인물의 고향마을을 杜甫故里"처럼 누구누구의 "故里"라고 부른다.이 두보의 고향 공의시(巩义市)내에는 두보사당이 있다.
두보의 생몰년대는 당나라때 우리 劉荃 도시조와 거의 같다.두보의 생몰연대가 AD 712-770년이므로 유전선조의 생년 AD 751년 보다는 39년 일찍 이곳 공의시에서 태어 났다.두보의 고향 공의시(巩义市) 유전선조의 고향 하양(河陽)에서 멀지 않다.두보의 고향이 황하강(黃河)의 남쪽인데 반하여 유전의 고향 하양(河陽)은 황하강 북쪽에 위치한다.
두보는 황하강을 앞에 두고 전장에 나가면서 바로 유전(劉荃) 선조의 고향 나룻가에서 한수의 시를 읊는다.
後出塞 : 군영(軍營)을 나서면서<杜甫>
朝進東門營 : 아침에 동문의 군영을 나서고
暮上河陽橋: 저녁에 "하양교"에 이르렀네
落日照大旗: 지는 해가 큰 깃발 비추나니
馬鳴風蕭蕭: 말은 울고 바람은 쓸쓸히 불어 오네.
이 하양교는 지금 우리 선조의 고향 길리구 앞을 흐르는 황하강을 가로 질러 설치된 다리이다.
지금은 국도인 길리대교(吉利大橋)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고속도로용, 하나는 일반도로 용의 두개가 있고,길리구(吉利區)와 마즌편 맹진(孟津縣)을 잇는 작은 다리들도 있다.모두 황하와 어우러져 아름답다.
이 길리구-孟津간을 잇는 정겨운 황하강 다리는 지금도 천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자리에 남아 있는데
그 다리의 이름은 맹진황하교(孟津黃河橋)이다.
지금 이 길리구의 현재 설치되어 있는 세개의 다리 즉 현대의 산업물결에 부응한 신세대 다리 2개 즉
길리구의 황하변의 하류쪽에 설치된 웅장한 두개의 다리 즉 그 이름이 하나는 낙양황하대교이고 또 하나는
낙양황하공로대교인데 이 두개의 다리와는 상관없이 그 길리구 상류 당나라때 하양삼성이 설치되어 있던 그자리 그곳에 지금껏 남아 있는 그 정겨운 다리 즉 맹진과 길리구를 잇는 그 다리 이야기 인데 옛날 당나라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보가 이제 낙양에서 아침에 군영을 떠나 하루종일 행군해서 해질녁 이 황하강변 하양의 남쪽 대안인 맹진(孟津) 나룻가에 다달아 지는 해를 바라 보면서 지은 시문을 우리는 천여년이 지난 오늘
보고 있는 것이다.
暮上河陽橋: 저녁에 "하양교"에 이르렀네
落日照大旗: 지는 해가 큰 깃발 비추나니
馬鳴風蕭蕭: 말은 울고 바람은 쓸쓸히 불어 오네. ...............라고!
여기에서 말하는 맹진현은 선조의 고향 길리구의 황화강 마즌편 남쪽 지역이며,동한(東漢)을 세운 劉秀의
광무제릉이 있는 곳이다.이곳은 그 지명이 당나라 당시에 하음(河陰)이었던 지역이다.즉 황하강 북쪽은 지금의 길리구 지역은 하양(河陽)이었고,그 황화강 건너 남쪽 마즌편의 지명 즉 지금의 맹진현은 하음(河陰)이었는데,옛부터 중국에서는 산과 강의 음과 양은 "山南水北爲陽,山北水南爲陰" 라고 해서 산을 놓고는 산의 남쪽은 "양"이지만 물을 놓고는 그 강물의 북쪽을 "양"이라고 하고 그 반대를 음이라고 해서 지명을 지였기 때문이다.즉 하양의 강건너는 하음 즉 맹진 지역이다.
두보의 시를 생각하면서,공의시 지역을 지나니 우리 劉荃 도시조께서 어린 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공의시 협진나루에서 읊은 시 한수가 우리의 선조께서 남기신 죽간일집(竹諫逸集)에 실려 있어 한번 올려 본다.
