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真族
여진(女真)의 발원
여진(女真)은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만주의 송화강일대(松花江一帯<지도-1>에서 외흥안령(外興安嶺(지도-1))이남의 외만주와 대한반도북부에 걸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민족이다. 10c경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17c에 만주(満洲)로 개칭했다.
여진(女真)의 한자는 여진어(女真語)의 민족명 ‘젠센’ 또는 ‘주르친’에 해당한다. 여직(女直)은 요흥종(遼興宗①)의 휘(諱)에 포함된 진(真)자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금조(金朝②)를 멸망시킨 몽골제국(帝国③)과 원조시대(元朝時代)의 한문 자료에는 대부분 여직(女直)으로 기록되는 경향이 많다. 동시에 몽골제국시대에 편찬한 페르시아어 역사서 집사(『集史』)등에도 금조(金朝)와 여진인(女真人)에 대하여 언급되는 경우 여직(女直)의 음사(音写)인 جورچه jūrcha로 부르고 있다. 민족의 성지를 장백산(長白山<지도-1>)으로 한다.
①興宗(1016,4.3~1055.8.28)은 요(遼)의 제7대황제(第7代皇帝 재위:1031.6.25.- 1055.8.28.)이다. 거란명은 야율지골(耶律 只骨)이고, 1016년 제6대황제가 된 성종(聖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에 양왕(梁王)으로 책봉되고, 1031년 성종(聖宗)의 붕어로 황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어렸기 때문에 당초는 생모인 태후인 소누근(蕭耨斤)이 섭정하고 실권을 쥐고 조정을 다스렸다. 성인이 된 후 생모는 유폐되고 실권을 되찾아 친정을 개시했다. 이즈음 요(遼)는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 했으나 흥종(興宗)은 군사력을 증강하고 북송(北宋)에 압력을 가하여 공물(조공)을 증강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신흥세력인 서하(西夏)에 대하여 군사를 보내 굴복시키고, 조공을 바치게 했다. 문화면, 내정 면에서도 번영을 일으킨 요(遼)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055년 40세로 죽는다. 태자인 도종(道宗)이 계승했다.
②金(1115~1234)은 금조(金朝)라고도 한다. 중국의 북반을 지배한 여진족(女真族)의 왕조이다. 금건국전(金建国前)의 여진(女真)은 현재의 중국동북지구(만주/満州) 흑룡강성(黒竜江省)의 송화강(松花江)지류인 안출호수(按出虎水)유역에서 거주하였고 요(遼)에 대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요(遼)의 지배자들은 사치가 심하고 여진에 대하여 과혹한 착취를 행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여진족의 완안부(完顔部)에서 나온 아골타(阿骨打)가 요(遼)에 반란을 일으켜 1115년 안출호수(按出虎水)의 하반(河畔)에서 즉위하고 건국하였다. 금(金/여진어:아르투프)를 국호로 했다.
국성(国姓)은 완안씨(完顔氏)이다. 요(遼), 북송(北宋)을 멸하고 서하(西夏)를 복속시키고, 중국남반의 남송과 대치했으나 몽골제국(帝国/元)에 멸망했다. 수도는 처음 회령(会寧:上京会寧府로 現在의 黒竜江省)으로 했다가 후에 연경(燕京: 中都大興府, 現在의 北京))으로 옮겼다.
③몽골제국은 몽골고원의 유목만을 통합한 칭기스칸이 1206년에 창건한 유목국가이다. 중세몽골어로 에게 몽골 우루스가 (Yeke Mongɣol Ulus)즉, ‘대몽골국’이라 칭했다.
④『集史』는 현재의 이란을 중심으로 아무르강(흑룡강)에서 이라크, 아나토리아동부까지를 지배한 몽골제국을 구성하는 지방정권(1256/1258~1335/1353)인 이루칸조의 제7대군주인 가잔칸(Ghāzān khān) 의 칙령에 의하여 재상이었던 라시드 알딘(Rashīd al-Dīn Faḍl Allāh Abū al-Khayr Hamadānī/1249~1318)을 중심으로 편찬된 역사서이다. 이란, 이슬람세계, 또한 몽골군주 가잔(Ghāzān khān)자신의 시점이 반영된 몽골제국의 발상과 발전을 기록한 기록문으로 매우 중요한 문한이다.
