汴京
http://blog.daum.net/yoji88/658
秦宋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NO&qid=5TwHb&q=%E6%B1%B4%E4%BA%AC&srchid=NKS5TwHb
진나라 ...<인터넷 백과사전 옮김>
차이나(China)라는 영문 이름이 바로 진에서 유래했다. 진은 중국의 대체적인 국경선을 확정짓고 그후 2,000년간 이어진 기본적인 행정체계를 확립했다.
통일제국 진은 BC 771~221년 중국에 분립한 여러 소제후국들 중 하나인 진(秦)에서 발전한 나라였다. 진은 이 소제후국들 가운데 비교적 한화(漢化)되지 않은 나라였으며 매우 호전적이었다. 진은 전략적 요지인 웨이수이 강[渭水] 유역을 점령했다. BC 3세기 중반에서 BC 2세기말 사이에 진국공(秦國公)은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엄격한 법률체계를 만들고 전국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다스리는 군·현을 설치하는 등 권력을 집중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을 바탕으로 서서히 주변국가들을 정복하고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BC 247년 어린 영정(嬴正)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상인 이사(李斯)와 함께 정복사업을 완성하고 BC 221년 진 제국을 세웠다. 또한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고,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폈다. 서체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를 정비했다. 또한 봉건적인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BC 213년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사상들을 없애기 위해 의서(醫書)와 같은 실용적인 서적들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사르게 했다(→ 분서갱유 )(→ 색인 : 분서갱유). 이러한 가혹한 조치에다 전쟁과 건설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결국 BC 210년 시황제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났다. BC 206년 진은 멸망하고 한(BC 206~AD 220)이 섰다.
진대에는 2개의 대규모 토목사업이 있었다. 하나는 만리장성으로 기존의 여러 짧은 성들을 연결시켜 만든 것이었고, 또 하나는 거대한 궁전인 아방궁(阿房宮)으로 그 안에 면적 450㎡의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예술적 기여는 당시 형성되기 시작한 한자의 서체를 단순화하고 통일시킨 것이다. 진대의 회화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주(周) 말기의 회화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묘지의 널판에 그린 그림은 축제와 신비적·실제적인 동물들, 그리고 역사적 장면들을 묘사했다. 진은 존속 기간이 짧아 중국의 문학과 학문을 완전히 절멸시키지는 못했으며, 은(殷)나라의 풍부한 문화유산은 한으로 이어져 중국 문화가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송나라
1127년 이후에는 강남(江南) 지방만을 통치했는데, 이를 남송이라고 한다.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였던 조광윤(趙匡胤)은 정변을 일으켜 지배권을 장악하고 송을 건국했다. 그후 뛰어난 외교술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경쟁자들에게 권력보다는 명예직을 갖도록 은근히 설득하여 훌륭한 황제가 되었다. 또한 유능하고 활동적인 문신관료들을 기용하여 건전한 행정을 폈다. 그 자신은 유교적 원칙에 따라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국가의 정예군대를 자신의 통제 밑에 두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부터 강남지방에 있던 10국(十國)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조광윤을 계승한 여러 황제들은 북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거란족과 일련의 정전(停戰)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료주의적 지배체제는 점차 부패되었고, 요(遼)나라에 복속되어 있다가 독립한 여진족·몽골족이 북방 변경의 주(州)를 침입했을 때는 이를 방어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여진족은 화북(華北) 지방을 점령하여 금(金)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양쯔 강[揚子江] 이남의 송 지배지역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다.
1127년 고종(高宗)은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좋은 강남지방으로 천도하여 남송을 세웠다. 고종은 임안(臨安:지금의 항저우[杭州])에 도읍을 정하여 적대관계였던 금을 방어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진력했다. 고종은 한(漢)나라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바 있는 문신관료체제의 신봉자로서 이를 모방했으며, 이러한 관료체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성공적으로 유지되었다.
역대의 모든 왕조와 마찬가지로 남송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최후의 몰락은 갑작스럽거나 몇몇 전대의 왕조에서처럼 내분으로 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1년 금나라의 정벌과 함께 화북지방으로부터 중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후 몽골족(元)이 화북지방에 있던 송의 영토를 장악한 수십 년 간 송과 원은 서로 불안한 상태로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1250년 마침내 칭기즈 칸의 손자들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송 정벌에 나섰다. 송의 군대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1276년 수도 임안이 함락되어 남송은 멸망했다.
