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씨 족보 유전(劉荃)시조의 동도(東渡) 년대 300년 착오에 관한 고증 Q&A 해설
강릉유씨 족보에 나타난 유전 도시조와 팔학사의 동천 시기는 서기 1082년 고려 문종 36년이며,중국 역사로는 宋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豊) 5년에 고려 문종때에 팔학사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온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러가지 고증자료에 의하여 300년 5개의 60갑자 착오가 발견됨으로써 지난 2013년 12월 2일 이미 강릉유씨 대종회에 고증문을 제출한 바 있다.
2013년 12월 2일 강릉유씨 대종회에 이미 제출었던 제 1차 고증문 보기
http://blog.daum.net/rosy900/5666614
따라서 강릉유씨 유전 도시조의 동도 시기는 고려문종 때가 아닌 신라 선덕왕 3년 같은 중국 역사로는 당(唐)나라 덕종(德宗)조 건중(建中)3년 서기 782년도에 동도해 온 사실로 올라간다.
問. 1 先人이 後人 비문(碑文)을 쓴 미스테리는 무엇인가
1010년대 활동하시던 창녕조씨 조자기(曺自奇/曺子奇 동일인)님은 100년후에 사망하실 유전(劉荃) 도시조님의 비문(碑文)을 썼다는데 이 미스테리는 무었인가?
2018.7월 12일 오전 10시 창녕조씨 문중 문자 멧세지 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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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 보면 "曺自奇 一云 子奇"라고 창녕조씨 정해보(1767년 목판본 발간)에 나오는데 曺自奇는 一云 子奇 /또는 曺子奇 라고도 했다.라고 나오며 같은 사람이고,경술년 1010년에 걸안(契丹)족 침입시 수성(守城)했고 임자년 1012년에는 여진(女眞)족이 침입했을때 격퇴시켰다고 나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자기편의 주소를 싣는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2544
解說文.1 /先人이 後人 비문쓴 미스테리는 연대착오에 있다.
창녕조씨 문중의 조자기(曺子奇,曺自奇 동일인:창녕조씨 족보 정해보 제 1권) 장수는
고려 현종(재위기간:서기 1009-1031년)때 사람으로 평장사였으며,1010년(경술년)걸안 군대가 침입하자 물리쳤으며,1012년(임자년)에는 여진족이 침입하자 물리쳤다고나온다. 현행 강릉유씨 족보상에 나타난 유전 도시조의 사망연대는 1122년으로써 비문을 쓴 사람이 한 100년정도 앞서 살다 가신 분이다.
이로써 비문을 받게 되는 강릉유씨 도시조님께서 1082년(고려 문종 36년) 한반도에 오셔서 중국연대로는 宋나라 신종 원풍 5년에 한반도에 8학사와 하께 동도해 오셨다는 현행 족보의 기재는 옳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강릉유씨 도시조(都始祖)님의 송나라 왕안석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다가 한반도로 건너 오셨다는 기술(記述)은 일단 부정(否定) 되고 만다.
問.2 宋나라때 동도(東渡)가 사실 아니라면 언제 왔을까?
그럼 송나라 신종조때인 서기 1082년 왕안석의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다가 8학사와 함께 한반도에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럼 언제 오셨다는 이야기 인가?
1994년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강릉유씨대동보 제 1권 10페이지 사진
解說文.2 / 唐나라 덕종(德宗)조 서기 782년 동도(東渡)합니다.
현행 강릉유씨 대동보에는 위의 사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유전 도시조께서는 중국 송인종 황우 3년 즉 서기 1051년 4월 8일 태어나시어 한림학사 정헌대부로써 병부상서를 지내셨으며,고려 문종 36년 1082년 8월에 동료 8학사와 함께 한반도에 오셨다고 기술하고 있다.
