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나가는 길목엔 통상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무당(巫堂)집이 즐비했는데, 무당골 또는 신당골(神堂谷)이라 부른 것이 오늘날 그 신당골이 신당동(新堂洞)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광희문 밖의 고개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리아리(멀고 먼)한 고개'라는 뜻에서 아리랑고개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북망산천과 서방정토로 가는 길목과도 같은 고개로 도성안 주민들에게 아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신당동'은 본래 '귀신 신(神)'자를 쓴 '신당(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에서 유래한 동명이다. 이것이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바뀐 것인데, '귀신 신(神)'자가 '새 신(新)'자로 바뀌어서 그런지 귀신이 이처럼 성곽을 깔고 앉은 집주인을 못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상상을 해본다.
조선 궁궐의 파괴, <박문사(博文寺)>
앞서 보았듯이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기리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의 동상을 세우려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토가 죽고 그의 사망 20주기가 되던 1929년 말 동상보다는 이토의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결국 그 이듬 해 '이토공 기념회'가 조직되고 여기에는 친일파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도 참여하였다. 결국 이렇게 하여 이곳 장충단에 1932년 <박문사(博文寺)>라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모사찰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또 이 절의 설계는 일본 국수주의 건축학자 이토쥬타(伊藤忠太)에게 의뢰하는데, 그는 바로 남산의 <조선신궁>을 설계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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