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東渡)시조 문양공(文襄公) 유전(劉荃)의 고증
우리 강릉보에 보면 학사(學士)들이 동쪽으로 건너 오셨다는 것만 기록되었고 그 밖에 행적은 심히 모호하기로 의아스러웠는데 음죽(陰竹-이천의 남쪽 경계지역의 옛이름))에 사시는 재기(在起) 할아버지께서 임한호(林漢浩) 정승(政丞)댁의 임씨보첩(林氏譜牒)을 참고 하여 보니
임씨시조 임팔급은 송조때 한림학사(임씨 보첩에는 당나라때 한림학사라고 기록이 되어 있음)라 여러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팔학사(八學士)인 병부상서 유 전(劉 荃) 이부시랑 최 호(崔 互) 어사대부 송 규(宋 圭) 태중 대부 중랑장 공덕수(孔德狩) 한림 권지기 (權之奇)등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오셨으니
그때가 고려 문종때(임씨보첩에는 신라말이라고 기록)라 하였고 강원도 통천군에 명승고적인 총석정 절벽위에 팔학사(임팔급,설인경,허동,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 성명과 그 관직함이 차례로 각석 되었으며 또 그곳 해상에서 각자 절구 한수씩을 지어 읊었다는 그 시가 임씨보첩에 소상히 기재 되었으니 (임씨보첩에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없음) -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 지금의 팽택군 팽성읍 농성현에 도착하였다는 문헌과 구전이 임씨보첩에 실려있음)
송조 팔학사는 가히 확증 된다고 하겠으나 후예들이 광범하게 수문(蒐聞)하지 못한 점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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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동도설 (始祖 東渡說)
시조 林八及(임씨의 시조)께서 중국 唐나라 조정에 出仕하셔서 나이 18세에 한림학사( 翰林學士)가 되셨는데 간신들의 참소(讒訴)를 입어 축출(逐出)되시니 동료 7분(설인경,허동,유荃,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과 함께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건너 지금 평택인 팽성 용주방에 다달아 머무시어 사시니 우리 東方의 林氏는 여기서 비롯되어 면면이 이어저 내려오고 있다.
시조 學士公 林八及의 동도(東渡)시기는 당나라 문종조와 그후 후당의 명종조로 밝히고 있으나 년대로 보아 서기 827년에서 933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약100년의 기간이되고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후가 된다. 혹은 거금 3,000년 전으로 소급되는 주무왕원년 의 동도설도 있다.
그러나 薛氏의 시조 인경공(仁敬公)의 동도시기와 8학사의 동도시에 [李씨(唐王의 姓]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현인(賢人)들이 참소(讒訴)를 당하는구나]라는 구절이 있어 미루어 본다면 8학사 동도시기는 최소한 당나라가 망하기 전이거나 이미 망할 징조가 농후(濃厚)하였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당나라가 망한 시기가 907년이고 보면 시조 동도시기는 830년대(당 문종827~840년)에서 900년의 7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려 건국된 918년과 신라가 망한 935년의 이전으로서 族譜의 기록으로나 여러 가지 史料의 면에서 무리없는 추정(推定)으로 생각된다.
學士公께서 東渡 하실 때 함께오신 7賢과 더불어 각자 욾으신 東渡詩는 다음과 같다.
林八及 ; 八人浮海兮여 桂棹蘭檣이로다. 薛仁敬 ; 仙李運盡兮여 賢士被讒이로다. 劉 荃 ; 波濤闊矣兮 여 舟楫利逝로다. 許 董 ; 吾徒東矣兮여 可以免禍로다. 宋 奎 ; 接淅而去兮여 謝暗投明이로다. 崔 冱 ; 李老入海兮여 殷道衰亡이로다. 權之奇 ; 賢士出東兮여 竭誠盡忠이로다. 孔德狩 ; 見機而作兮여 疏廣之徒로다.
출처: 임씨시조 임팔급의 동도 시기(부안임씨보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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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상계(中國上系)의 전해온 내력
대동보 보유(補遺)에 의하면 홍세주(洪世周)씨가 중국사절로 출국할때 종친재기(在起)씨가 사절에게 화폐(貨幣)를 많이 주면서 간절히 부탁 하기를.............................................. 홍석주는 1774년 (영조 50)~1842년(헌종 8)사람으로 1803년,1830년 두차레 사은사(謝恩使)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을 다녀온다. 1836년 당쟁에 연루되어 면직한다.
우리 유(劉)성이 본래 중원 황조(皇朝)로부터 동래(東來) 하였으나 상서공 휘 전(諱 荃) 선대 세계는 막연하여 기록된바 없으니 바라건데 유씨 세계를 널리 탐문하여 상계(上系) 세계(世系)를 가지고 오도록 당부하였다.