2012년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유맥(종보 제 4호) 53페이지 사진
그런데 1902년도에 인원(仁源)祖께서 천신만고끝에 찾아 내셨던 유전 도시조님의 지석묘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위의 강릉유씨 대동보 사진을 보면 아들 견규(堅規)는 1096년 3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그런데 묘지석(墓誌石)의 기록은 건중병자(建中丙子)년 3월 15일에 아들 견규가 태어 났다고 나온다.
그런데 건중병자는 건중이라는 중국 당(唐)나라 덕종(德宗) 황제때의 연호로써 서기 780년이 건중원년(建中元年)이며 다음해인 서기 781년은 건중 2년 ,다시 다음해인 서기 782년은 건중 3년이며,다시 다음해인 서기 783년은 건중 4년이고,다음해인 서기 784년은 연호가 건중(建中)에서 흥원(興元)으로 바뀌고 ,또 다음해인 서기 785년은 그 연호가 흥원(興元)에서 다시 새로운 연호인 정원(貞元)으로 바뀌는데,우리의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는 이 중국 당나라 덕종황제 연호 건중(建中) 3년인 서기 782년도에 동료 8학사와 함께 당나라 조정을 떠나서 낯서고 물설은 한반도로 오신다.
이 동도년도가 서기 782년도인 것은 아들 견규(堅規)를 묘지명(墓誌銘)에서 건중병자(建中丙子) ) 3월 15일 낳았노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건중병자(建中丙子)는 실제로는 그간 정원(貞元)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에서 덕종 황제는 바뀌지 않은체 연호만 정원으로 바뀌어 있어서 실제 그해의 연호는 정원이어서 위에서 건중병자(建中丙子) 3월 15일 이라고 한 것은 당년 연호로는 정원병자(貞元丙子)년 3월 15일이 된다.서기 796년으로써 위의 현행 강릉유씨 대동보에 나오는 견규(堅規)탄생 서기 1096년보다 꼭 5개 60갑자(甲子)인 300년이 소급되어 진다.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서기 1096년도에 아들 견규를 낳으며 이것은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서 말하는 서기 1082년 동도해 오셨다고 하는 연대와는 14년 차이(1096-1082=14년)가 난다.따라서 새로운 건중병자년 연대를 적용한 아들 견규탄생년도는 서기 796년도(丙子年)으로써 이에서 14년을 차감하면 도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한반도에 오신 연대가 되는 것이다.796-14=782년 즉 할아버지는 당나라 덕종조 연호 건중(建中) 3년에 여타 팔학사와 함께 한반도로 오시는 것이다.
도시조 할아버지께서 아들의 난 해를 정원(貞元) 병자(丙子)년이라고 옳게 기술하지 못하고 건중(建中) 병자(丙子)년이라고 후세에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교통,통신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떠나온 조국의 연호가 떠나온 2년후 바뀌고 다시 또 1년후면 바뀌고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나 있었을까,
그러나 할아버지가 중국을 떠나온 년도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그리운 그 당나라 조정의 연도가 건중(建中) 3년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당나라 德宗朝 연대표를 아래에 실어 본다.