여진족 흑수말갈(黒水靺鞨)의 일본 침입
여진(女真)은 만주(満洲)에서 거주했던 흑수말갈(黒水靺鞨⑤)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그들 자신을 자칭한 것이라고 본다[*당(唐)대에 입조한 말갈인(靺鞨人)을 이르는데, 이것이 여진(女真)을 처음 본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주로 농경, 어로, 목축, 수렵에 종사하고 중국과는 조선인삼, 모피를 무역하였다. 흑수부(黒水部), 조말부(粟末部) 등 여러 부족이 존재하였는데 오랫동안 통일된 사례는 없었다. 또한 10c 후반부터 11c에 걸쳐 빈발한 고려군의 입구(入寇: 를 침범함) 중 1019년의 도이의 구(刀伊の入寇⑥)에서는 대마(対馬), 구주(九州)의 대재부(大宰府)를 습격한 도이(刀伊)라고 하는 해적집단은 여진계(女真系)의 일부족이 주체가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도(刀伊)의 구성원에 대하여는 고려인(高麗人)과 거란인(契丹人) 등이 혼재한 구성원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⑤고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말갈족의 한 갈래로〈수서 隋書〉에 나오는 말갈(靺鞨) 7부(部)의 하나이다. 흑수말
갈이라는 명칭은 이들이 당시에 흑수라고 불렀던 헤이룽 강[黑龍江](지도-1)이 동류하여 쑹화 강[松花江](지도-1)과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으므로 붙여졌다. 흑수말갈은 흑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 지역의 기후가 한랭하여 농사가 어렵고 소와 양을 기르지 못했으나, 돼지를 많이 길러 가죽은 옷감으로 고기는 양식으로 삼았다. 말갈의 여러 부족 중 가장 강건하여 고구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상대적인 독립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교통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발해 성립 초기에는 당(唐)나라와 연결하여 발해의 배후를 위협하기도 했다. 발해 중기 이후에는 일시적으로 발해의 통제를 받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던 발해의 문물을 받아들여 성장과 발전을 꾀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생여진(生女眞)으로 불리며 동만주 일대에서 자치적 생활을 누렸다. 그 후 거란과 고려의 영향 아래 점차 정치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어 금(金)을 세우는 세력의 일부가 되었다<백과사전>.
⑥도이의 입구(刀伊入寇)는 관인(寛仁)3년(1019) 에 요배하(遼配下)의 만주満洲를 중심으로 분포한 여진족(女真族/満洲民族)이라고 보이는 해적집단이 일기(壱岐),대마(対馬)를 습격하고 나아가 치쿠젠(筑前)으로 침공한 사건으로 도이의 내구(刀伊来寇)라고도 한다.
숙여진(熟女真)과 생여진(生女真)
역사에 나타난 이래 요(遼/契丹)에 종속하고, 중국화의 경우에 따라 숙여진(熟女真)과 생여진(生女真)의 2대집단으로 나누어진다.[*숙여진(熟女真)은 흑수말갈에 복종한 발해인으로 성립되었다. 그리고 발해는 건국당초부터 요(遼)에게 멸망할 때까지 당의 문화를 도입하였다] 한편 생여진(生女真)은 숙신(粛慎)에서부터 물길(勿吉)이래로 퉁구스 본래의 어로와 농경, 양돈, 수렵을 생업으로 한 흑수말갈을 말한다.
12c초에 완안부(完顔部)의 아골타(阿骨打)[*금(金)의 초대황제:재위 1115.1.28~1123.8.28]가 나와 여진(女真)의 통일을 추진하여 1115년 요(遼)에서 자립하여 금(金)을 건국했다. 금(金)은 요(遼), 북송(北宋)을 멸하고 중국의 북반부를 지배했다. 금(金)대에 한자(漢字)와 거란문자(契丹文字)의 영향으로 여진문자(女真文字)를 만들었으나 원(元), 명(明)대를 거치면서 잃고 말았다. 결국 금(金)은 몽골제국에 멸망할 때는 고지(故地)를 이미 몽골군에게 빼앗기고 중원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여진(女真)은 몽골인과 한인쌍방(漢人双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태반이 사멸하고 중원에서 여진(女真)의 집단은 소멸되었다.
한편 고지에 남아서 집단을 이룬 여진(女真)은 몽골, 원(元)에 복속하게 되었다. 원대(元代)의 여진(女真)은 만주(満洲)에서 조선반도(朝鮮半島)북부에 걸쳐 거주하고 원(元)의 지배를 받았다. 원(元)의 일본침공 때에도 여진 병(女真兵)이 참전하였다.
