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次考证文

제 2차 고증문

송화강 2018. 7. 20. 14:06

강릉유씨 족보 유전(劉荃)시조의 동래(東來)년대 

300년 착오에 관한 고증 Q&A 해설

                                               劉   慶   相

 

강릉유씨 족보에 나타난 유전 도시조와 팔학사의 동도 시기는 서기 1082년 고려 문종 36년이며,중국 역사로는 宋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豊) 5년에 고려 문종때에 팔학사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온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러가지 고증자료에 의하여 300년 5개의 60갑자 착오가 발견됨으로써 지난 2013년 12월 2일 이미 강릉유씨 대종회에 고증문을 제출한 바 있다.

 

2013년 12월 2일 강릉유씨 대종회에 이미 제출었던 제 1차 고증문 보기

http://blog.daum.net/rosy900/5666614

 

 

따라서 강릉유씨 유전 도시조의 동래 시기는 고려문종 때가 아닌 신라 선덕왕 3년 같은 중국 역사로는 당(唐)나라 덕종(德宗)조 건중(建中)3년 서기 782년도동래해 온 사실로 올라갑니다.

 

 

 

問. 1  先人이 後人 비문(碑文)을 쓴 미스테리는 무엇인가

1010년대 활동하시던 창녕조씨 조자기(曺自奇/曺子奇 동일인)님은 100년후에 사망하실 유전(劉荃) 도시조님의 비문(碑文)을 썼다는데 이 미스테리는 무었인가?

 

2018.7월 12일 오전 10시  창녕조씨 문중 문자 멧세지 수신.

.

위의 사진에 보면 "曺自奇 一云 子奇"라고 창녕조씨 정해보(1767년 목판본 발간)에 나오는데   曺自奇는 一云 子奇 /해석:또는 曺子奇 라고도 했다.라고 나오며 동일인이고,경술년 1010년에 걸안(契丹)족 침입시 수성(守城)했고 임자년 1012년에는 여진(女眞)족이 침입했을때 격퇴시켰다고 나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자기편의 주소를 싣는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2544 

 

영역닫기영역열기조가기의 생애 및 활동사항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침입하여 서경을 공격할 때 분대어사(分臺御史)로서 그 방어에 종사하였다.이 때 동북면을 지키던 지채문(智蔡文)이 서경을 구원하러 왔으나 서경부유수 원종석(元宗奭) 등이 적에게 항복하려고 성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성문을 열어 지채문을 들어오게 하여 서경을 지켰다.

 

이듬해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고, 1012년 동여진(東女眞)이 청하(淸河)·영일(迎日)·장기(長鬐)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가 되어 강민첨(姜民瞻)·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등과 함께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解說文.1  /先人이 後人 비문쓴 미스테리는 연대착오에 있다.

창녕조씨 문중의 조자기(曺子奇,曺自奇 동일인:창녕조씨 족보 정해보 제 1권) 장수는

고려 현종(재위기간:서기 1009-1031년)때 사람으로 평장사였으며,1010년(경술년)걸안 군대가 침입하자 물리쳤으며,1012년(임자년)에는 여진족이 침입하자 물리쳤다고나온다. 현행 강릉유씨 족보상에 나타난 유전 도시조의 사망연대는 1122년으로써 비문을 쓴 사람이 한 100년정도 앞서 살다 가신 분이다.

 

이로써 비문을 받게 되는 강릉유씨 도시조님께서 1082년(고려 문종 36년) 한반도에 오셔서 중국연대로는 宋나라 신종 원풍 5년에 한반도에 8학사와 하께 동도해 오셨다는 현행 족보의 기재는 옳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강릉유씨 도시조(都始祖)님의 송나라 왕안석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다가 한반도로 건너 오셨다는 기술(記述)은 일단 부정(否定) 되고 만다.조자기님이 비문을 써 주신 상대방인 강릉유씨 시조의 동도해 오신 연대는 서기 1082년이 아니고 300년전인 신라시대 서기 782년도이기 때문이다

 

問.2 나라때 동래(東來)가  사실 아니라면 언제 왔을까?

그럼 송(宋)나라 신종조(神宗朝)때인 서기 1082년 왕안석(王安石)의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다가 8학사와 함께 한반도에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럼 언제 오셨다는 이야기 인가?

 

1994년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강릉유씨대동보 제 1권 10페이지 사진

 

解說文.2 / 唐나라 덕종(德宗)조 서기 782년 동래(東來)합니다.

현행 강릉유씨 대동보에는 위의 사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유전 도시조께서는 중국 송인종 황우 3년 즉 서기 1051년 4월 8일 태어나시어 한림학사 정헌대부로써 병부상서를 지내셨으며,고려 문종 36년 1082년 8월에 동료 8학사와 함께 한반도에 오셨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그런데 1902년도에 인원(仁源)祖께서 천신만고끝에 찾아 내셨던 유전 도시조님의 지석묘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위의 강릉유씨 대동보 사진을 보면 아들 견규(堅規)는 1096년 3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그런데 묘지석(墓誌石)의 기록은 건중병자(建中丙子)년 3월 15일에 아들 견규가 태어 났다고 나온다.족보의 기록이 착오인 것이다.

2012년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유맥(종보 제 4호) 제 53페이지 사진이다.

 

그런데 건중병자는 건중이라는 중국 당(唐)나라 덕종(德宗) 황제때의 연호로써 서기 780년이 건중원년(建中元年)이며 다음해인 서기 781년은 건중 2년 ,다시 다음해인 서기 782년은 건중 3년이며,다시 다음해인 서기 783년은 건중 4년이고,다음해인 서기 784년은 연호가 건중(建中)에서 흥원(興元)으로 바뀌고 ,또 다음해인 서기 785년은 그 연호가 흥원(興元)에서 다시 새로운 연호인 정원(貞元)으로 바뀌는데,우리의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는 이 중국 당나라 덕종황제 연호 건중(建中) 3년인 서기 782년도에 동료 8학사와 함께 당나라 조정을 떠나서 낯서고 물설은 한반도로 오신다.