중국 唐 德宗朝 연호의 변동
서기 779년(乙未) 당 德宗 취임 신라 惠恭王 15年
서기 780년(庚申) 당 德宗 建中 1年 신라 宣德王 1年
서기 781년(辛酉) 당 德宗 建中 2年 신라 宣德王 2年
서기 782년(壬戌) 당 德宗 建中 3年 신라 宣德王 3年<劉荃始祖 한반도 오심>
서기 783년(癸亥) 당 德宗 建中 4年 신라 宣德王 4年
서기 784년(甲子) 당 德宗 興元 1年 신라 宣德王 5年
서기 785년(乙丑) 당 德宗 貞元 1年 신라 元聖王 1年
서기 786년(丙寅) 당 德宗 貞元 2年 신라 元聖王 2年
서기 787년(丁卯) 당 德宗 貞元 3年 신라 元聖王 3年
서기 788년(戊辰) 당 德宗 貞元 4年 신라 元聖王 4年
서기 789년(己巳) 당 德宗 貞元 5年 신라 元聖王 5年
서기 790년(庚午) 당 德宗 貞元 6年 신라 元聖王 6年
서기 791년(辛未) 당 德宗 貞元 7年 신라 元聖王 7年
서기 792년(壬申) 당 德宗 貞元 8年 신라 元聖王 8年
서기 793년(壬申) 당 德宗 貞元 9年 신라 元聖王 9年
서기 794년(甲戌) 당 德宗 貞元 10年 신라 元聖王 10年
서기 795년(乙亥) 당 德宗 貞元 11年 신라 元聖王 11年
서기 796년(丙子年) 唐 德宗 貞元 12年 신라 元聖王 12年<(丙子年) 三月十五日 長子堅規 生>
위의 연대표에서 한반도에 도시조님의 오신 년도 782년은 현행족보의 1082년도 동도년도에서 300년을 소급한 즉 1082-300=782년 이렇게 계산된 것입니다.처음 족보 설정시 5개 갑자를 잘못 짚어서 일어난 현상이지만,
그러나 그 1096년 병자년(丙子年) 견규(堅規) 탄생년도는 지석문(誌石文)에 나타난 건중병자(建中丙子)년 아들 견규 출생년도와 정확히 300년 차이가 나는 796년도입니다.(1096년-300년=796년) 이렇게 건중병자 아들 견규탄생(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堅规生)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問.3 창녕조씨 조자기님의 비석글씨 "建"字 뒤에는 마모되어..
그런데 문중의 족보를 읽다 보면 창녕조씨 조자기님으로 부터 받은 그 비석의 글자가 마모되어 건(建)자(字) 뒤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 안보이는 글자가 건염(建炎)의 뒷글자 염(炎)아닐까 했다고 하는 말이 보이는데 이 말들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解說文.3 /비석글씨 마모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해설하기 위해서는 조자기란 누구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마모되었다고 하는 이 어휘에 관하여 자세히 그 정리를 하고자 한다.마모 되었다고 하는 말은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나오는 각종 출판물 자료중에서 3가지가 혼동스럽게 나타나는데
첫째는 (1) 인원 할아버지가 우리 도시조 산소에서 천신만고끝에 1902년도에는 묘지석(墓地石)을 찾게 되며 이 묘지석은 당시의 영천 군청에 탁본 조회하여 지금의 영천군 당시 신녕군수(新寧郡守)로부터 도시조 상서공의 지석(誌石)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강릉유씨 대동보 1994년판 제 171페이지 상술 의거) 자손의 총회를 개최하여 묘를 사초하고 정대옥의 암장한 묘 두구는 관에 제소하여 제거하였다.
또 같은 강릉유씨 대동보 1994년판 제 215페이지에는 이제 조금 친해진 동네사람으로부터 "모처에 묻혀있는데 지금에도 그곳에 볼록나온 (凸型) 흔적이 있다."는 말이 부지중 튀어 나왔다.나는 이 말을 듣고도 못들은척 하였다가 그뒤 밤에 그곳을 채굴해본 즉 과연 周尺으로 二尺(60cm) 남짓 두께는 周尺으로 15cm 가량이며,지석(誌石)이 나왔는데 석면에 새겨있는 자획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상기 석면에 새겨있는 자획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이 말씀은 1902년도 이 지석을 손수 발견하신 아버지 尙淳의 부탁을 받고 수십년을 그 지역을 드나들며 때로는 노자가 떨어지면 스스로 약재를 만들어 팔면서 동네인들의 환심을 사고 이 어려운 일생을 헌신하여 이 묘지석을 찾은 것이다.결국 신녕군수의 확인으로 유전 도시조님의 묘지석임을 공식 확인 과정을 받게 되어 아래의 사진과 같은 완전한 글씨의 지석문을 우리가 볼 수있는 것이다.혹자는 돌판에 새겨진 글씨가 일부 없어졌는 것처럼 생각되는 듯해서 이곳에 분명한 글에 출처를 올리니 아무런 착오없으시길 바라면서
다시 한번 건중병자 그 조상의 시원(始源)의 단초(端初)를 알게 되는 묘지문을 올립니다.. 출처 1994년 강릉유씨 대종회 발간 강릉유씨대동보 제 216페이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리고 그 당시 힘들었던 인원(仁源)朝의 스스로 쓰신 글을 올립니다.
