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純彦과
報恩緞(은혜의 비단 선물)
1592년. 이 년도를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떠올릴 것이다. 임진왜란. 그 참혹했던 전쟁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나는 이처럼 우리에게 잊혀진 인물 중 하나인 역관 홍순언에 대하여 적어보려한다.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은 남양 홍씨, 예사 홍복의 12대 손으로 홍겸의 서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덕룡(德龍)이고 자는 순언이었으나 후에 순언이 본명이 된다.
당시 조선은 서자에 대한 신분적 제한이 많았기 때문에 순언은 일찍부터 한어(漢語)를 공부하여 한어역관이 된다. 이렇게 역관의 생을 살아가던 그에게 인생을 바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종계변무가 그것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란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의 가계 즉 조선왕조의 조상을 선조 대 까지(200여 년간) 잘못 기록한 것을 명나라에 시정해 달라는 요구를 한 것을 말한다. 이 종계번무를 역관 홍순언이 맡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그들의 오만함을 내세우기 위하여 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이번에도 시정한다는 내용을 받고 오지 못하면 역관을 죽이겠다고 하였고 그 일을 홍순언이 맡았다는 것이다. 이미 10년 전에도 실패했던 일이기에 홍순언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그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에 다다르고 동악묘에 들러 자신의 일이 잘 성사되기를 빌었다. 그 후 조양문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명에서 종계변무사 홍순언을 반기는 사람은 없다고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홍순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명나라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과 그 부인이 이었다. 그들은 홍순언을 극진하게 대접하였고, 석성이 도움을 주어 종계변무를 해결한다.
(정덕본正德本에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라는 것이 만력본에서 이자춘의 아들인 것으로 옳게 바뀌었다.
자료출처-KBS 한국사전 1부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역관 홍순언편)
혼순언이 종계변무를 해결하고 압록강가에 이르렀을 때 석성의 부인이 100필 비단을 선물로 보냈다. 그 비단에는 보은(報恩)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사실 조선에서는 홍순언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홍순언이 이 일을 해결하자 조선은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에는 '금수의 나라를 예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니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라고 적혀있다. 당시 선조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홍순언을 이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명나라로 가서 당시 병부상서 였던 석성으 도움으로 지원군을 데리고 오는 중임까지 성공시켰고 그로인하여 조선을 임진왜란을 좀 더 쉽게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홍순언과 석성은 어떤 관계가 있었기에 석성이 그를 이렇게 까지 도와준 것일까?
사실 홍순언과 석성의 관계보다 홍순언과 석성의 부인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석성이 명나라에 역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한 기방에 들르게 되었는데 한 중국 여인이 눈에 들어왔고 주인에게 부탁하여 그 여인을 불렀다. 그런데 그 여인이 소복을 입고 나타났다.
