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간일집(竹諫逸集) 목각판(木刻板) 원류(源流)를
찾아서!(유경상/劉慶相)
안동국학진흥원 장판각(藏板閣)에서 수장(收藏) 죽간일집 목판 3장을 나란히 펴놓은 모습
영덕(盈德) 재오정(霽梧亭) 죽간일집(竹諫逸集)은 1903년 경주 기계유씨(杞溪兪氏) 집안에서 세원(世源) 선조에 의하여 발견된 후 1911년에 판각(板刻)되고 1914년에는 총독부 인증을 필한다.비로소 이제 탁본하여 출력이 가능케 허가된 것이다.
이 죽간일집 목각판은 그후 경북 영덕군 달산면 인곡리에 소재한 재오정(霽梧亭)에 보존된다.그후 100여년이 지난 2016년도에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에 위치한 목각판 전문 장판각(藏板閣)이 있는 韩国国学振興院에 옮겨 수장(收藏)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55매중에서 53장이 입고되고 종손 유태호 1장 보관과 강릉유씨 대종회 1장 보관을 제외한 숫자이다.이 나머지 2장의 재차 입고는 2023.6.27일 입고됨을써 총 55매 입고가 끝나게 된다.이 2023.6.27일 입고행사에는 강릉유씨 문중에서 10명이 참여하여 장판각에 보존된 영주본을 비롯한 그간 입고한 판각들의 보존관리 상태를 살펴 보았다.참석인원은 유영문(수원) 유경상(서울) 유태호(포항) 유풍종(대전) 유재일(논산) 유재흠(공주) 유해창(영주 이산면) 유해종(칠곡) 유희종(칠곡) 유영수(원주) 10명이었다.
2023.6.27일 제오정본 미 입고분 2매 추가 입고행사 총 55매 완전입고 완료
또 하나의 죽간일집 목각판(木刻板)은 1939년 영주(榮州)지역에서 판각(板刻)되어 경북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어위실(御位室)에 위치한 칠자정(七自亭) 구내에 별도 지어진 자그마한 수장고 건물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5년도에 위에서 언급한 안동에 위치한 韓國國学振興院에 입고되어 오늘에 이른다.기탁자는 유해창(劉海昌/永자 돌림)종친이며,119장을 기탁했지만 영주본도 제오정본과 같이 죽간일집 목판본 그 숫자는 동일한 55매인데 그중 2~3장은 찾을 수없어 입고되지 않았다고 한다.입고된 영주본의 119라른 숫자는 죽간일집의 목판외에 기타 사항들이 포함된 숫자이다.2023.6.27일은 영덕 제오정본이 55매가 전수 완전히 입고를 마친 날이다.
영주 칠자정 장판각에 보관하여 온 이 죽간일집 영주 판각본의 탁본의 존재여부는 밝혀진 것이 없어 혹시 용상리(어우실) 계시던 유영인(6~7년전 작고)님 댁에 남아 있을런지 알아 보기로 한다.
영주 칠자정 목각판 연대를 1939년으로 하는 것은 영주 칠자정 죽간일집 목각판에서 글 내용가운데 중간(重刊) 서문(序文)에 보면 "竹諫先生逸集重鏤序/죽간선생 일집을 다시 새김의 서문"이란 글에서 이 영주 칠자정 죽간선생 목각판 맨 끝에 나오는 글 부분에 명기된 "己卯夏四月上澣前進士中樞院議官後孫永福謹述"에서 기묘년(1939년)이 나오기 때문이다.
경북 영풍군 이산면 용상리 어위실 소재 칠자정 구내 영주판 죽간일집 목각판 장판각(藏版閣) 지금은 비어있다.1939-2005년간 66년간을 이 창고에서 수장되어 있다가 안동국학진흥원이송 보관,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828번지(慶北榮州市伊山面龍上里)
1939-2005년간 66년간을 이 창고에서 죽간일집 영주 목각판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질 위기다.
위와같이 우리의 유전 도시조님이 남겨주신 죽간일집은 영덕본과 영주본 두판의 각기 다른 목각판(木刻板)이 존재하는데 두판의 목각본을 대조한 결과 내용은 같고 영주의 목판은 영덕(盈德) 재오정 목각판보다 서문이 하나 더 들어있을 뿐으로 내용은 같다.
그럼 먼저 판각되어진 재오정 목각판부터 살펴보자.세원선조가 기계유씨 집안에서 1903년 흩어지고 남은 유고(遺稿)를 모아 정리한후 8년이 지난 1911년도에 즉 明治四十四年九月日에 침재(鋟梓)즉 판각(板刻)하게 된다.그리고 1914년 총독부 인증을 득하게 된다.