지석문을 찾은 지석(誌石)을 찾은 사적(事蹟)
http://blog.daum.net/rosy900/5667065
상기 주소는 인원(仁源) 할아버지가 지석을 찾기위한 그 과정을 기록한 손수 남기신 글입니다.
둘째 (2)는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인원(仁源) 할아버지가 기계유씨 집안에 가서 찾아 오신 바로 죽간일집등의 좀먹고 남은 그 유집(遺集)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좀먹고 날라가 남은 시 135수와 기타 조자기가 썼다는 비문(碑文) 이글이 일부 좀먹고 남은 부위만 보이고 "建"자 뒤에는 글씨가 안보이고 해서 건염의 "炎"字인가 했다고 인원 선조는 1994년판 강릉유씨대동보 제 277페이지에서 조가기(曺自奇)가 지은 신도비(神道碑) 가운데 시례가 이하는 전결(全缺)되었으며,연호난에는 다만 建字만 쓰여 있은즉 이는 건염인듯 싶으나 또한 명징(明徵:명확한 증거)이 없음으로 다만 建字만 그대로 두었고,.....
혹시 착각하기 쉬운 것은 지금 비석의 글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지금 이곳은 인원 할아버지가 기계유씨 집안에서 구하여 온 그 좀먹고 낡은 문집 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창녕조씨 조자기가 써서 비문을 써서 비를 세운 그 비석의 글자가 날라가서 建字뒤에 글씨가 안보인다는 그 이야기로 착각하면 안되며,지금 종이에 창녕조씨의 써세운 비석의 비문을 글자 종이위에 써서 기계유씨 집안 문집에 올려 있는 그 종이위의 글이 즉 비석의 글을 베껴와서 문집에 보관해온 그 비석의 글 내용이 일부 건자뒤에 날라가 안 보인다는 종이위의 글자 이야기입니다.
건자뒤의 안보이는 그 글자는 지석묘의 건중병자뒤의 글자도 아니며 조자기님의 그 비석위의 글자가 마모된 것도 아닌 기계유씨집안 좀먹은 종이위의 조자기 비문 탁본 문서글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강릉유씨가 宋나라때 왔다고 하는 바로 그 문제의 비석에 관한 글이 바로 아래 이어집니다.이 고증문의 가장 핵심 사항인 그 비석에서 나옵니다.
問.4 언제부터 송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언제나 우리 강릉유씨 족보를 보면서 송나라/고려때 왔노라고 하는 이 기록이 도대체 언제부터 또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잘못된 기록이 시작되었을까 알기를 소망해 왔는데 오늘 그 기록을 찾게 되었다.
解說文.4 날조(捏造)된 가짜 비석을 찾아 내다.
아래의 비석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우리 강릉유씨 족보가 송나라/고려때 동도해온 사실로 기재되기 시작한 그 원점이 바로 이 날조된 즉 조자기 이름을 도용해 올린 공민왕까지 언급된 이 가짜 비석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1994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제258~259페이지 사진
위의 이 비석 비문이 바로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우리 강릉유씨 시조이신 유전 도시조께서 중국 당나라때 오시지 아니하고 중국 송나라때 왕안석의 청묘취식법을 반대하다가 한반도로 건너 오셨으며 고려 문종 36년 서기 1082년도라고 기술되게된 바로 그 비석,즉 평장사 창녕조씨 조자기의 명의를 도용해서 조작해 세운 비석의 비문입니다.