원(元)의 멸망 후 여진(女真)은 몽골에서 떨어져 나와 소집단들이 모두 명(明)에 복속했다. 또한 조산반도에서는 고려(高麗)에서 등장한 조선(朝鮮)이 세종(世宗)대에 조선반도북부의 여진 거주지역을 침공하여 합병하고, 지금의 평안도, 함경도로 편입되어 조선북부에서는 여진인女真人이 사라졌다. 15c에서 16c에 걸쳐 만주(満洲)최남부의 조선에 접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의 여진인(女真人)들은 종종 조선에 반격을 가하여 두만강남안지역의 쟁탈전이 반복되기도 했다.
후금(後金)의 건국
명(明)은 여진(女真)을 여진부족마다 위소제(衛所制)를 편성하여 부족장의 관직과 권리를 주고 간접통치를 시행했다. 명대후반(明代後半)에는 여진(女真)은 크게 2개의 집단인 건주여진(建州女直⑦:자칭은 만주)5부, 해서여진(海西女直⑧:자칭은 후룬)4부와, 그곳보다 동방에 사는 야인여진(野人女直: 여진족의 집단 중에서는 가장 용감했다)이라 불리는 4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6c말에 건주여직(建州女直)에서 나온 누루하치⑨는 이들 3부족을 통일하여 1616년 후금(後金⑩)을 건국했다.
⑦건주여직(建州女直)은 명대(明代)부터 청초(淸初)까지 만주남부주변에 거주하였던 여직(女直)의 집단이다. 건주여직(建州女直)은 만주어로 만주 구른(단 만주국 또는 문수사리라고도 표현)라고도 불린다. 건주여직(建州女直)은 만주와 백산으로 나누어지고 만주는 스크스크(蘇克素滸), 후네(渾河), 완기와(完顔), 돈고(董鄂)・젠첸(哲陳)의 5부(五部)로 나누어지고 이를 건주5부(建州五部)라고도 불린다. 백산(白山)은 쥬세리(朱舎里), 에이앤(納殷), 압록강(鴨緑江)의 3부(三部)로 나누어진다.
⑧해서여직(海西女直)은 16c부터 17c 명말청초경(明末清初頃)에 개원(開原), 길림(吉林)의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던 여직(女直=女真)의 집단이다. 해서여직(海西女直)이란 명(明)측에서 그들을 호칭하는데 사용한 명칭으로, 해서여직(海西女直)이라 불린 집단은 여진어(女真語=満州語/만주어)로 후른 구른(呼倫国/호륜국, 忽剌温/홀자온 또는 扈倫/호륜)라고도 불리는 집단이다. 후른은 우라(烏拉/오랍), 호이와(輝発/휘발), 하다(哈達/합달), 에헤(葉赫/엽혁)의 4가지 정치 체(4부)로 구성되어 있고, 만주 사(満州史) 측에서는 후른4부(四部)라고도 불린다.
⑨누루하치(弩爾哈赤:明의 嘉靖三十八年正月五日(1559年2月21日)~ 明의 天啓六年/後金天命十一年八月十一日(1626年9月30日))는 중국 후금의 창시자(재위:)이다. 청(清)의 초대황제가 된다. 군주로서 칭호는 만주어로 ‘겐겐 칸’ 몽골어로 쿤도우렌 칸‘ 묘호(廟号)는 태조(太祖), 시호(諡号)는 고황제(高皇帝)이다. 또한 명(明)의 문헌에는 동노아합제(童奴兒哈赤) 또는 누루합기(奴兒哈赤)라고 기재되어 있다. 청의 문헌에는 弩爾哈齊 또는 弩爾哈奇, 조선의 문한에는 老乙可赤로 기재되어 있다.
⑩후금(後金)은 17c전반에 만주에서 부흥한 만주인(満洲人=女真人)의 국가로서 청(清)의 전신이다.
1588년까지 여진(女真)의 건주여직(建州女直)을 통일하고 만주국(満洲国)을 건국하였던 애신각라(愛新覚羅)씨의 누루하치(努爾哈赤)는 1593년 해서여직(海西女直)과의 전쟁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누루하치(弩爾哈赤)는 1616년까지 ‘에헤’부족을 제하고 전 여진(全女真)을 통일하고 이 해 칸의 지위에 오르고 천명(天命)을 연호(年号)로 정하고 명(明)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누루하치는 이 때 국호를 애신국(愛新國=후금)이라 정함으로서, 이전의 12c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세운 금(金)과 구별하여 이 나라를 후금(後金)이라 했다. 처음 수도는 1603년 이래 누루하치의 거성(居城)인 흥경(興京)에 두었다.