 

이 동도년도가 서기 782년도인 것은 아들 견규(堅規)를 묘지명(墓誌銘)에서 건중병자(建中丙子) )  3월 15일 낳았노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건중병자(建中丙子)는 실제로는 그간 정원(貞元)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에서 덕종 황제는 바뀌지 않은체 연호만 정원으로 바뀌어 있어서 실제 그해의 연호는 정원이어서 위에서 건중병자(建中丙子) 3월 15일 이라고 한 것은 당년 연호로는 정원병자(貞元丙子)년 3월 15일이 된다.서기 796년으로써 위의 현행 강릉유씨 대동보에 나오는 견규(堅規)탄생 서기 1096년보다 꼭 5개 60갑자(甲子)인 300년이 소급되어 진다.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서기 1096년도에 아들 견규를 낳으며 이것은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서 말하는 서기 1082년 동도해 오셨다고 하는 연대와는 14년 차이(1096-1082=14년)가 난다.따라서 새로운 건중병자년 연대를 적용한 아들 견규탄생년도는 서기 796년도(丙子年)으로써 이에서 14년을 차감하면 도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한반도에 오신 연대가 되는 것이다.796-14=782년 즉 할아버지는 당나라 덕종조 연호 건중(建中) 3년에 여타 팔학사와 함께 한반도로 오시는 것이다.

 

 

도시조 할아버지께서 아들의 출생년도를 정원(貞元) 병자(丙子)년이라고 옳게 기술하지 못하고 건중(建中) 병자(丙子)년이라고 후세에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교통,통신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떠나온 조국의 연호가 떠나온 2년후 바뀌고 다시 또 1년후면 바뀌고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나 있었을까,

 

그러나 할아버지가 중국을 떠나온 년도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그리운 그 당나라 조정의 연도가 건중(建中) 3년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당나라 德宗朝 연대표를 아래에 실어 본다.

 

중국 唐 德宗朝 연호의 변동

서기 779년(乙未) 당 德宗 취임 신라 惠恭王 15年

서기 780년(庚申) 당 德宗 建中 1年 신라 宣德王 1年

서기 781년(辛酉) 당 德宗 建中 2年 신라 宣德王 2年

서기 782년(壬戌) 당 德宗 建中 3年 신라 宣德王 3年<劉荃始祖 한반도 오심>

서기 783년(癸亥) 당 德宗 建中 4年 신라 宣德王 4年

서기 784년(甲子) 당 德宗 興元 1年 신라 宣德王 5年

서기 785년(乙丑) 당 德宗 貞元 1年 신라 元聖王 1年

서기 786년(丙寅) 당 德宗 貞元 2年 신라 元聖王 2年

서기 787년(丁卯) 당 德宗 貞元 3年 신라 元聖王 3年

서기 788년(戊辰) 당 德宗 貞元 4年 신라 元聖王 4年

서기 789년(己巳) 당 德宗 貞元 5年 신라 元聖王 5年

서기 790년(庚午) 당 德宗 貞元 6年 신라 元聖王 6年

서기 791년(辛未) 당 德宗 貞元 7年 신라 元聖王 7年

서기 792년(壬申) 당 德宗 貞元 8年 신라 元聖王 8年

서기 793년(壬申) 당 德宗 貞元 9年 신라 元聖王 9年

서기 794년(甲戌) 당 德宗 貞元 10年 신라 元聖王 10年

서기 795년(乙亥) 당 德宗 貞元 11年 신라 元聖王 11年

서기 796년(丙子年) 唐 德宗 貞元 12年 신라 元聖王 12年<(丙子年) 三月十五日 長子堅規 生>

위의 연대표에 관한 설명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잠시 설명을 요한다.할아버지는 위에서 보면 당나라 덕종황제때 연호인  건중 3년에 한반도에 오신다.이 건중병자 3년에 오신 것의 산출근거는 이렇다.

 

그러나 그 1096년 병자년(丙子年) 견규(堅規) 탄생년도는 지석문(誌石文)에 나타난 건중병자(建中丙子)년 아들 견규 출생년도와 정확히 300년 차이가 나는 796년도입니다.(1096년-300년=796년) 이렇게 건중병자 아들 견규탄생(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堅规生)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問.3 창녕조씨 조자기님의 비석글씨 "建"字 뒤에는 마모되어..

그런데 문중의 족보를 읽다 보면 창녕조씨 조자기님으로 부터 받은 그 비석의 글자가 마모되어 건(建)자(字) 뒤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 안보이는 글자가  건염(建炎)의 뒷글자 염(炎)아닐까 했다고 하는 말이 보이는데 이 말들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解說文.3  /비석글씨 마모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해설하기 위해서는 조자기란 누구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마모되었다고 하는 이 어휘에 관하여 자세히 그 정리를 하고자 한다.마모 되었다고 하는 말은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나오는 각종 출판물 자료중에서 3가지가 혼동스럽게 나타나는데 3종류중에 建字뒤에 안보인다고 하는 것은 비석의 글씨도 아니고 또한 묘지석의 돌판에 세겨진 건중병자의 建字 뒤의 글자도 아닌 기계유씨집안에서 인원 할아버지께서 구해온 그 좀먹은 종이위의 글자 이야기이다 .혼돈 없기를 바란다.

 

첫째는 (1) 인원 할아버지가 우리 도시조 산소에서 천신만고끝에 1902년도에는 묘지석(墓地石)을 찾게 되며 이 묘지석은 당시의 영천 군청에 탁본 조회하여 지금의 영천군 당시 신녕군수(新寧郡守)로부터 도시조 상서공의 지석(誌石)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강릉유씨 대동보 1994년판 제 171페이지 상술 의거) 자손의 총회를 개최하여 묘를 사초하고 정대옥의 암장한 묘 두구는 관에 제소하여 제거하였다.