조자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려 고려 현종(재위기간:서기 1009-1031년)때 사람으로 평장사였으며,1010년(경술년)걸안 군대가 침입하자 물리쳤으며,1012년(임자년)에는 여진족이 침입하자 물리쳤다고나온다.라고 나오는 서기 1010년,1012년 전후시대의 인물 아닙니까.그런데 이 비문에는 충렬왕(忠烈王:1236~1308년)도 나오고 공민왕(恭愍王:1330 ~ 1374년)도 나오지 않습니까.이 비석은 공민왕 보다 300년 정도 앞선 고려 현종때 인물 창녕조씨 평장사 조가기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허위로 비문을 세겨 새운 가짜 비석입니다.
그리고 정말 조자기 평장사가 강릉유씨 집안에 신도비문을 써서 세우게 된 그 비석은 잃어 버렸다고 나와 있구요.이 위작 가짜 비석은 평장사 조자기의 이름은 그냥 살려 놓고 있어 조자기가 썼노라고 하면서 1010년.1012년대 활동하던 조자기 장수의 이름으로 1200년대 충렬왕 1300년대 공민왕까지 언급하는 이 어리석은 짓을 한 비석인데 이를 이용해서 강릉유씨 족보의 宋나라/고려 문종 36년때 유전 도시조님이 오셨다고 지금까지 족보 기록이 많은 오류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神道碑文이라는 글자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있을 것입니다.
"在逸集舊本碑則失矣/逸集에 실려있는 舊本의 碑는 잃어<失> 버렸다)
일집에는 이 신도비문외에 구본(舊本)의 글이 있었다고 하며 그 구본(舊本)의 글이 새겨진 바로 그 비석은 잃어(失) 버렸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따라서 이 가짜 비석의 탄생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원년(元年)인 서기 1330년 이후에 새겨져 새워진 것을 알 수있습니다.이는 우리 강릉유씨 족보에 유전 도시조께서 宋나라 동도설(東渡說)이 나타나게 된 최초의 싯점이 되는 것입니다.이 비문에 그 글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神道碑文
(在逸集舊本則失矣)
正憲大夫兵部尙書文襄公竹諫先生之墓
先生諱荃字原甫號竹諫姓劉氏彭城人高麗文宗時自中華竝七學士東渡朝鮮先生慨然有闢異廓如闡明新道之志其忠厚睿德爲一世卓冠焉至忠烈王朝 諡贈文襄公缺 恭愍王缺 大提學 朴宜中 大司成李文靖 大提學朴尙衷等八人 具疏曰文襄公劉荃 乃東方道學之倡缺 比古周召太公 猶可竝列 基在崇慰之道 尙闕俎豆之薦 亦豈非 缺 啓下特命禮官 賜祭建祠于開城府 又配享 崇義殿 配貞敬夫人隴西李氏 墓俱在今居陀郡北花枝洞繼良村後亥坐上下封 父諱采 金紫光祿大夫 祖諱迪 吏部尙書 曾祖諱宗 翰林 自先生 上系漢太祖 爲三十九代孫也子堅規 平章事 始封居陀君 其後子孫 或爲簪纓之族 或爲詩禮之家 惟宗派是錄曰以下缺
建缺
平章事 夏城 曺自奇 謹誌
상기 비문은 당초 창녕조씨 조자기님 생전에 강릉유씨 집안에 써주신 그 신도비를 치우고 이제 고려 공민왕 이후(서기 1330년이후)에 平章事 夏城 曺自奇 謹誌는 그냥 두고 이제 그 내용을 일부 날조하여 새로운 비석을 세겨 세운 것입니다.조자기의 원 비석보다는 연대가 300년정도 이후입니다.비석의 글중 어느 부분을 어떻게 조작해서 썼는 가를 짚어 봅니다.
글씨의 적색과 청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대략 이 비문조작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1.고려 문종때에 8학사 함께 동도해 왔노라고 그 동도 싯점을 일단 고려로 합니다.
