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族谱资料

林汉浩 1752-1827-copy

송화강 2011. 5. 26. 11:23

 

동도(東渡)시조 문양공(文襄公) 유전(劉荃)의 고증


평택/나주 임씨 임팔급,남양송씨 송규 ,강릉유씨 유전 시조 동도시기 최종고증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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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仁宗 皇祐辛卯四月八日生 翰林學士正憲大夫行兵部尙書
송인종 황우신묘4 월 8일생  한림학사정헌대부행병부상서

高麗文宗三十六年壬戌八月始八東士 時年三十二
고려문종삼십육년임술팔월시팔동사 시년삼십이

 

강릉유씨 대동보에 기록된 내용은

송나라 인종  4월8일에 태어났으며, 벼슬은 한림학사 병부상서를 지냈다.

고려 문종 36년((1083) 8월에 8학사와 망명했으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

행적에 대한 내용은 고려 선종때(1091년) 벼슬에 나갔으며,

예부의 건의에 따라 공자의 제자 안회를 비롯한 72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국자감에 조성하게 했다.
72현 상의 조성은 이 시기 유교도 불교 못지 않은 종교적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종때에는 성스러운 곳에 단을 세우고 제를 올리는 기자사를 역임하셨다.

기자사 [箕子祠] : 기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

평양시 기림리 기자릉 앞에 있는 것으로 고려 숙종 1102년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광해군 4년(1612)에 숭인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종14년 기해년(1119)에 국자감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관이었으며,
예종17년 임인년(1122)2월7일 졸하시다.

우리 강릉보에 보면 학사(學士)들이 동쪽으로 건너 오셨다는 것만 기록되었고 그 밖에 행적은 심히 모호하기로 의아스러웠는데 음죽(陰竹-이천의 남쪽 경계지역의 옛이름))에 사시는 재기(在起) 할아버지께서 임한호(林漢浩) 정승(政丞)댁의 임씨보첩(林氏譜牒)을 참고 하여 보니 ...

 

임한호 [, 1752~1827] 

 

본관 나주(羅州). 자 경소(景昭). 시호 정간(貞簡). 1783년(정조 7) 생원이 되고 17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800년 이조참의를 거쳐 1803년 대사간 때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논의하다가 파직당해 안주(安州)에 유배되었다.

1804년 대사간에 복직되고 180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형조판서·이조판서·우빈객 등을 지내고 1821년 우의정에 올랐다. 1823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때 서얼의 등용을 주청하여 서자(庶子)도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왕위에 오른 예종은 헌종의 묘호를 제정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조정 개편에 나섰다.
위계정을 문화시중, 최홍사와 이오를 문하시랑평장사, 윤관을 중서시랑평장사, 임의를 상서좌복야 등에 각각 임명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다음 숙종의 측근 관료인 윤관을 중용, 부왕의 유지대로 대규모 여진 정벌을 단행하였다.(고려 예종때에 임씨성의 성씨가 보임)

 

8학사의 시'만 기록되었고 그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기로 중조(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유전선조의 상계를 가져왔다는 내용임
그 기록은 현재 강릉유씨 대종회 문고에 보관되어 있는걸로 추측되며 이기록을 중심으로 한고조로부터 중조의 유전선조까지 상계도를 이은걸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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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상계(中國上系)의 전해온 내력

대동보 보유(補遺)에 의하면 홍세주(洪世周)씨가 중국사절로 출국할때 종친재기(在起)씨가 사절에게 화폐(貨幣)를 많이 주면서 간절히 부탁 하기를 ..

우리 유(劉)성이 본래 중원 황조(皇朝)로부터 동래(東來) 하였으나 상서공 휘 전(諱 筌) 선대 세계는 막연하여 기록된바 없으니 바라건데 유씨 세계를 널리 탐문하여 상계(上系) 세계(世系)를 가지고 오도록 당부하였다.

그런데 마침 상서공 후손 휘, 용(庸)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자리에 있어 어렵지 않게 한태상황(漢太上皇)으로부터 상서공에 이르기까지 41세가 되는 세계(世系)를 가지고 왔으나

그 세계(世系)기록이 판각(板刻)이 아니고 두루마리에 등서하여 왔었음으로 그 세계를 (금석지문을 등본:손으로 쓴 것으로는)인정할 수 없다하여 믿어 주지 않으므로 동지서장관(冬至書狀官)의 사명을 받고 중국으로 출국하는 윤찬(尹璨)에게 또 부탁하여 유 용(劉 庸)과 교섭끝에 중국상계(中國上系) 판각본을 얻어 오는데 성공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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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려)에서의 생활

배편으로 중국을 떠나올 때와 망망대해에서의 서글픈 심정을 시로 남겼고 한국에 와서도 고향과 송황제를 그리워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처음은 8학산 밑에 거주하였으나 나중에 영천군(거타군, 동거군, 영양군)으로 이주하였고 문종시에는 고려정부에서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고려 숙종시(1096-1105)에 입조하여 이후 후손은 고려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살았다.

시조의 처음관직은 고려 선대 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국자감 이었고 후손들은 현감에서부터 대제학, 대사헌, 추밀부사 이었고 시조께서는 고려예종 17년 1122년 2월 7일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고려정부에서는 시조의 높은 학문과 공을 인정하여 장남을 거타군으로 봉하고 차남은 아림군 삼남은 백천군 으로 봉했다.

고려 예종 왕은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 산하 계량동에(지금의 영천시 녹전동 비석촌) 전답을 하사 했다. 시조에서부터 8대까지 주 거주지가 당시 서울이었던 개성과 영천이었고 8대에서 장남은 거타군으로 차남은 옥천으로 분파된다.(옥천은 강릉의 옛 이름이고 강릉 劉氏의 중시조가 된다) 고려실록(고려실기)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때(1294~1339) 거타군 북 명천면 덕곡산하 계양동에(지금의 영천군이며 일명 鳴山面 花枝洞)죽간선생의 묘가있고 사패지(賜牌地:왕으로부터 받는 패와 토지)는 사방으로 5리(2km)이고 그중에 위토전(位土田) 즉 밭이 10만평 밤나무 300주 대추나무 200주가 있으며 개펄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제실이름은 수송대(水松臺) 정침 5간이라 기록되어있다.

구족보에는 愁送臺(수송대:그리워 하는 심정을 보내고 싶은 마음)라고 적혀있다. (세보1권111쪽)할머니는 감숙성 농서현 출생 농성이씨 정경부인이시다.

 

 
최종 고증문 완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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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신 내용중..

유전 선조의 아들..
견규..
貞敬夫人 平澤林氏 中朝 吏部尙書 八及女 ...
정경부인 평택임씨 중조 이부상서 팔급녀

유전 선조의 장남 견구선조가 임씨시조 팔급공의 자녀와 결혼했다는 기록임
(참고문헌, 강릉유씨 비금세보 권1 1957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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