 

또 같은 강릉유씨 대동보 1994년판 제 215페이지에는 이제 조금 친해진 동네사람으로부터 "모처에 묻혀있는데 지금에도 그곳에 볼록나온 (凸型) 흔적이 있다."는 말이 부지중 튀어 나왔다.나는 이 말을 듣고도 못들은척 하였다가 그뒤 밤에 그곳을 채굴해본 즉 과연 周尺으로 二尺(60cm) 남짓 두께는 周尺으로 15cm 가량이며,지석(誌石)이 나왔는데 석면(石面)에 새겨있는 자획(字劃)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상기 석면에 새겨있는 자획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이 말씀은 1902년도 이 지석을 손수 발견하신 인원(仁源)祖께서 아버지 尙淳의 부탁을 받고 수십년을 그 지역을 드나들며 때로는 노자가 떨어지면 스스로 약재를 만들어 팔면서 동네인들의 환심을 사고 이 어려운 일생을 헌신하여 이 묘지석을 찾은 것이다.

 

결국 신녕군수의 확인으로 유전 도시조님의 묘지석임을 공식 확인 과정을 받게 되어 아래의 사진과 같은 완전한 글씨의 지석문을 우리가 볼 수있는 것이다.혹자는 돌판에 새겨진 글씨가 일부 없어졌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해서 이곳에 분명한 글에 출처를 올리니 아무런 착오없으시길  바라면서 다시 한번 건중병자  그 조상의 시원(始源)의 단초(端初)를 알게 되는 묘지문을 올립니다.. 

 

출처 1994년 강릉유씨 대종회 발간 강릉유씨대동보 제 216페이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리고 그 당시 힘들었던 인원(仁源)朝의 스스로 쓰신 글을 올립니다.

 

지석문을 찾은 지석(誌石)을 찾은 사적(事蹟)

http://blog.daum.net/rosy900/5667065

 

위의 주소는

 인원(仁源) 할아버지가 지석을 찾기위한 그 과정을  기록한 손수 남기신 글입니다.

 

 

째 (2)는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인원(仁源) 할아버지가 기계유씨 집안에 가서 찾아 오신 바로 죽간일집등의 좀먹고 남은 종이위의 글자 유집(遺集)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좀먹고 날라가 남은 시 135수와 기타 조자기가 썼다는 비문(碑文) 이 글이 일부 좀먹고 남은 부위만 보이고 "建"자 뒤에는 글씨가 안보이고 해서 건염의 "炎"字인가 했다고 인원 선조는 1994년판 강릉유씨대동보 제 277페이지에서 조자기(曺自奇)가 지은 신도비(神道碑) 가운데 시례가 이하는 전결(全缺)되었으며,연호난에는 다만 建字만 쓰여 있은즉 이는 건염인듯 싶으나 또한 명징(明徵:명확한 증거)이 없음으로 다만 建字만 그대로 두었고,.....

 

혹시 착각하기 쉬운 것은 지금 비석의 글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지금 이곳은 인원 할아버지가 기계유씨 집안에서 구하여 온 그 좀먹고 낡은 문집 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창녕조씨 조자기가 써서 비문을 써서 비를 세운 그 비석의  글자가 날라가서 建字뒤에 글씨가 안보인다는 그 이야기로 착각하면 안되며,지금 종이에 창녕조씨의 써세운 비석의 비문을 글자 종이위에 써서 기계유씨 집안 문집에 올려 있었는 그 종이위의 글이 조자기비문(曺自奇의 碑文 글씨)가  비석의 글을 베껴와서 문집에 보관해온 그 비석의 글 내용이  일부 建자뒤에 날라가 안 보인다는 종이위의 글자 이야기입니다.

 

하긴 이 바로 이 탁본해왔던 종이위의 글씨의 본체가 되는 그 신도비(神道碑)는 조자기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위조(僞造)된 비석(碑石)임을 아래에 상술해 놓았습니다.

 

 

問.4 언제부터 송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언제나 우리 강릉유씨 족보를 보면서 송나라/고려때 왔노라고 하는 이 기록이 도대체 언제부터 또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잘못된 기록이 시작되었을까 알기를  기다려  왔는데 "오늘 그 기록을 찾게 된" 것입니다.

 

解說文.4 고려 문종 36년 宋나라 동래(東來)한 유전 도시조님의 기록의 시작은 조자기 이름을 도용해 위조하여 세운 위조(僞造) 비석 이후이며 즉 이 위조 비석에서 언급하는 최후의 인물인 공민왕(恭愍王) 즉위년도 서기 1330년이후가 되겠습니다.  송나라는 고려시대의 중국측 왕조이므로 또 당시 팔학사와 함께 오신  중국의 정권 그 왕조인 송나라를 언급하게 되고 당시의 유명한  정치가,학자,문인등을 우리 족보에 함께 나타나게 하고 있읍니다.고려/송나라때 동래(東來)라고 잘못된 족보 기술(記述)이 시작됩니다.실제는 그보다 300년이나 빠른 중국의 당나라 한반도의 신라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래의 비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우리 강릉유씨 족보가 송나라/고려때 동도해온 사실로 기재되기 시작한 그 원점이 바로 이 위조된 즉 조자기 이름을 도용해 올린 공민왕까지 언급된 이 가짜 비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즉 이는 공민왕이 언급된 문장이어서 공민왕 즉위년도인 서기 1330년 이후에 쓰여진 비문입니다.1010년,1012년 전공(戰功)을 세우신 창녕조씨 조자기님이 쓰신 비문이 아님을 즉 이름을 도용한 위조(僞造)해 세운 비석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994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제258~259페이지 사진

 

위의 이 비석 비문이 바로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우리 강릉유씨 시조이신 유전 도시조께서 중국 당나라때 오시지 아니하고 중국 송나라때 왕안석의 청묘취식법을 반대하다가 한반도로 건너 오셨으며 고려 문종 36년 서기 1082년도라고 기술되게된 바로 그 비석,즉 평장사 창녕조씨 조자기의 명의를 도용해서 조작해 세운 비석의 비문입니다.