2.고려 충렬왕(1236~1308, 재위 1274~1298, 1298~1308)때 문양공 시호를 받고
3.고려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때 大提學 朴宜中 大司成李文靖 大提學朴尙衷等八人(대재학 박의중,대사성 이문정,대재학 박상충등 여덟명이 소를 갖우어 문양공 유전은 동방 道學을 倡首(제일 먼저 제창한 분)하셨고,옛적 周公召公太公에게 비교하더라도 오히려 同列이 될만한데 그 높혀 위령(慰靈)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즉 제사...등등 찬양을 글을 써서 300년전에 조자기님이 우리 문중에 새겨준 실제의 비석을 위작을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문중의 족보에 이 문장들이 계속 이어집니다.족보에 보이는 劉氏彭城人高麗文宗時 이 표현은 현재의 우리 족보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문중의 문집을 보다 보면 수없이 나타나는 고려 문종조 동래한 사실,기록과 고려 대재학 박의중,대사성 이문정,대제학 박상충....이러한 인물들의 등장은 바로 이 공민왕 이후(1330년 이후)에 위작(僞作)해 세운 비석에서 유래하는 틀린 史實인 것입니다.그래서 지금까지 이러한 맞지않는 문중의 역사가 전해져 오는 것이며,이로인해 연관되어 나가는 중국 송나라(宋, 960년 ~ 1279년
송나라와 우리 유전 도시조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우리 이 위작 비석(碑石)의 글을 통해서 알 수있습니다.이미 유전 도시조는 당 덕종 건중 3년(서기 782년 ) 팔학사와 동도해 오십니다.
중국 宋나라는 宋朝(960年—1279年) 국가로써 도시조 유전 할아버지가 오신 당나라
덕종조때인 서기 782년도에 오신 그 연대와는 무려 300년 간격의 후대인 것입니다.따라서 송나라에서 도시조 할아버지의 관련 사실을 찾아도 전혀 찾을 수없는 것입니다.
問.5 건중병자 묘지석의 글 외에 당나라 동도 사실 문건은?
위의 묘지석에서 말하는 건중병자년 아들 견규탄생 이 자료외에 일단,여덟분의 팔학사가 함께 한반도로 건너 오시면서 읊으신 귀한 시문(詩文) 한 수(首)씩이 전해집니다.그리고 우리 유전 도시조님께서 친히 남기신 시문집 죽간일집에 실려 있는 글에서 많은 자료들이 발견됩니다.
解說文.5 죽간일집 시문은 신라시대(新羅時代) 시문이다.
東渡 八學士가 남긴 詩文을 보자.
팔학사는 바다를 건너 오시면서 각각 詩를 述懷했다.
1. 劉荃:波濤闊矣兮,舟楫利逝
(파도는 넓음이여,뱃길이 편히 가도다)
2.林八及:八人浮海兮,桂棹蘭檣
(여덟 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계수나무 돛대에 난초 삿 대로다.)
3.許董:吾徒東矣兮,可以免禍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할 수 있다네.)
4.宋奎:接淅而去兮,謝暗投明
(황망히 떠나 가노니,암흑은 가고 광명으로)
5.權之奇:賢士出東兮,竭誠盡忠
(어진 선비 동쪽으로 가니,지극한 忠과 誠 모두 끝이라.)
6.孔德狩:見機而作兮,疎廣之徒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唐나라 李氏 皇朝
宋나라 趙氏 皇朝
7. 薛仁敬: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잘 나가던 李氏朝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 를 당하는 도다.)
8.崔冱 ;李老入海兮,殷道衰亡
(李氏 시대는 저물고<老> 완전히 지니<入海>, 은도(殷道)도 쇠망하는도다.)
위의 여덟분의 팔학자 중에서 아래의 두분 즉 설인경과 최호 이 분의 시문에서 자기들은 이씨 황제의 나라에서 왔노라고 밝히고 있다.
