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田渡碑建立日
-인조 17년(1639) 12월 8일에-
비가 세워졌다-
그 옛날 삼전도(三田渡)자리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이다.
삼전도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나루터다.
한강의 본류는 구의동 앞으로 바뀌면서 송파진과 삼전도에는 석촌호가 들어섰다.
왕은 이웃 헌릉과 선정릉으로 갈 때는 이 나루를 이용했다.
1637년 1월 30일 한강 상류 삼전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이제까지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에게 조선의 왕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그해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7시) 무렵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서문을 빠져나와
청 태종의 지휘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국왕의 의례복인 면복도 입지 못하고 남색 융복(戎服)을
차려입은 초라한 행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드디어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나아갔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세 차례 큰 절을 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항례(항복의 의식)는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다.
단상 아래 도착한 인조는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 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재위 때 여진족 추장 누루하치가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후금의 태조(누루하치)는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자기네가 파병해 줬다는 이유로 조선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현명한 왕인 광해군은 명나라가 질 것임을 예감하고 명나라에 파병을 하는 동시에 후금에게는 싸울 뜻이
없었음을 전한다. 결국 조선은 피 한 방울 안 흘렸다.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신하들에게 쫓겨났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친명배금(명나라와 친하고, (후)금나라를 배척한다.)정책을 썼다.
할아버지 선조가 일본에게 무방비로 전국을 유린당한지 40년만이다.
그 인조는 그 임진란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후금에게 가장 치욕적인 참배를 당한다.
오랑케 후금과의 전쟁을 두 번이나 치러야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 청나라 황타이지는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굴욕적인 사건이 바로 삼전도에서 일어난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인질로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비문이 건립되게 되었다.
비문 건립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1637년 3월부터 등장한다.
그해 3월 12일 비변사에서 삼전도 비석이 이미 준비되었으니 비문을 얻어다가 새기면 된다는 보고가 그것이다.
그해 3월 20일 인조의 재가가 떨어진다. 그 비문은 수항단 터에 세우기로 한다.
한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 것에 대비하여 지면에서 5~6장 높이로
돌계단을 쌓아 올렸다.
이 공사는 공조가 주관하고 호조와 병조의 후원하에 인부들에게 용가(雇價)를 지불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10월 30일경에 모두 끝나 11월 1일 役事에 참여하였던 인부들을 모두 해산 조치하였고,
정문과 협문 3칸 규모의 비각이 완성되어 비문의 내용을 각자하는 일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청나라 사신 마대부(馬夫大) 등이 11월 25일 삼전도의 비가 들어 설 자리를 방문하여
기단과 귀부 등의 규모를 일일이 확인하고 돌아갔다.
비문을 찬술하는 일만이 남았다. 조선에서는 당연히 청에서 문장을 받아다가 새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문장을 지으라는 인조의 전교가 내려져 비변사에서는 극비리에 적격자를 탐문하였다.
당시에는 누구도 이러한 비문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변사에서도 극비리에 인물을 천거하였다.
인조는 비변사에서 천거한 인물들에게 각자 급히 비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자연스럽게 빠졌고,
그 밖에 세 사람은 11월 27~29일 사이에 모두 글을 지어 올렸다.
인조는 이경석이 쓰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조용히 불러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句踐이 吳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夫差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나라의 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이경석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준 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고 말한다.
훗날 이 비문의 글로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 부터 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한다.
다시 고쳐 쓴 비문은 이듬 해인 인조 16년(1638) 2월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림(柳琳)에 의해 심양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간섭과 요구로 한문과 만주어 그리고 몽고어로 나뉘어
각자(刻字) 작업에 들어가 이듬해에 완성되어 인조 17년(1639) 12월 8일에 비가 세워졌다.
글씨는 오준(1587∼1666)이 썼고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란 전서(篆書) 제목은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인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명문이 잘 남아있다.
비석의 앞면 왼쪽을 몽고문자, 오른쪽을 만주글자 그리고 뒷면을 한자로 새긴 희귀한 예이다.
비석 위쪽의 이수(螭首)에는 여의주(如意珠)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화려하게 새겨졌다.
귀부(龜趺)는 17세기 석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크고 비석을 받치는 비좌(碑座)를 연잎 모양으로 새겼다.
청일전쟁 후 고종 32년에 굴욕적인 역사를 잊어버리기를 위하여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항복한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일부러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45년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 이 지역 주민들이 땅속에 파 묻었다.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나 비를 다시 세워 두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삼전도비다.