순언이 그 사연을 물어보자 그 여인이 "제 부모는 본디 절강 사람인데 명나라 북경에 와서 벼슬 살이를 하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지금 관(棺)이 객사에 있는데 부모님을 고향에 모셔다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이러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홍순언은 300냥이라는 거금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가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홍씨라고 대답할 뿐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 내용은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그 여인이 바로 석성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홍순언이 종계변무로 명에 왔을 때 그 은혜를 갑고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일을 해결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이렇듯 작은 인연이 커다란 도움을 주는 모습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홍순언에 대하여 재미있는 것은 그가 나라를 구한 공신이지만 순언을 향한 시선들은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조실록>에 보면
....우림위장 홍순언은 근본이 서얼에서 나왔고, 또 사람됨이 천한 바이니...파직하여 등용하지 말 것을 청하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분명 서자라는 신분적인 제한이 계속 그를 압박하였고 당시 중인계층의 신분상승을 인정 할 수 없었던 당시 관료들의 의식을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튼 그의 이러한 이야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익의 <성호사설>, <통문관지> 등 30여권이 넘는 많은 서적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만큼 홍순언이라는 인물이 당시 큰 파장을 주었다는 것만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许篈 荷谷先生朝天记
朝天記[中]
萬曆二年甲戌八月
初九日
初九日庚戌。晴。是日見朝後見堂。五更。余等率一行。具冠服詣東長安門外。留通事申璨,尹秀寬,軍官鄭雪,官奴孫鶴看房。安廷蘭以病不從。余等歷上林苑監,大德靈應廟,太醫院,欽天監,鴻臚寺,敎坊司,工部,兵部。憩于門外西廊。昧爽。城門啓鑰。守門官催入。余等歷金水橋,承天門,端門。至午門憩于闕左門。所經之處。相距甚遠。皆布甓於地。金水者。玉河上游。端門內。左有宗廟。右有社稷。承天門前直大明門。門外有正陽門。卽皇城南門也。午門左右。建五鳳樓。凡殿屋蓋以黃瓦。日將出。擊皷午門之東。撞鍾午門之西。後鳴鞭三聲。內外班齊。帝出御皇極門。門卽舊奉天門也。千官騶從。皆由東西偏門而出。廣庭寂然。但聞劍戟相響而已。千官則入于皇極門之庭。余等與十三道諸省官。班于午門外。余等齒于各官之末。上通事以下。立於監生之前。望見六大象分立門外。形貌奇偉。少焉。午門三門闢。鴻臚寺序班。引余等上御路。五拜三扣頭。遂由右掖門而入。渡石橋。見文武官東西相向。糾儀御史列於中庭。余等就其後而立通政司官前奏事。十三道差來人入見畢。序班引余等跪於御路上。鴻臚寺官持掲帖奏曰。朝鮮國差來刑曹參判等三十一員名見。此官不奏使臣之名者蓋怯也。余等三扣頭而復跪。帝親發玉音曰。與他酒飯喫。聲甚淸朗。余等復三扣頭。序班引出。還由右掖門。歇于闕右門傍。已而朝罷。千官出。余等詣光祿寺喫酒飯。寺在闕左門內。未徹。有數十人袖布囊爭掠卓物而去。余等若不遽起。則幾不免沾汚衣服。又謝恩於午門外。一拜三扣頭。出自東長安門。歷宗人府,吏部,戶部。至禮部將見堂。入于大廳東廊內。良久。左侍郞兼翰林院學士汪鏜出坐堂。十三道獻表文方物。導以法樂。郞中,員外郞,主事,觀政,進士,吏員等行揖禮後序班引余等跪于月㙜上。主客郞中王庭詩以掲帖告于侍郞曰。陪臣見。侍郞曰。起來。余等兩拜作揖。侍郞不答。復跪。伴送金國臣持咨文授使。使奉告曰。國王咨文。侍郞命受之。復曰。起來。余等出。尙書萬士和。以往祭穆宗昭陵故不在焉。大廳之扁曰崇化。余等還坐東廊。令通事呈表文於儀制司。見有一人捧投文牌以入。又有官人若軍民十餘輩隨之。皆呈訴狀於月㙜下。侍郞命受而付司務廳已。則還於大廳後房决事訖。罷堂而出。於是余等歷往主客司,儀制司行禮。使先入。兩拜作揖。郞官皆答拜。及余與汝式則但答揖而已。主客司只有王郞中。儀制司則郞中鄭汝璧。主事支可大,鄒應柱在焉。禮畢。余等過文德坊歸館。洪純彦因留在部。問下馬宴及賞賜日期。吏員輩曰。不可速爲。皆延其日期而答之。其意蓋欲邀賂也。又問實錄事。吏曰。穆宗實錄已纂。而世宗實錄未畢云。儀制郞中鄭汝璧召純彦謂曰。我見你國表文。足見敬奉朝廷之意。你國必是服箕子遺敎而如此也。我不勝喜歡。因取表筒結裹等具。細玩而嗟歎之。純彦見滕季達於部門外。季達曰。鄭內資惟一若有書信。則須於習儀之日傳我。我當往路上以候。余在京時。鄭參議付書於余。俾之轉致於季達。故余令純彦訪之。今得相遇。可喜其不浮沈也。光祿寺大官署送猪肉三十六斤。亦五日一次之例也。
宗系辨誣 (종계변무)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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