宋나라는 이씨가 아니고 조(趙)씨 나라였다.이(李)씨 황제의 나라는 당나라이다.
이미 5년전 저의 고증문에서 모두 언급되어 있는 사실들입니다.
문.6 그러면 죽간일집에는 어떠한 당나라 동도(東渡) 사실이 있는가요?
죽간일집에는 풍부한 신라/당나라때 동도 사실들이 매우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곳 열덟분의 동료 팔학사님들에게는 우리 유전 도시조님께서 시 한수씩을 지어 주신 분들로써 그 죽간일집 시문(詩文)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인 것입니다.
해설.6 죽간일집에 나타나는 풍부한 당나라/신라때 동도 사실들이 있습니다.
죽간일집 재 해석(竹諫逸集部分再解析)
죽간일집 시문들에 나타나는 당나라와 신라 관련 구절들
유전(劉荃) 시조님께서는 한반도에 오셔서 일생을 보내시면서 죽간일집(竹諫逸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을 남기셨다.그 시문집에는 각종 년대와 많은 지명들이 등장한다.그 년대와 지명들에서 많은 고증자료를 얻을 수있다.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퇴조(退朝)관련 시문들과 唐나라의 首都 장안(長安)을
기리키는 양경(兩京:長安과 洛陽),고급사신(高級使臣)인 성초고인(聖軺故人)의 경주 방문 ,장안(長安) 한식(寒食) 우금년(又今年)의 시문등 많은 자료가 죽간일집에 있다.
우선 성초고인(聖軺故人)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죽간 유전 도시조가 남기신 시문집은 2013년도에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천년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발행되는데,204페이지에는 봉상국 성초고인(逢上國星軺故人)이라는 시문(詩文)이 나온다.
逢上國星軺故人(봉상국성초고인)
逢上國星軺故人(봄꽃과 가을 달 보며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春花秋月幾相思(여기에서 마중할 줄은 본래 기약도 없었는데)
爲問皇朝聖天子(물어보세,황제의 조정 성스러운 천자께서는)
平安依舊袞裳垂(곤룡포 드리우고 여전히 평안히 계시온지?)
해석:상국(上國)에서 온 성초고인(星軺故人)을 만나다.라는 시문이다.당시 上國은 우리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중국이었으며 중국에서 온 성초고인을 만나면서 시물을 쓴 것이다.고인(故人)은 죽은 사람이거나 사귄지 오래된 벗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럼 성초(星軺)란 무엇인가.星的解释:使者所乘的車(星軺란 사신이 탄 차)라고 나온다.그럼 이 사신은 어떤 신분인가을 알아 보자,우선 별성자 星이 한자는 우리는 하늘의 별을 주로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임금관련 한자로 사용된다.星:事物與帝王有關的(제왕과 관련된 사물) 즉 별성자 星 이 한자는 임금관련 사물을 가리킨다고 한다.그럼 초(軺) 이글자는 무슨 뜻일까?,
제왕의 사자(使者)가 타는 궁중(宮中) 전용차를 가리킨다.이 제왕이 보낸 사절이 지금 경주에 오고 또 옛날 궁중에서 함께 근무하다 한반도에 온 친구를 경주에서 재회하게 되는 풍경이며,유전 도시조님께서는 그 옛 궁중 친구를 만나서 옛 임금의 안부를 묻고 있다.