 

조자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려  현종(재위기간:서기 1009-1031년)때 사람으로 평장사였으며,1010년(경술년)걸안 군대가 침입하자 물리쳤으며,1012년(임자년)에는 여진족이 침입하자 물리쳤다고나온다.라고 나오는 서기 1010년,1012년 전후시대의 인물 아닙니까.그런데 이 비문에는 충렬왕(忠烈王:1236~1308년)도 나오고 공민왕(恭愍王:1330 ~ 1374년)도 나오지 않습니까.이 비석은 공민왕 보다 300년 정도 앞선 고려 현종때 인물 창녕조씨 평장사 조가기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허위로 비문을 세겨 새운 가짜 비석입니다.조자기라는 분이 神이 아닐텐데 200,또는 300년 후에나타날 임금님들의 이름까지도 미리 알고 이 비석에 글을 쓸 수있었다면 이 비석이 가짜이니고 무엇일까요.이 물음에 정확히 답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조자기 평장사가 강릉유씨 집안에 신도비문을 써서 세우게  된 그 비석은 잃어 버렸다고 나와 있구요.이 위작(僞作) 가짜 비석은 평장사(平章事) 조자기의 이름은 그냥 살려 놓고 있어 조자기가 썼노라고 하면서 1010년.1012년대 활동하던 조자기 장수의 이름으로 1200년대 충렬왕 1300년대 공민왕까지 언급하는 이 어울리지않는  비석인데 이를 이용해서 강릉유씨 족보의 宋나라/고려 문종 36년때 유전 도시조님이 오셨다고 지금까지 족보 기록이 많은 오류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神道碑文이라는 글자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있을 것입니다.

"在逸集舊本碑則失矣/逸集에 실려있는 舊本의 碑는 잃어 버렸다)라고

비석을 어떻게 잃어버리고 줍고 하는가,필히 위작으로 비석을 새로 세겨 조상님들을 미화 찬양하기에 마음이 급하셨던 선조님들께서 하신 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일집(逸集)에는 이 신도비문외에 구본(舊本)의 글이 있었다고 하며 그 구본(舊本)의 글이 새겨진 바로 그 비석은 잃어(失) 버렸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따라서 이 위조 비석의 탄생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원년(元年)인 서기 1330년 이후에 새겨져 새워진 것을 알 수있습니다.이는 우리 강릉유씨 족보에 유전 도시조께서 宋나라 동도설(東渡說)이 나타나게 된 최초의 비석글이 되는 것입니다.이 비문에 그 글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神道碑文

(在逸集舊本則失矣)

正憲大夫兵部尙書文襄公竹諫先生之墓

先生諱荃字原甫號竹諫姓劉氏彭城人高麗文宗時自中華竝七學士東渡朝鮮先生慨然有闢異廓如闡明新道之志其忠厚睿德爲一世卓冠焉至忠烈王朝 文襄公缺 恭愍王缺 大提學 朴宜中 大司成李文靖 大提學朴尙衷等八人 具疏曰文襄公劉荃 乃東方道學之倡缺 比古周召太公 猶可竝列 基在崇慰之道 尙闕俎豆之薦 亦豈非 缺    啓下特命禮官 賜祭建祠于開城府 又配享 崇義殿 配貞敬夫人隴西李氏 墓俱在今居陀郡北花枝洞繼良村後亥坐上下封 父諱采 金紫光祿大夫 祖諱迪 吏部尙書 曾祖諱宗 翰林 自先生 上系漢太祖 爲三十九代孫也子堅規 平章事 始封居陀君 其後子孫 或爲簪纓之族 或爲詩禮之家 惟宗派是錄曰以下缺

建缺

                                                                   平章事 夏城 曺自奇 謹誌

 

.

  상기 비문의 글이 글자 한자 틀림없이 이 공민왕이후 우리 강릉유씨 대종회의 각종문집은 물론 세원조(世源祖)께서 세기신 판각본(板刻本) 죽간일집 신도비문(神道碑文)에도 그대로 새겨져 있읍니다.충렬왕 공민왕이 언급된 그대로 충렬왕은 조자기 보다 한 200년 뒤에 나타날 사람이고, 공민왕은 한 300년이 지나야 태어날 사람인데도 이런 오류를 오롯이 간직한체  오늘도 우리의 문중 각종 문집에 그대로 실려 있읍니다. 이 허위비문을 가지고 고려때 송나라때 동도(東渡)해 오셨다고 하게 되며,각종 송나라 당대(當代) 大 문장가(文章家)와 학자(學者),정치가(政治家)들이 즉 왕안석도 등장하고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도 등장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릅니다. 

 

상기 비문은 당초 창녕조씨 조자기님 생전에 강릉유씨 집안에 써주신 그 신도비를 치우고 이제 고려 공민왕 이후(서기 1330년이후)에 平章事 夏城 曺自奇 謹誌는 그냥 두고 이제 그 내용을 일부 위조하여 새로운 비석을 세겨 세운 것입니다.조자기의 원 비석보다는 연대가 300년정도 이후입니다.비석의 글중 어느 부분을 어떻게 조작해서 썼는 가를 짚어 봅니다.

 

한문 글씨의 적색과 청색 표시한 부분이 대략 이 비문 허위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1.고려 문종때에 8학사 함께 동도해 왔노라고 그 동도 싯점을 일단 고려로 합니다.

