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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Linley Taylor
메리 린리 테일러
https://en.wikipedia.org/wiki/Mary_Linley_Taylor
Mary Linley Taylor, (1889–1982) born Hilda Mouat Biggs,
was an English stage actress, who spent most of her adult life in Korea.[1]
호박 목걸이 20세기 상반기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산 영국 출신 여성 메리 린리 테일러의 한국살이. 운산금광을 운영했고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미국인과 결혼해 1917~42년 서울에서 살다가 1942년 강제추방당했고, 1948년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의 다채로운 기록. 송영달 옮김/책과함께·1만9500원. 만신 김금화 한국을 대표하는 큰무..
메리 린리 테일러
Marly Linley Taylor was born on September 14, 1889 in Abbey Row, Westport, Malmesbury, to Dr. Charles Edward Forbes Mouat-Biggs and Mary Louisa Tickell.[2]
She had two sisters, Betty and Una. Betty was also an actress. Taylor married Albert Wilder "Bruce" Taylor on June 15, 1917 at St. Thomas Cathedral in Bombay, India.[3]
Their son, Bruce Tickell Taylor (1919-), was born in Seoul[4] and was granted honorary citizenship by then-mayor Lee Myung-bak.[5]
메리 린리 테일러는 1889년 9월 14일 영국 말메사베리에서 애드워드 포베스/메러리 루이사 가정에 태어났다.두 여동생 베티와 우나가 있었고 그중 베티도 배우였다 ,테일러는 앨버트 와일더 부루스 테일러
와 1917년 6월 15일 인도의 봄베이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케되고,아들 부루스 티켈 테일러를 서울에서 낳게된다.그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다.
Married life in Korea
Mary and Albert lived in Dilkhusha, a house built in 1923 but from which they were forcibly evicted in 1942 by Japanese authorities.[6] The house's name means 'Heart's Delight' in Hindi, and was inspired by the famous house of the same name, Dilkusha Kothi, in Lucknow, India.[7][8] Mary was an active member of the Seoul Club,[9] well known for her hospitality and dinner parties.
Albert, like his father and grandfather, was a successful gold miner. He was also a correspondent for United Press International. His connections, influence, and later refusal to leave Korea in 1941 led to him being deemed a criminal by the then-Japanese government, and he consequently spent six months in Seodaemun Prison. After returning to America the following year, he died in 1948. Mary returned to Korea to bury her husband next to his father's grave at Yanghwajin Foreigners' Cemetery.
[10] Ten years after her death,[11] her autobiography Chain of Amber was published by her son, Bruce. Chain of Amber was translated into Korean in Seoul by Young-dahl Song in March, 2014.
한국에서의 결혼생활
메리와 앨버트는 1942년 일본 당국에 의해 1942년 기소당할때까지 1923년에 지은 딜쿠사에서 살게된다.이 딜쿠사란 말은 인도어에서 따왔으며,이 집의 이름을 딜쿠사(Dilkusha/Heart's Delight/마음의 기쁨 또는 Mind is Happy라고도 하는)라고 짓는다.
이는 인도의 럭나우에 있는 딜쿠사코티에 감명되어 지은 것이다.메리는 서울클럽의 열심멤바였고,그녀는 디너파티등에서 많은 역활을 담당했다.앨버트도 부친과 할아버지처럼
성공한 금광 광업자였다.
역시 UPI 통신원이었으며,그의 영향력과 인맥은 1941년도에 이르면 일본 정부의 시각에서 한국을 떠나기를 거부함등으로 결국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되는데,결국 6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다음해에 미국에 돌아가게 되지만 1948년도에 사망한다.
메리는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남편을 그의 아버지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지 아버지 옆에 묻어준다.그후 사망후 10년이 지나고,자서전이 그의
아들 부루스에 의해서 Chain of Amber라는 이름으로 출간된다.Chain of Amber는 서울에서 2014년 3월 송영달에 의해 번역출판된다.
Chain of Amber(호박 목걸이)
Historic house in Korea built by UPI correspondent to be restored
유피아이 통신원이 지은 한국의 역사적 건물 복원된다
SEOUL, Feb. 26 (UPI) -- The house where United Press International's earliest foreign correspondent resided is to be reopened as a historical landmark, the city of Seoul said Friday.
역사적 상징물로써 유피아이 통신원의 외국인 주거지였던 건물이 서울시로 부터 복원되기로 어제 금요일 발표되었다.
The red-brick house built in 1923 by Albert Wilder "Bruce" Taylor is to be restored and reopened to the public by 2019, the year that marks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March 1st Movement, a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Japanese colonial rule.
1923년에 알버트 와일러 부루스가 지은 붉은 벽돌 건물,복원되어 2019년도 일반인에 공개된다.2019년도는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일제의 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한 한국역사의.................................
Taylor was the first foreign correspondent to break the news of the mass protests that were held in Japanese-occupied Korea.
About 2 million Koreans took part in 1,500 demonstrations, but thousands were killed or arrested by colonial authorities.
테일러는 한국의 일본지배를 항거하는 대규모 항쟁 뉴스를 알린 최초의 외국인 통신원이었다. 1500개소의 항쟁시위 현장의 참가자는 20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천명이 피살되고 또는 일본 당국에 체포되었다.
Taylor continued to work as a reporter in Korea during the decades that followed, but by 1942 he and his family were forcibly deported due to wartime circumstances. An American by birth, Taylor is buried in a foreigners' cemetery in Korea.
테일러는 그후에도 수십년을 한국의 통신원으로써 종사하다.그러나 1942년 그와 그가족은
전쟁상황에서 강제추방 당하는데,미국태생인 테일러는 한국의 외국인 묘지에 묻힌다.
Taylor's house is named Dilkhusha, which means "Heart's Delight" in Hindi. Yonhap reported the Taylors lived in the house for 20 years. The two-story residence includes a basement and was built in a style popular in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interwar period.
테일러가 살던 집은 달쿠사라고 이름짓고,이것은 "마음의 기쁨"이란 뜻을 힌디어에서 나타낸다.연합통신은 테일러가 이집에서 20년을 살았다고 전한다.이 2층으로된 건물은 지하실도 있고,영미에서 인기있던 양식으로 1,2차 대전중인 전간기(戰間期)에 지었다.
Attempts to register Dilkhusha as a national landmark had been postponed due to the condition of the building. People were also reportedly squatting in the dilapidated structure. Many of the occupants are disabled or unable to pay their bills, South Korea media reported. The building also recently received the lowest safety grade.
이 빌딩의 여건상 이 딜쿠사를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등록할려는 시도는 연기된다.
이 낡은 건물에 사람들이 숨어들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점거자들은 이 주거비를
낼만한 여력이 없는 이들이라고 한국의 매체들은 전한다.이 건물은 최근에 가장 낮은 안전등급을 받았다.
The renovation is to be followed by a larger plan to restore various landmarks around the area of central Seoul that includes public palace grounds and foreign embassies.
이번 이 복원사업은 외국 대사관들과 궁궐터를 포함한 중부 서울 지대의 각종 랜드마크들을
복원케 되는 것이며 큰 규모의 계획인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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