송대에는 상업이 유례없이 발전했다. 상업 길드가 조직되었고, 지폐의 사용도 증대했으며, 주요 수로(水路) 및 남동 해안지역에 번창했던 몇몇 대도시에서는 인구가 100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 11세기에는 유교경전의 광범위한 출판과 활자의 사용이 시작되어 문학과 학문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사숙(私塾:일종의 사립학교)이 번성하여 국립학교와 함께 많은 과거시험 응시자들을 배출했다. 행정에서는 복지정책을 널리 시행하여 이 시기를 중국 역사에서 가장 살기 좋은 시대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 陸象山이라고도 함) 같은 12세기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송대에는 특히 예술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 직접 예술을 장려했고 부분적으로는 장려금까지 지급했다. 북송의 변경(汴京:지금의 카이펑[開封])에는 불교·문학·예술이 부흥하기 시작했으며, 궁중에서는 위대한 시인과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 흠종(欽宗)은 뛰어난 예술품 수집가로도 알려져 있다. 수도인 변경은 궁정·사원 및 거대한 탑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도시였는데, 1126년 여진족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송대의 건축양식은 웅대한 구조로 유명한데, 변경에 있던 가장 높은 탑은 110m에 달했다. 송의 건축가들은 지붕의 처마선을 가장자리에서 위쪽으로 치솟게 만들었다. 6각 혹은 8각으로 된 목탑·석탑이 성행했는데, 이들 중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송대의 조각에서는 불상을 중시했는데, 당시의 불상조각은 역대의 작품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산수화도 북송의 뛰어난 예술품의 하나이다. 산수화에서는 범관(范寬)·이성(李成)이 가장 유명하다. 남송에서도 많은 화가들이 한림원(翰林院)에서 봉직했는데 효과적인 붓놀림과 세밀화법에 뛰어났으며, 선(禪)의 영향하에서 불교 고승(高僧), 동물, 새 등을 주로 그렸다. 송대의 장식예술로는 도자기가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송대의 도자기는 형태의 단순함, 색채의 순수함, 유약 빛깔의 농담(濃淡) 등이 특징적이다. 북송에는 정요(定窯)·균요(鈞窯)·여요(汝窯)·자주요(磁州窯) 등에서 생산된 자기, 북부의 청자, 흑갈색의 유약을 칠한 자기가 있었고, 남송에는 징더전 요[景德鎭窯]의 백자, 길주요(吉州窯)자기, 청자, 푸젠[福建]의 흑도 등이 있었다. 남송 수도 부근의 관요(官窯)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송대의 수많은 도자기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의 옥공예와 칠기는 전통적인 기교와 선(線) 기법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기법이나 작품 경향으로는 송대의 작품을 명확히 판별하기 어렵다.
음악에 있어서 북송은 몽골족의 악기인 2줄 달린 현악기를 받아들였고, 궁정에서는 음악행사나 연회가 부활되었다. 송대의 많은 문학작품들에는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이 나타나 있다. 송대의 관찬(官撰) 역사서 496권 가운데 17권이 음악에 관한 내용이고, 1267년에 만들어진 백과사전에서는 200권 가운데 10권이 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송대에는 가극이 크게 번성했는데, 그 형태는 북송과 남송에서 아주 다르게 발전해나갔다. 송대 문학은 산문에서는 이전 시대와 같이 표현의 간결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고, '고문'(古文)이라고 불리는 단편 문장들이 다수 창작되었다. 당시의 구어(口語)로 이야기를 구술하는 '설화'(說話)라는 문학양식이 생겨났으며, '화본'(話本)이라 불린 설화의 대본은 후대 중국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형식의 '시'(詩)도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송대의 시인들은 삶의 즐거움과 절망을 노래한 '사'(詞)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는데, 사는 송대 문학의 상징이 되었다. 문화적인 업적의 다양성과 풍부함으로 인해 송은 중국에서 매우 위대한 왕조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北宋
―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로 내부분열을 막아보려던 통일왕국의 시대
송나라 시대는 서기 960년에 건립되었고, 1279년에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 기간 중 금나라로 휘제(徽帝) 및 흠제(欽帝) 두 황제 및 종실 비빈들이 포로로 잡혀간 1127년을 기점으로 전후 두 시기로 나뉜다. 1127년 이전이 북송 시대이고 그 후부터는 남송 시대이다.
북송 때는 온 중국이 여전히 분열되어 북송과 함께 중국대륙에 존재한 비교적 큰 국가로는 요나라를 제외하고도 또 서하(西夏)와 대리(大理)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와 달리 송나라는 오대십국의 분열을 종식시킨 상대적으로 통일된 왕국이었다.
북송시대의 정부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권력이 황제에게로 집중되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이 시기 북송의 사회와 경제는 뚜렷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북송문화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학술상에서 이학(理學)은 유학을 진정한 철학으로 발전시켰으며, 사학에서도 큰 성과를 이룩하였고, 사(詞)는 특히 독특한 품격을 구비하여 일절(一絶)이라 칭해졌다. 고문(古文)이나 통속문학, 희극, 그리고 설창(說唱) 분야의 예술도 급속히 발전했다.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의 중국3대발명품 또한 북송 시대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한다.
또한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판관 포청천(포증, 999~1062)이 활약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이렇게 발달했던 북송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실시한 각종 조치들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국력은 약해지고 백성은 가난하게 되었다. 이에 북송 시대 후기에는 왕안석(王安石)의 법개정으로 국력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결실을 보기는커녕 도리어 당파싸움이라는 화근을 초래하였다. 또한 이로서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은 이미 타협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기 1127년, 내우외환에 직면한 북송은 결국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황제들이 금나라로 끌려가는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을 초래하였고 뒤이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