2.고려 충렬왕(1236~1308, 재위 1274~1298, 1298~1308)때 문양공 시호를 받고

3.고려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때  大提學 朴宜中 大司成李文靖 大提學朴尙衷等八人(대재학 박의중,대사성 이문정,대재학 박상충등 여덟명이 소를 갖우어 문양공 유전은 동방 道學을 倡首(제일 먼저 제창한 분)하셨고,옛적 周公召公太公에게 비교하더라도 오히려 同列이 될만한데 그 높혀 위령(慰靈)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즉 제사...등등 찬양을 글을 써서 300년전에 조자기님이 우리 문중에 새겨준 실제의 비석의 형식을 일부 유지하면서 평장사 조자기 이름은 그냥 둔체로 새로운 비석인 허위 위조(僞造) 비석을 하나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문중의 족보에 이 문장들이 계속 이어집니다.족보에 보이는 劉氏彭城人高麗文宗時 이  표현은 현재의 우리 족보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않습니까

 

이렇게 우리 문중의 문집을 보다 보면 수없이 나타나는 고려 문종조 동래한 사실,기록과 고려 대재학 박의중,대사성 이문정,대제학 박상충....이러한 인물들의 등장은 바로 이 공민왕 이후(1330년 이후)에 위작(僞作)해 세운 비석에서 유래하는 틀린 史實인 것입니다.그래서 지금까지 이러한 맞지않는 문중의 역사가 전해져 오는 것이며,이로인해 연관되어 나가는 중국 송나라(宋, 960년 ~ 1279년) 우리 유전 도시조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우리 이 위작 비석(碑石)의 글을 통해서 알 수있습니다.이미 유전 도시조는 당 덕종 건중 3년(서기 782년 ) 팔학사와 동도해 오셨읍니다.

 

중국 宋나라는 宋朝(960年—1279年) 국가로써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가 오신 당나라

덕종조때인 서기 782년도에 오신 그 연대와는 무려 300년 간격의 후대인 것입니다.따라서 송나라에서 도시조 할아버지의 관련 사실을 찾아도 전혀 찾을 수없는 것입니다.

 

問.5  건중병자 묘지석의 글 외에 당나라 동도 사실 문건은?

위의 묘지석에서 말하는 건중병자년 아들 견규탄생 이 자료외에 일단,여덟분의 팔학사가 함께 한반도로 건너 오시면서 읊으신 귀한 시문(詩文) 한 수(首)씩이 전해집니다.그리고 우리 유전 도시조님께서 친히 남기신 시문집 죽간일집에 실려 있는 글에서 많은 자료들이 발견됩니다.

 

解說文.5 죽간일집 시문은 신라시대(新羅時代) 시문이다.

 

 東渡 八學士가 남긴 詩文을 보자.

팔학사는 바다를 건너 오시면서 각각 詩를 述懷했다.

 

1. 劉荃:波濤闊矣兮,舟楫利逝

    (파도는 넓음이여,뱃길이 편히 가도다)

2.林八及:八人浮海兮,桂棹蘭檣

   (여덟 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계수나무 돛대에 난초 삿 대로다.)

3.許董:吾徒東矣兮,可以免禍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다네.)

4.宋奎:接淅而去兮,謝暗投明

   (황망히 떠나 가노니,암흑은 가고 광명으로)

5.權之奇:賢士出東兮,竭誠盡忠

   (어진 선비 동쪽으로 가니,지극한 忠과 誠 모두 끝이라.)

6.孔德狩:見機而作兮,疎廣之徒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唐나라 임금들의 성씨는 이씨였다(李氏 皇朝)

 

宋나라 임금들의 성씨는 조씨였다(趙氏 皇朝)

 

7. 薛仁敬: 運衰兮 賢士被讒

    (잘 나가던 李氏朝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 를 당하는 도다.)

 

8.崔冱 ;老入海兮,殷道衰亡

   (李氏 시대는 저물고<老> 완전히 지니<入海>, 은도(殷道)도 쇠망하는도다.)

 

   위의 여덟분의 팔학자 중에서 아래의 두분 즉 설인경과 최호 이 분의 시문에서 자기들은 이씨 황제의 나라에서 왔노라고 밝히고 있다.

 

宋나라는 이씨가 아니고 조(趙)씨 나라였다.이(李)씨 황제의 나라는 당나라이다.

이미 5년전 저의 고증문에서 모두 언급되어 있는 사실들입니다.

 

 .6  죽간일집에는 어떠한 당나라 동도(東渡)사실이 있는가요?

 죽간일집에는 풍부한 신라/당나라때 동도 사실들이 매우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곳 열덟분의 동료 팔학사님들에게는 우리 유전 도시조님께서 시 한수씩을 지어 주신 분들로써 그 죽간일집 시문(詩文)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인 것입니다.

 

해설.6 죽간일집에는 풍부한 당나라/신라때 동래 사실들이 있습니다.

 

죽간일집 재 해석(竹諫逸集部分再解析)

죽간일집 시문들에 나타나는 당나라와 신라 관련 구절들

유전(劉荃) 시조님께서는 한반도에 오셔서 일생을 보내시면서 죽간일집(竹諫逸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을 남기셨다.그 시문집에는 각종 년대와 많은 지명들이 등장한다.그 년대와 지명들에서 많은 고증자료를 얻을 수있다.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퇴조(退朝)관련 시문들과 唐나라의 首都 장안(長安)을

기리키는 양경(兩京:長安과 洛陽),고급사신(高級使臣)인 성초고인(聖軺故人)의 경주 방문 ,장안(長安) 한식(寒食) 우금년(又今年)의 시문등 많은 자료가 죽간일집에 있다.