隨東來諸學士登觀魚臺:
함께 동래해 온 제 학사들과 함께 관어대에 올라
夾津 洲渚逈迷茫: 협진(夾津) 강 모래톱 지금은 아스라이 멀기만 한데
斗北秋天萬里長: 두북(斗北)의 가을 하늘 천 만리 펼쳐 있고
風日孤鴻歸極浦: 바람 부는날 외로운 기러기는 먼 포구로 돌아 가고
水田雙鷺領殘陽: 무논에 해오라기 한쌍 지는 햇살 비치누나.
유전(劉荃) 선조는 경북 영덕에 있는 관어대에 올라 함께 동래해 온 학사들과 회포의 싯구를 짓고 있다.
마치 관어대에서 바라다 본 그 동해 바다의 펼쳐짐이 마치 중국에 어린날 있을 때에 가 보았던 그곳 협진 나루터가 떠 오르셨던 듯하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협진(夾津)이 어느 곳이기에 선조께서는 그 곳을 그리워 하는 것일까.
협진(夾津)은 낙양시의 길리구(吉利區) 선조의 태어난 고향에서 멀지 않은 황하강 건너 있는 공의시(鞏義市) 에서 남쪽으로 15킬로 떨어진 작은 행정단위 지역이며 그곳에는 오라하(墺羅河)라는 작은 강이 흐른다.
이 강안에 있는 작은 모래톱에서의 어린날 옛 추억이 서려 있으셨던 것같다.
지금 정주(鄭州)의 신정공항에 내려서 맹주가는 뻐스를 타고 가다가,공의시(鞏義市)를 지나다가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이 공의시를 막 지나자 뻐스는 바로 황하강 다리를 건넜다.
즉 이곳은 황하강의 북쪽 온현(溫縣)이라는 지역인데 그 펼쳐지는 옥토 평야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
이곳에서 이어서 맹주로 달렸는데 맹주까지도 맹주시내도 한없이 넓고 펼쳐지는 평원이 기막히다.
맹주라는 곳은 그 면적이 540여 평방킬로미터로써 서울의 605평방킬로미터보다는 조금 작은 도농(都農)지역이다.도시 내부 그 자체 만으로는는 우리나라의 군청소재지 보다는 조금 클 것이다.깨끗하다.이곳에서 숙박을 정하고,하루를 묵고이튿날 이곳에서 한 4Km 쯤 떨어진 제북두(堤北頭) 마을에서 그곳 맹주 유씨 종친회장과 유겸의 원로께서 차를 가지고 숙소를 찾아 왔다.함께 그곳 제북두 마을에 가서 맹주 종친들을 모두 만났다.반가운 만남이었다.
오후에는 이곳 맹주의 산을 찾아 보겠다고 그곳 유신당(劉愼堂/86세) 원로와 유겸의(劉謙義) 宗長 그리고 나 셋이서 그 지역을 돌았다.산은 없고 작은 흙 언득들만 좀 보였다.맹주지역은 황하강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근본적으로 산이 관내에 없는 지역이다.
단지 하나의 산이 있다.그 산이 사실 행정지역은 지금 맹주시(孟州市)에 속하지만,실은 이글의 맨 상단에 한장의 중국 바이두 지도에서 캪쳐한 지도를 얹어 놓았지만 바로 길리구(吉利區)의 하양공원(河陽廣場)에서 가까운 괴수향(槐树鄕)에 산 하나가 있을 뿐이다.이름은 오룡대(五龍臺)이고 309.3m이다.바로 이 산이다.
맹주에서 맹주 종친들과 늦게 까지 맹주의 산을 찾겠다고 다니다가 늦어져 버려서 오후 여섯시가 되어서야 불야불야 택시를 타고 19.8Km 떨어진 우리 유전 선조의 고향 길리구(吉利區)로 달렸다.고향이다.
모든 것이 정답고,낮익은 듯하다.아름답고 조용하다.지난해 한반도 26명 후손들이 역사적 첫발을 디딘 이곳,그 기념비적 방문이 있은지 일년 지나 오늘 이자리에 다시 섰다.나는 이 하양공원(河陽廣場) 인근에 숙소를 정하고 7월 11일,7월 12일,7월 13일 ,7월 14일까지 네 밤을 그곳 조상의 고향에서 내리 묵었다.