满洲皇帝皇太极
페인트 훼손사건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서울 송파구 석촌동)가 페인트로 훼손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비석 훼손이 발견된 것은 5일. 유물 관리를 위해 순찰 중이던 송파구청 직원 이모씨에 의해 발견됐다. 훼손된 비석의 앞면에는 '철'자와 '370'이라는 숫자가, 뒷면에는 '거'자와 '병자'라는 글씨가 빨간색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삼전도비는 1636년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이 청나라 태종의 요구로 세운 높이 5.7m, 너비 1.4m 크기의 비석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사실 등이 적혀 있다.
송파경찰서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370여년이 지났고 앞뒤의 글자가 '철거'라고 쓰여 있는 점으로 미루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적은 비석이 사적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는 데 불만을 품은 사람의 소행으로 보인다"며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비석이라 지문 채취가 어렵고 CCTV는 비석과 방향이 다른 곳에 설치돼 있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의 석재 전문가들을 8일 파견해 비석 보존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그러나 "범인 검거와 동시에 비석 보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지만 사적은 일반인에게 24시간 공개되기 때문에 순찰을 강화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만주어(여진어):1599년 누루하치 명에 의하여 몽고어와 만주어에 능통한 만주귀족 학자인 에르데니가 만주어를 만들다.
그러나 金史에 의하면 여진어는
1119년에 금태조 아골타의 명에 의하여 완안희우(完顔希于)가 만들었고,
11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A%B8%88_%ED%83%9C%EC%A1%B0
삼저도비가 완성된 것은 1639년 12월 8일이다.누루하치는 1559년-1626년 9월 30일 사망.
1589년에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하였고 랴우둥 변방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누르하치의 성장에 놀란 이성량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명나라 정부에 건의하여 용호 장군이라는 직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에게 높은 관직을 내림으로써 명나라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당근과 같은 임시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미 성장에 가속도가 붙은 누르하치는 남몰래 명나라에 대항할 힘을 하나하나 비축해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겉으로는 명나라에 철저하게 복종 하는 척하면서 때로는 이성량을 이용해 물적 지원까지 받아내며 힘을 키워나갔다. 그 즈음 누르하치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다가왔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에 원병을 보내느라 다급해진 명나라 정부는 이 시기 여진족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명나라의 여진족 분열정책이 느슨해진 틈을 타 누르하치는 주변의 여진족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켜나가기 시작하였다. 누르하치는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하다(哈達)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하여 여진족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16년 때가 왔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마침내 나라를 개창하였다.
스스로 칸(汗, Khan)의 지위에 올라 국호는 금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금으로 지었다.
(12세기 해서여진의 아구다가 세운 금나라와 구별하게 위해 후금이라고 부른다)
여진의 이름도 만주(滿洲)라고 개칭하였다
(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불교의 문수보살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누르하치는 에르데니에게 명하여 만주문자를 만들고 팔기군 제도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혁도아랍(赫圖阿拉)으로 옮겼다. 팔기군 제도는 군사를 여덟 가지 색으로 구분하였고 평상시에는 조세, 행정 등의 업무를 관장하다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는 유목민 특유의 조직이었다. 모든 만주족은 8개의 기 중 하나에 소속되었으며 후에는 몽골족이나 한족에 의해 편성된 팔기도 창설되었다. 이는 중국 본토를 차지할 때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였으며 훗날 중국본토 입성 이후에도 청나라 제도의 중심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막을 내린다.
Hong Taiji , 皇太極
출생1592. 11. 28 만주~ 사망1643. 9. 21 만주.
중국 청나라의 제2대 황제.
Abahai라고도 함.
연호는 천총(天聰)·숭덕(崇德)·1636년에 만주에서 만주족·몽골족·한족의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靑)으로 바꾸었다.
홍타이지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의 카간이었던 누르하치(1559~1626)의 8번째 아들이었다.
누르하치는 내륙 아시아 스텝 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부족민을 중국식 관료제 국가로 조직했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에 홍타이지는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권력다툼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주로 군사지도자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지녔던 데 있었다. 그는 내몽골과 조선으로 진격해들어가 이 두 나라를 금의 속국으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재정과 식량을 공급받고 내몽골에서는 인력과 말을 공급받아 팔기제(八旗制)로 알려진 군사체제를 완성했다. 4번의 군사 원정을 통해 전에 중국이 장악하고 있던 북만주의 헤이룽 강[黑龍江] 지역을 마침내 장악하고 3차례나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을 침공했다. 포로로 잡혀왔거나 자진해서 금나라를 위해 일하는 한족들의 수효가 많아지자 금도 중국에 더욱 가까운 국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유능한 한족들이 금에 협조했다. 홍타이지는 한족 관료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중국 공략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실현되기 전에 죽었지만 만주족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그가 죽은 지 1년 뒤에 1627년
만주족은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장악하고 얼마 후 나머지 지역 모두를 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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