 

우선 성초고인(聖軺故人)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죽간 유전 도시조가 남기신 시문집은 2013년도에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천년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발행되는데,그 책 204페이지에는 봉상국 성초고인(逢上國星軺故人)이라는 시문(詩文)이 나온다.

 

逢上國星軺故人(봉상국성초고인)

逢上國星軺故人(봄꽃과 가을 달 보며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春花秋月幾相思(여기에서 마중할 줄은 본래 기약도 없었는데)

爲問皇朝聖天子(물어보세,황제의 조정 성스러운 천자께서는)

平安依舊袞裳垂(곤룡포 드리우고 여전히 평안히 계시온지?)

 

해석:상국(上國)에서 온 성초고인(星軺故人)을 만나다.라는 시문이다.당시 上國은 우리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중국이었으며 중국에서 온 성초고인을 만나면서 시문을 쓴 것이다.고인(故人)은 죽은 사람이거나 사귄지 오래된 벗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럼 성초(星軺)란 무엇인가.的解释:使者所乘的車(星軺란 사신이 탄 차)라고 나온다.그럼 이 사신은 어떤 신분인가을 알아 보자,우선 별성자 星이 한자는 우리는 하늘의 별을 주로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임금관련 한자로도 사용된다.星:事物與帝王有關的(제왕과 관련된 사물) 즉 별성자 星 이 한자는 임금관련 사물을 가리킨다고 한다.그럼 초(軺) 이글자는 무슨 뜻일까?,

 

제왕의 사자(使者)가 타는 궁중(宮中) 전용차를 가리킨다.이 제왕이 보낸 사절이 지금 경주에 오고 또 옛날 궁중에서 함께 근무하다 한반도에 온 친구를 경주에서 재회하게 되는 풍경이며,유전 도시조님께서는 그 옛 궁중 친구를 만나서 옛 임금의 안부를 묻고 있다.

이 중국 궁중에서 보낸 고위급 사절이 한반도 경주를 온 연대는 유전 도시조께서 한반도에 오신 서기 782년 오시고 2년후인 서기 784년도에 이 성초고인(星軺故人)이

경주(慶州)에 오는 것이다.출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죽간일집 제오정 보관 목판본 영인본 죽간선생일집부록권지이(竹諫先生逸集附錄卷之二) 제 4페이지

 

 

갑자춘(甲子年 春) 봄에 이 성초고인이 경주를 찾아 옵니다.(서기 784년도)

.

1082년 송나라에서 유전 도시조가 한반도에 오시고 2년후 갑자년 봄(甲子春) 즉 1084년 봄에 즉 송나라때 한반도의 경주에 이 성초고인(星軺故人)이 나타난 것이 아닌 것은 이 개성 고려 당시 송도로 가지않고 경주로 온 것외에도 아래에 열거할 수많은 송나라때 동도(東渡)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

퇴조(退朝) 관련 시문(詩文)들 을 살펴보자

위에서 중국 조정에서 보내온 고급사신(高位級使臣)이 성초(星軺)를 타고 당시 고려 수도인 개성(松都)로 가지않고 경주(慶州)로 온 이유는 유전 도시조가 온 년대가 고려조가 아닌 신라(新羅)시대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위에서 말한 바있다.

그럼 그 말은 옳았던 것인지를 검증키 위해서는 이어서 퇴조(退朝:궁중에서 퇴근)관련 시문들을 더 찾아 보면 알 수있는데 죽간일집에는 퇴조 관련 시문들이 많다.

2013년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천년의 향기 시문집에서

.

퇴조(退朝)관련  시문들

108페이지의 퇴조귀로여제공구호(退朝歸路與諸公口號)라는 시문

184페이지 화김한림퇴조시(和金翰林退朝詩)

198페이지의 퇴조후독부(退朝後獨賦)라는 시문,

 

만일 지금의 우리 족보에서 말하는 宋나라 동도(東渡) 맞다고 할려면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즉시 이 죽간일집에 나오는 退朝 이 단어를 해설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지석문(誌石文) 하나를 부정(否定)시켜 볼려고 한다고 해도 이 수많은 자료와 증거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유전 도시조님은 경주에 사셨으며,그곳에 사실때는 그곳에 궁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즉 신라시대이며 경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하처시양경(何處是兩京):양경(兩京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제 152페이지에는 귀재야기간천(歸第夜起看天:집으로 돌아와 밤에 일어나 하늘을 본다)라는 시문이 있다.이 시문의 마지막 끝에서 둘째줄에는

하처시양경(何處是兩京)이라는 귀절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양경(兩京) 즉 두개의 서울이란 즉 지금 양경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이 시문을 지은 유전 도시조님은 먼 타향에서 그 외로움을 달래며 옛 추억의 양경(兩京)을 그리면서 영탄(詠嘆:깊은 정회 시름겹게 읊음)하고 있는 구절이 나온다.그럼 이렇게 꿈에도 잊지 못할 그 양경(兩京)에 관하여 짚어 본다.

 

유방은 처음 세운 수도(首都)는 장안(長安)이 아니다.지금 산동성 조현(曹縣)부근인 정도( 定陶) 범수( 汜水)에서 한고조 6(BC 201) 2월 초 3일 새로운 등극식을 치루고 그곳을 수도로 정하지만 낙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긴다.

 

후에 장안(長安)으로 천도한다.이후 한나라때는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이 양경(兩京)이 된다.한나라 임금들은 이 두 수도를 드나들며 정무를 본다.

http://blog.daum.net/rosy900/5666844

 

長安寒食又今年

(올해도 또 장안에서 한식을 맞았나니).."천년향기"에서의 해석에 관하여

"천년의 향기"에서 해놓은 위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해석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長安에서 지내던 寒食을 올해도 맞다니!...회고시(懷古!)

위의 "長安" 지금의 西安으로써 당나라의 首都이다.