영덕(盈德) 재오정 (霽梧亭) 목각판(木刻版)
明治四十四年九月日鋟梓(1911년 판각 새김)
大正三年五月日始印證(1914년 총독부 인증)
총독부는 1910년에 설치되어 1945년 해방될때까지 존속되며 당시의 일제(日帝)는 독립운동등 대처키위해 서적을 포함한 모든 출판물은 그 검열이 삼엄하던 시대였다고 한다.
"印證"이란:
謂通過對照比較,證明與事實相符
(대조비교를 통하여 사실과 상부하는지를 증명함을 말한다.)
始印證:인증 허가가 났음으로 비로소 탁본 출력하여 서책을 만들기 시작되어 드디어 목판본 죽간일집이 생겨나게 된것이다.아래 사진은 죽간일집 목각판 탁본( 拓本)출력본이다.
世源 先祖는 서기 1911년 (辛亥年) 음력11월 4일(양력 1911년 12월 23일) 동짓날에 이 죽간일집(竹諫逸集) 판각(板刻)의 원고(原稿) 작성시 발문(跋文)을 쓰게 된다.
죽간일집 목판본(木版本)
이제 이 재오정 목각판을 살펴 볼때에 1911년 판각되지만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며 안동지역의 대표 인물이었던 이만계(李晩煃)의 서문(序文)을 얻지 못하다가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소재의 방산재(芳山齋) 인맥인 족인 병규(秉奎) 병기(秉琦) 만종(萬鍾) 3인이 노력하여 이만규서문을 얻어 와 싣게 된다.재오정의 목각판 제작에는 영덕의 재오정 인맥과 예천의 방산재 인맥이 함께 참가하였음을 알 수있다.
벌방리(閥芳里) 방산재(芳山齋)
이곳에서 말하는 방산재(芳山齋)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106에 위치한 재실(齋室)이며 방산재 상량문에 의하면 을묘년(1795년) 10월에 十世宗宅을 중수해서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이 방산재가 있던 자리는 十世의 族人이 살던 집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방산재를 중심으로 대단한 학파가 있었던듯 하며 그러나 오늘날 이 방산재는 심히 퇴락해서 바로 수선(修繕)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다.즉 재오정 목판본을 새길 때에 이미 유세원 선조와 함께 이곳 방산재 쪽의 문중에서 함께 힘을 보태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있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재오정 목각판 관련 유세원(劉世源) 선조는 1850년 9월 27일 출생해서 1924년 12월 19일 세상을 떠난다.이곳 목각판에 서문을 써준 이만규(李晩煃)는 1845년 안동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서 출생하여 1921년 세상을 떠난다.
재실(齋室)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유생(儒生)들의 공부하는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언덕위의 방산재(芳山齋)는 고즈녁히 세월의 변화무쌍함을 간직한채 한시대의 역할을
마친 노장(老將)처럼 말없이 서 있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방산재/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106
芳山齋 ( 慶北 醴川郡 甘泉面 閥芳里)
이제 영주의 칠자정 목각판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자.1939년 새겨진 영주 목각판은 칠자정의 구내에 함께 있는 두어평크기의 작은 장판각에서 66년을 지낸후 2005년도에 안동국학진흥원(韩国国学振興院)에 옮겨 수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곳 영주 칠자정 목각판의 韩国国学振興院 위탁자 명의는 이곳 이산면 어위실(御位室)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유해창(劉海昌) 종친으로 되어 있다.아울러 재오정 목각판의 韩国国学振興院 위탁자 명의는 유태호 종친으로 되어 있다. 韩国国学振興院 연구원의 말에 의하면 이곳 어위실은 목각판(木刻板)을 새기는 기술의 그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곳 芳山齋는 또한 劉敞 선조의 仙庵先生文集의 탄생지이기도 하다.劉海日님의 고조부되시는 劉秉琥(1838년-1903년) 선조께서는 이곳 방산재에서 선암문집의 자료를 친히 수집(蒐輯)하시고 편술(編述)하시었다.
2018.3.2일은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에 위치한 韩国国学振興院 을 찾았다.
유해일 어르신께서는 이곳 韩国国学振興院에 530~40여권의 아끼시던 장서를 위탁해 놓고 계셨으며 집에는 아직도 한 300여권의 장서가 있다.담당 학예사의 안내로 장판각(藏版閣)을 돌아 보며 영덕 재오정 목각판과 영주 칠자정 목각판을 돌아보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대접받고 이어서 학예사 여러분들과 회의실에서 여러가지 설명을 듣게 되었다.