이곳 길리구의 숙소에 묵는 7월 15일 오전까지 즉 5일간 이곳 길리구의 지리 지형 파악은 물론,낙양시내 지역과 인근 이곳 길리구(吉里區)의 주변에 산재한 도시들,즉 제원시(濟源市),심양시(沁陽市),초작시(焦作市)를 뻐스로 모두 돌아 보았다.그리고 낙양시내로 들어 오고 길리구로 다시 왔다.숙소가 길리구에 있기 때문이다.하루 하루 알차게 답사하면서,파악해 나가던중 갑자기 아침식사때 어금니가 문제가 생겼다.
돌발 상황이다.급히 택시를 불러타고 낙양시 용문(龍門) 고속전철역(高铁站)로 가서 다시 청도(靑島)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낙양의 용문고속철도역에서 청도까지는 7시간이 걸리며,중국의 특급열차는 그 속도가 일본의 신간셍(新幹線)보다도 빠르다.대단하다.그리고 옛날의 30년전 나의 중국 다니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은 멀찌감치 없어지고 신기하게도 승차는 빠르고 깨끗하고 좋다.단지 문제라면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그 기차역에서 매표 과정이 난리인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이때 쓰라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 고속철을 타고 낙양에서 청도까지 오는 과정은 정주를 거쳐서 내 달려 신향시(新鄕市),안양시(安陽市), 한단시(邯郸市),형태시(刑台市),석가장(石家莊),형수시(衡水市)를 거치고,이제 산동성 들어서기 바로 경계선에 위치한 덕주시(德州市)를 지나 제남시(濟南市)에 들어 섰는데 여기서 부터가 산동성(山東省)이다.산이 듬성등성 나타난다.정주에서 덕주까지 전혀 산 비슷한 것도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題) 참으로부럽기 그지없다.
제남을 지나니 밖에 들판에도 마을마다 이제 해가 지고 등불이 켜졌다. 곧 치박시(淄博市)와 유방시(潍坊市)를 지나 청도북역(青岛北站)에 도착했다.이곳 철도여행을 하면서 그 화북평야(華北平野)의 광대무변함은
이미 알고 있지만,사실 나는 형수시(衡水市)를 통과 할 때는,아니 형수역에 기차가 멈쳐 섰을 때 가벼운 흥분을 느꼈는데,이것은 우리의 죽간일집(竹諫逸集)에 나와 있는 "公居冀州道茂山三里"에서 이 기주도(冀州)라는 지명(地名)의 발생지가 바로 이곳 하북성(河北省) 형수시(衡水市)에 있는 기주구(冀州區)의 지명 즉 기주(冀州)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기주(冀州)
기주(冀州)란 당나라 이전 부터 오던 지역 이름이며,그 범위는 하남성(河南省)의 황하강 이북 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멀리 북경을 지나 요동의 일부까지 이르고,아울러 산서성(山西省) 서부 일부 지역까지 포함하는 지역을 이르는 광대한 범위의 지역을 이르는데 당연히 우리 도시조 劉荃의 고향 길리구(吉利區) 즉 도시조께서 건너 오시던 당나라때의 지명인 하양(河陽)은 황하강 북쪽이기 때문에 이 기주(冀州)땅 이었던 것이다.
하양(河陽)뿐 아니라 맹주(盟州),온현(溫縣),초작(焦作) 이 모든 지역 즉 황하강 즉 낙양앞을 흘러가는 황하강을 건넌 지역은 모두다 하나같이 기주(冀州)땅이었던 것이다
"公居冀州道茂山三里" 시조 유전의 고향은 기주도 무산삼리였다고 죽간일집에 나와 있는데,어찌 그 "기주도"의 어원 발생지인 형수시(衡水市)를 지나면서 가벼운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형수시의 관내 일개 구(區)의 명칭이 기주구(冀州區) 이 화북,산서,하남성 황화강 이북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명의 그 이름 기주(冀州)는 오늘날도 이 형수시의 冀州區에 남아 그 형형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https://baike.baidu.com/item/%E5%90%89%E5%88%A9%E5%8C%BA
그리고 청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일찍 청도공항으로 가서 원래 7월 24일 귀국표를 7월 16표로 바꾸어 귀국했다.열두시가 6분 남았네 그만 자야 겠다.오늘도 감사한 하루였다.
公居冀州道茂山三里
'中国刘荃故里 > 河陽吉利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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