중국의 장안에서 맞던 그 한식을 지금 멀리 한반도 경주에서 맞네

宋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문이 아니다.

 

이 시문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이 외에도 죽간일집에는 많은 시문들이 신라 경주때의 시문임을 나태내고 있다

지난 3월 安東國學振興院을 방문했을때에 그곳 수석 연구원이신 林魯直 儒敎博物館長께서는 그곳에 소장중인 우리의 죽간일집 천년의 향기를 펼치시더니 이 시문은 신라시문이라고 스스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어찌나 신기한지 나의 염원하던 바를 이분이 스스로 밝혀 주시다니 아래에 그와 관련된 두개의 글 주소를 아래에 싣는다.

 

천년의 향기 발행에 앞서 소신발언이 있었다.

http://blog.daum.net/rosy900/5662788

 

영주 방산재를 찾아서/安東國學振興院 방문

http://blog.daum.net/rosy900/5666931

 

이날 신라시문(新羅詩文)이라고 이야기를 함께 들은 당시 참석자는 劉海日 어르신외에도 劉翼相,劉載欽,劉豊鍾 宗親 그리고 御位室 劉海昌종친회장과 劉慶相이 이 이야기를 함께듣고 있었다.신라 신문집이라고 林魯直 儒敎博物館長께서 말씀하셨다.

그럼 왜 강릉유씨 문중에서는 고려때 오셨다고 하고 있는가.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그냥 고려때 왕안석 청묘취식법 반대하다가 왔노라고 하기에는 왕안석이 재상을 그만둔 서기 1074년으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1082년도 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어서 정리되어야 한다.

 

問, 7 그럼 宋나라와 관련된 각종  사항들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 족보에는 송나라 신종조에 왕안석의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며,직소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7학사와 함께 동도해 오셨다고 나오며,또 왕안석외에도 당대의 송나라 유명인사들인 구양수 소동파 유원보 유집 유술 유기 그리고 구소수간 이러한 사항들은 결국 무엇인가.?

 

解說文.7 결론적으로 시대가 300년 오차가 난다.

결론적으로 이미 위에서 당나라때 오신것으로 고증되어지는 3가지 사항들 즉 건중병자년도 아들 견규탄생 즉 당나라 덕종조때 도시조 할아버지의 득남 기사가 기재된 지석문의 출토,그리고 당나라에서 오신 8학사의 시문에서 두분의 시에서 宋나라 趙씨 왕조에서 오지 않고 李씨 나라에서 왔다는 진술적 싯귀들,그리고 죽간 유전 시조님께서 친히 남기신 죽간일집 시문들에 나타나는 신라시대에 관한 퇴조와 관련된 시문들,

 

그리고 중국에 계실때에 고향을 그린 시문들 봉상국성초고인,하처시양경,객중한식 ,장안한식우금년 이러한 시문들에서 宋나라 개봉(開封) 궁전에서 오신게 아니고 중국  唐나라 궁중에서 오셨노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위의 왕안석도 청묘취식법도 위의 여러분의 宋나라 시인 정치가 이분들 시대적으로 완전히 다른 300년을 격한 시대인 만큼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다.

 

결국 고려 공민왕이후 조자기의 비문이 든 비석을 없 애고 허위로 그 이름을 유지하면서 세워 놓은 위조 비석에 기인해 부풀려진 한때의  옳지않은 기록쯤 될 것이며,찾아볼만한 어떠한 사유가 발생치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번 宋나라 언급되었던 각종 사항들을 한번 짚어 본다면 이렇다.

 

1):왕안석의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반도에 오셨다고 한다.

왕안석:熙宁二年1069),任参知政次年拜相主持变法因守旧派反对熙宁七年1074年)罢相。一年后,宋神宗再次起用,旋又罢相/

해석:희녕 2년(서기 1069년),참지정사에 임명되고,다음해 재상에 오른다.변법을 계속 주관하다.수구파 반대로 인하여,희녕 7년(서기 1074년)에 재상 자리를 물러난다.그리고 1년후에 송나라 신종은 그를 재차 기용하지만,바로 또 재상자리를 그만둔다.

.

위의 글은 중국 인터넷 왕안석 기사이다.해석하면,왕안석은 서기 1069년 즉 희녕 2년에 참지정사에 임명되고,다음해인 1070년에 재상이 되어 변법을 주관한다.수구파 반대로 1074년 즉 희녕 7년에 재상을 그만둔다.일년후에 송나라 신종은 재차 그를 기용하나 바로 또 그만둔다.이렇게 쓰여져 있다.

 

유전 도시조 한반도 오신 1082년도보다 무려 8년전인 1074년도에 왕안석은 이미 제상자리를 떠난다 .왕안석과 다투다가 한반도 오셨다는 이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이다.勿驚 8년전에 이미 제상자리를 떠난 사람과 무슨 다투고 하는가.!!

 

즉 왕안석은 실질적으로 서기 1074년도에 재상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우리 유전 도시조가 한반도에 오시기전에 왕안석의 청묘취식법에 반대하여 직소(直訴)하다가 동료 7학사와 한반도로 서기 1082년도에 건너 오셨다는 이론은 전혀 맞지를 않는다.왜냐하면,왕안석은 우리 유전 도시조가 서기 1082년도 한반도 오시기전 <이미 8년전에 재상을 그만두었는데> 어떻게 무슨 대립을 누구하고 하다가 뜻을 못펴고 오셨다는 말인가요,

 

2):우리 강릉유씨 각종 문집을 보다 보며는 송나라 유창(劉敞)이란 분의 호가 原甫라 해서 우리 도시조 유전(劉荃)의 字가 原甫라고 해서 중국 송나라 유창(劉敞)이분이 바로 우리 도시조 유전(劉荃)아닐까 하는 글을 많이 볼 수있다.