2018.3.2일 韩国国学振兴院 儒学文化博物 林鲁直 馆长 竹谏逸集 说明会
수석 연구원님께서는 그곳에서 보관중인 천년의 향기 죽간일집을 펴시더니 금릉고적(金陵古蹟),과계림고도청옥저(過鷄林古都聽玉笛),신라회고(新羅懷古)등 시문을 보시면서 이것은 신라시문들이라 담담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옆에서 듣고 계시던 원로 유해일 어르신께서는 우리 강릉유씨 자문위원으로 위촉했으면 좋겠네!! 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셨다.
이 자리에는 劉海日 어르신외에도 劉翼相,劉載欽,劉豊鍾 宗親 그리고 御位室 劉海昌종친회장과 劉慶相이 이 이야기를 함께듣고 있었다.이분은 한문 글을 죽 내려 보시면서 마치 한글책을 읽어 내려가듯 술술 설명을 하시면서 막힘이 없었다.2018.3.2일 오후 韩国国学振興院에서 많은 설명을 듣는 자리였다.
1924년 평양판 활판인쇄 활자본 죽간일집
이렇게 판각된 죽간일집은 먼저 판각된 영덕 재오정판의 목각판을 찍어 냄으로써 책으로 된 서책본(書冊本)이 생겨나며, 이 판각 글씨체는 이제 1924년 5월에는 평양의 일신활판소(一信活版所)에서 활자화(活字化) 되어 죽간선생문집 상하로 출간된다.세원 선조가 돌아 가시기 반년전의 일이다.이어서 2년후인 1926년도에는 충남 논산의 문화당(文化堂)에서도 활판 인쇄되어 죽간선생일집으로 나온다.
지금 평양의 일신활판소 인쇄판 책자로된 죽간문집과 논산의 문화당판 죽간일집은 매우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각 도서관에서 소중히 관리되고 있으며,서울의 중앙도서관,韩国国学振興院,성균관대 존경각,경기대 수원캠퍼스,과천 국사편찬위원회등에서 보관되고 있다.
2018.3.2日 安东 韩国国学振兴院 藏版阁
2018.3.2일 안동국학진흥원 장판각에서 우리가 위탁한 죽간일집 목각판을 살펴보고 있다.
돌아본 소감은 죽간일집 목판본의 원고를 작성했다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소재 방산재는 지금이라도 보수치않으면 곧 쓰러질듯 하고 경북 영주시 이산면 어위실 소재 칠자정 구내 두평남짓의 죽간일집 목판 장판각(藏板閣)은 이제 보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서까래까지도 부식해 있었다.
그리고 영주 칠자정 소장되었다가 2005년도에 韩国国学振興院에 옮겨 수장(收藏)되어 있는 영주 칠자정판 목각판(木刻板)은 3~4장이 모자른 상태로 옮겨 온후 아직도채워지지 않은채 수장중이며 ,멀리 영덕에서 2016년도에 옮겨와서 수장중인 영덕 재오정 목각판은 2장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 칠자정에 66년간 수장되어 있다가 2005년도에 韩国国学振興院 장판각에 옮겨 수장
되고 있는 영주판 죽간일집 목각판은 칠자정 경내의 열악한 수장고에 저장되어 온 이유로
지금 안동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잘 보존은 되고 있으나 목각판이 일부 가장자리가 파손된
부분이 많은 등 매우 상태가 안 좋았다.
劉豊鍾 劉翼相 劉慶相 劉海日 劉海昌
劉載欽 劉翼相 劉慶相 劉海日 劉海昌
2018.3.1일 영주 어위실 칠자정에서 유해일 어르신과 함께 /우측은 유해창 종친회장
우리 거창,강릉유씨 도시조님께서 남겨주신 이 귀한 죽간일집은 우리 문중의 크나큰 자산이자 우리 거창,강릉유씨의 시원(始源)을 밝혀주는 많은 정보를 그 안에 지니고 있다.아름답고 보람찬 여행이었다.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친히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해일 어르신과 익상 종친님 그리고 韩国国学振興院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劉海日高祖秉琥님은 1838년(戊戌)생이며,1903년(癸卯)년 卒하시고 仙庵 문집을 수집편집하시다.
죽간일집 영주본 판각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姓刘 > 竹谏逸集解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간일집-맹주,옛 하양은 왜 강릉유씨 도시조 유전(劉荃)의 고향인가를 고증한다. (0) | 2018.02.14 |
---|---|
죽간일집을 활판 인쇄한 인쇄소들 (0) | 2016.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