이 중국 궁중에서 보낸 고위급 사절이 한반도 경주를 온 연대는 유전 도시조께서 한반도에 오신 서기 782년 오시고 2년후인 서기 784년도에 이 성초고인(星軺故人)이
경주에 오는 것이다.출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죽간일집 제오정 보관 목판본 영인본 죽간선생일집부록권지이(竹諫先生逸集附錄卷之二) 제 4페이지
갑자춘(甲子年 春) 봄에 이 성초고인이 경주를 찾아 옵니다.(서기 784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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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년 송나라에서 유전 도시조가 한반도에 오시고 2년후 갑자년 봄(甲子春) 즉 1084년 봄에 즉 송나라때 한반도의 경주에 이 성초고인(星軺故人)이 나타난 것이 아닌 것은 이 개성 고려 당시 송도로 가지않고 경주로 온 것외에도 아래에 열거할 수많은 송나라때 동도 사실이 부정(否定)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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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조(退朝) 관련 시문(詩文)들 을 살펴보자
위에서 중국 조정에서 보내온 고급사신(高位級使臣)이 성초(星軺)를 타고 당시 고려 수도인 개성(松都)로 가지않고 경주(慶州)로 온 이유는 유전 도시조가 온 년대가 고려조가 아닌 신라(新羅)시대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위에서 말한 바있다.
그럼 그 말은 옳았던 것인지를 검증키 위해서는 이어서 퇴조(退朝:궁중에서 퇴근)관련 시문들을 더 찾아 보면 알 수있는데 죽간일집에는 퇴조 관련 시문들이 많다.
2013년도 강릉유씨 대종회 발행 천년의 향기 시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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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조(退朝)관련 시문들
108페이지의 퇴조귀로여제공구호(退朝歸路與諸公口號)라는 시문
184페이지 화김한림퇴조시(和金翰林退朝詩)
198페이지의 퇴조후독부(退朝後獨賦)라는 시문,
만일 지금의 우리 족보에서 말하는 宋나라 동도(東渡) 맞다고 할려면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즉시 이 죽간일집에 나오는 退朝 이 단어를 해설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지석문(誌石文) 하나를 부정(否定)시켜 볼려고 한다고 해도 이 수많은 자료와 증거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유전 도시조님은 경주에 사셨으며,그곳에 사실때는 그곳에 궁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즉 신라시대이며 경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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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처시양경(何處是兩京):양경(兩京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 제 152페이지에는 귀재야기간천(歸第夜起看天:집으로 돌아와 밤에 일어나 하늘을 본다)라는 시문이 있다.이 시문의 마지막 끝에서 둘째줄에는
하처시양경(何處是兩京)이라는 귀절이 나온다.여기서 말하는 양경(兩京) 즉 두개의 서울이란 즉 지금 양경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이 시문을 지은 유전 도시조님은 먼 타향에서 그 외로움을 달래며 옛 추억의 양경(兩京)을 그리면서 영탄(詠嘆:깊은
長安寒食又今年
(올해도 또 장안에서 한식을 맞았나니).."천년향기"에서의 해석에 관하여
"천년의 향기"에서 해놓은 위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해석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長安에서 지내던 寒食을 올해도 맞는구나!...회고시(懷古!)
위의 "長安" 지금의 西安으로써 당나라의 首都이다.
宋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문이 아니다.
이 시문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이 외에도 죽간일집에는 많은 시문들이 신라 경주때의 시문임을 나태내고 있다
지난 3월 安東國學振興院을 방문했을때에 그곳 수석 연구원이신 林魯直 儒敎博物館長께서는 그곳에 소장중인 우리의 죽간일집 천년의 향기를 펼치시더니 이 시문은 신라시문이라고 스스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어찌나 신기한지 나의 염원하던 바를 이분이 스스로 밝혀 주시다니 아래에 그와 관련된 두개의 글 주소를 아래에 싣는다.
천년의 향기 발행에 앞서 소신발언이 있었다.(나의 발언)
http://blog.daum.net/rosy900/5662788
영주 방산재를 찾아서/安東國學振興院 방문
http://blog.daum.net/rosy900/5666931
이날 신라시문(新羅詩文)이라고 이야기를 함께 들은 당시 참석자는 劉海日 어르신외에도 劉翼相,劉載欽,劉豊鍾 宗親 그리고 御位室 劉海昌종친회장과 劉慶相이 이 이야기를 함께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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