 

그런데 아니다.이분은 /刘敞(1019—1068)北宋史学家、经学家、散文家。字原父,一作原甫,临江新喻荻斜(今属江西樟树)。庆历六年与弟刘攽同科进士,以大理评事通判蔡州,后官至集贤院学士/

 

해석:유창 이분은 서기 1019-1068년간 중국 송나라 사람이며,경세가,산문가로써,字가 원부(原父)였는데,한편으로는 원보(原甫)라고도 했다.지금 강서성 장수시사람이고,경력 6년에 동생 유반(攽)과 동과진사가 되어,대리평사 통판채주였고,후에 집현전원학사까지 관직이 오른다.

 

즉 이분은 우리 도시조 유전(1051-1122년:현행 족보기록중심)보다도 빠른 1019-1068년간 분으로써 중국 송나라서 살다가 국땅에서 사망한 중국의 사학자,산문가였다.우리 도시조 유전( 劉荃)과 관련이 없는 분이다.혹시 이미 보시고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유창(劉敞) 즉 字原父,一作原甫/字를 원부(原父)와 원보(原甫) 이렇게 두개를 갖고 있었던 송나라의 학자에 대해서는 우리의 1994년판 강릉유씨대동보 수권(首卷) 제 278페이지에 보면 충북 괴산군 증평읍에 사시던 전창학씨 소장 구소수간집(歐蘇手簡集)에서 라는 글이 있으며 제목이 여유원보서한문(與劉原甫書翰文)이란 글이 올라 있다.

 

그 중국 송나라때 사람을 갖고 그의 字가 우리 도시조 유전(劉荃)님의 字가 비슷하다고 당시의 유명한 문장가 구양수와 소동파의 상호 주고 받은 편지글에 나오는 유창(劉敞)까지도 혹시나 이분이 아닐까 힘들게도 노력해오신 우리 조상들의 그 한 맺힌 염원을 알 수있다.유창은 1068년 중국땅에서 사망한다.

 

問. 8 그럼 어떻게 이문제를 처리 하면 좋을까요?

진실이  바로 최선의 정책이다

라는 이러한 글귀가 있듯이 그냥 옛시대에 지금같이 정보가 없던 시대에 족보를 처음 작성할때에 갑자 년대를 5갑자 착오 발생시켜 일어난 그리고 공민왕이후에 조자기 명의를 유지한체 위조한 비문을 새겨서 새로 비석을 세운후 이를 시작으로 많은 조상의 미화현상(美化現狀)이 누증(累增)되었고,또 중국의 宋나라쪽에 넘어가서는 이곳의 당대 유명인사들이 혹여 우리 유전 할아버지 아닐까하는 수많은 각종 설들로 넘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각종 매체를 통한 고증결과 300년 오차가 있었음이 발견되어 문중에서는 문중회의를 열고 고증문을 통과시켜 사실을 사실대로 각종 문중 문헌에 기재하고,현재의 우리 유전 도시조님께서 남기신 보물같은 죽간일집은 신라시대 문학으로 격상시키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한배를 타고 오신 여덟분의 동료 학사들 문중과는 그 동일한 년대,일자에 오신만큼 현재 각자 동도 년도를 달리 하고 있는 문중들의 의견 수렴과 유대관계도 새롭게 설정해 나가야 할것이다.

 

解說.8 족보의 오류를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는 없다.

잘못된 고려/송나라때 동도한 사실로 기록한 이 오류를 대종회와 문중에서는 하루빨리 건중병자의 묘지명(서기 796년 장자 견규탄생)의 기록에 따라 신라/당나라로 연대 300년 착오를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이는 그럼 300년간 열분의 선조가 공백이 생기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은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그것은 기록에 잘못된 문중역사 기록을 사실대로 기록해 두면 된다고 생각된다.

 

우리 문중역사에는 위조 비석도 있었고,이러한 잘못된 사실에 기인한 문중 족보 기록도 있었지만 고증에 의하여 바로 잡습니다.한줄의 글을 부가하면 완료 될 것이며,이후에 오는 후대에 정말 위조 비석을 세우는 선조가 있었는가 하면 800여년후 그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 잡은 이 시대를 살아간 우리 문중의 이 행위를 잊지않을 것입니다.정직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는 격언 그대로 입니다.잘못이 있으면 바로 고쳐 나갈 수있는 용기는 곧 개인이나 국가나 단체이건 크나큰 자산일 것입니다.

 

 

이글은 카톡방에 돌아 다니는 대전뿌리공원에 보낼 유씨대동종친회가 보낼 비석문안(碑石文案) 그 시안(試案)을 보고 제 2고증문을 작성 제출합니다.

그 카톡 글에는 여전히 왕안석 청묘취식법,고려 문종 36년이 등장하는 글입니다.

시안(試案)이므로 그것이 대종회 회의를 통과해서 잘못된 기록을 담은 비석으로 탄생할 리는 없겠지만 고려 공민왕때 허위 비석 하나만으로도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지 않은가요.현명하신 문중의 여러분께서 상기 고증문을 잘 읽어 보시고 저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강호제현 종친님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드립니다.叱正의 말씀도 또 高見의 말씀도 기다립니다.저의 메일 주소는 mail:rose900@daum.net입니다.

 

이 귀중한 족보 오류 고증문을 제출해도 접수조차 되지않는 이 어려움을 겪고 있읍니다.(2013.12.2일 제 1차 고증문 대종회 제출) 많은 지도와 부탁말씀을 전하면서 1차 2차 고증문의 주소를 이곳에 첨부합니다.

 

제 1차 고증문 주소 (2013.12.2일 방문제출)

제 2차 고증문 주소(2018.7. 26일 등기 우편물 발송)

 

 

 

                    2018년 7월 26일

                            劉        慶       相

 

 

 

                   劉   氏  大   同   宗     親     會

 

                            劉        鍾       植  회장 님 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