누루하치는 에루데니(額爾德尼) 등에게 명하여 만주문자(満洲文字/無圏点文字)를 정하고, 다시 팔기제(八旗制)라는 군사, 사회조직을 창설하여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1616년 후금(後金)은 칠대환(七大恨)을 들어 명(明)에 대하여 거병했다. 요동(遼東)에 있는 명(明)의 거점을 공격하고, 익년 1619년 흥경(興京)을 공격하는 명(明)의 대군을 사루프(薩爾滸)전⑪에서 대파했다. ‘에헤’를 병합하여 드디어 여진(女真)의 완전통일을 이루었다. 1621년 명의 요동지배의 거점인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정복하고,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긴다. 1625년 수도를 요양(遼陽)에서 다시 심양(瀋陽=盛京)으로 옮겼다. 이 단계에서 누루하치의 세력권은 요하(遼河)의 동방전역(東方全域)으로 미친다. 익년 1626년 누루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넘어 산해관(山海関)으로 향하였으나 녕원공격(寧遠攻擊)에서 서양식의 대포를 가진 원숭환(袁崇煥)군에 패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누루하치는 사망했다.
⑪사르프戦(薩爾滸之戰, 簡体字:萨尔浒之战)는 1619년 누루하치가 이끄는 후금(후의 청)이 명의 후금토벌군을 토벌한 전투이다. 전군을 4갈래로 나누어 후금을 포위하여 공격한 명군을 누루하치는 각군을 각개격파 함으로서 대군을 무찔렀다. 특히 최초로 행한 대규모전투가 무순동방(撫順東方)의 사르프(薩爾滸)에서 행하여 졌기 때문에 이 전투 전체를 사르프전투(薩爾滸戰鬪)라고 부른다. 명군은 4만5천인이나 사상자를 내고 대패한 전투이다. 건국한지 얼마 안 되어 승리한 이 전쟁으로 후금은 부흥을 제 일보가 된 계기가 된 주요전쟁이다.
누루하치의 사후 후계자인 혼타이지(皇太極)는 내몽골을 평정하고 조선을 복속시킨다. 여진(女真)의 민족명을 만주(満洲)로 개칭하였다. 1632년(天聡6年)에는 타하이(達海)에 명하여 만주문자(満洲文字)를 무권점문자(無圏点文字)에서 유권점문자(有圏点文字)로 개량했다. 1636년 국호를 대청(大清)으로 바꾸었다. 청(清)은 1644년 명멸망후(明滅亡後)중국으로 진출하고,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⑫ 이르기까지 중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중국최후의 통일왕조라 할 수 있다.
⑫청조(清朝)가 타도되고 고대부터 내려온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발효일이 10월 10일임으로 이를 쌍십혁명(双十革命/Double Ten)이라고도 한다.
여진족의 자료요약-여진-금-후금-만주족-대청-중화민국
①여진은 만주일대의 흑룡강변과 송화강변에 거주하던 부족명이 흑수부, 조말부라 불리는 부족이었는데 스스로를 여진(女真=靺鞨人)족이라 불렀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를 토대로 거주한 부족을 생여진이라 불렀고, 숙신과 물길로 이어지는 여진족을 숙여진이라 했다.
②여진족은 요가 국력을 잃어가는 틈을 노려 1115년 아골타가 여진족으로 통일하여 요에서 자립하여 금을 건국했다.
③금(女真=靺鞨人)은 요, 북송을 멸하고 여진문자를 만드는 등 국세를 키웠으나 1211부터 1213까지 신흥세력인 몽골에 멸망함으로서 결국 여진은 소멸하기에 이른다.
④그러나 명대후반 여진족은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에서 자치구지역으로 나누어 통치 받고 있었다.
⑤이중 건주여진의 ‘누루하치’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1588년 건주여진족을 통합하고, 1593년 해서여직을 병합하여 1616전 여진 통일하여 후금(女真=靺鞨人)을 건국하고 만주문자제정 등 국세를 키워 나간다.
⑥후금(女真=靺鞨人)은 명과 대치하고 명과의 대전에서 요양, 심양을 정복하고 여세로 1626년 누루하치는 녕원공격을 단행하나 이 전투애서 명에 대패한다.
⑦이후 ‘누루하치’는 사망하고 후계자 ‘혼타이지’가 내몽골을 평정하고, 조선을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이 후 민족명을 ‘만주’로 변경하고 1632년 만주문자를 제정하는 등 국세를 키웠다.
⑧1636년에는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한다. 1644년 명이 멸망한 후 중원을 진출하였다.
⑩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 청조가 타도되고 동시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을 수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