그런데 마침 상서공 후손 휘, 용(庸)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자리에 있어 어렵지 않게 한태상황(漢太上皇)으로부터 상서공에 이르기까지 41세가 되는 세계(世系)를 가지고 왔으나
그 세계(世系)기록이 판각(板刻)이 아니고 두루마리에 등서하여 왔었음으로 그 세계를 (금석지문을 등본:손으로 쓴 것으로는)인정할 수 없다하여 믿어 주지 않으므로 동지서장관(冬至書狀官)의 사명을 받고 중국으로 출국하는 윤찬(尹璨)에게 또 부탁하여 유 용(劉 庸)과 교섭끝에 중국상계(中國上系) 판각본을 얻어 오는데 성공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유씨시조(劉氏始祖) 유 전(劉 荃)
우리 유씨의 시조는 중원(중국)한나라 한태상황(漢太上皇) 유 단(劉 湍)의 41세손으로 휘(살아서는 이름이고 죽어서는 휘(諱)라고 한다)는 전(筌)이요 자는 원보(原甫)며 호는 죽간(竹諫)이며 시호(諡號)는 문양공(文襄公)이시다.호(號)뒤에 공(公)을 부치는 것은 존칭이다
할아버지는 중국 팽성(중국 강소성에 있는 현)에서 송나라 인종황후 3년 신묘 서기 1051년 4월 8일에 출생하여 천성이 어질고 강직하며 학문이 순수하여 구경(역경,시경,서경,예기,효경,춘추,논어,맹자,주례)과 천문,지리학에도 능통하였으며 직언을 삼가하지 아니하고 불의와는 타협을 하지 않는 곧은 성품이었다.
할머니는 마한국부인(馬韓國夫人) 롱서이씨(隴西李氏) 이시다.
벼슬은 송나라 정헌대부 한림학사 병부상서(조선시대 병조판서, 지금의 국방장관)를 역임 하시던 중 송나라 신종원풍년간(서기 1078~1085)에 집현전에서 대악[송나라 악명(樂名)]을 의논하여 정하는 자리에 왕이 환관(내시)을 참관케 하자 이의 부당함을 간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고
또한 궁중에서 상명(上命)을 맡은 관서의 환관이 신하의 바른직언을 배제하는 것은 폐하의 선명함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기고 백성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자 간신들이 사소한 것을 침소봉대(적은것을 크게 부풀어 말함)한 것이라고 할아버지를 모함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였다.
당시 백성들 간에 고리(高利)가 성행되어 이를 막기위해 나라에서 저리로 봄에 푸른싹이 돋을때 빌려주고 추수기에 원리금을 상환케 하였으며 또 빈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송나라 재상 왕안석이 제정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은 전답의 푸른싹을 보고 미리 세금을 부과하는 법으로 수확도 하기전에 세금을 부과하는 악법이라고 폐지할 것을 극간하다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정의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하고 뜻을 같이한 팔학사(임팔급,설인검,허동,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와 같이 동쪽나라 고려국으로 건너와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현에 터를 잡아 거주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는 고려 문종36년(송나라 신종원풍 5년 서기 1082년 임술)이니 할아버지 춘추(나이)32세 였다.
출전:江陵劉氏 大宗會 宗報(第 3 虎)-20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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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려)에서의 생활
배편으로 중국을 떠나올 때와 망망대해에서의 서글픈 심정을 시로 남겼고 한국에 와서도 고향과 송황제를 그리워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처음은 8학산 밑에 거주하였으나 나중에 영천군(거타군, 동거군, 영양군)으로 이주하였고 문종시에는 고려정부에서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고려 숙종시(1096-1105)에 입조하여 이후 후손은 고려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살았다. 시조의 처음관직은 고려 선대 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국자감 이었고 후손들은 현감에서부터 대제학, 대사헌, 추밀부사 이었고 시조께서는 고려예종 17년 1122년 2월 7일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고려정부에서는 시조의 높은 학문과 공을 인정하여 장남을 거타군으로 봉하고 차남은 아림군 삼남은 백천군 으로 봉했다.
고려 예종 왕은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 산하 계량동에(지금의 영천시 녹전동 비석촌) 전답을 하사 했다. 시조에서부터 8대까지 주 거주지가 당시 서울이었던 개성과 영천이었고 8대에서 장남은 거타군으로 차남은 옥천으로 분파된다.<옥천은 강릉의 옛 이름이고 강릉 유씨(劉氏)의 중시조가 된다> 고려실록(고려실기)에 의하면 고려 충순왕때 거타군 북 명천면 덕곡산하 계양동<지금의 영천군이며 일명 명산면 화지동(鳴山面 花枝洞)>에 죽간선생의 묘가있고 사패지(賜牌地:왕으로부터 받는 패와 토지)는 사방으로 5리(2km)이고 그중에 위토전(位土田) 즉 밭이 10만평, 밤나무 300주, 대추나무 200주가 있으며 개펄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제실이름은 수송대(水松臺) 정침 5간이라 기록되어있다. 구족보에는 愁送臺(수송대:그리워 하는 심정을 보내고 싶은 마음)라고 적혀있다. (세보1권111쪽) 할머니는 감숙성 농서현 출생 농서이씨 정경부인이시다.
홍석주 /홍세주에 관하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5h1993a
홍석주 [洪奭周]조선 문신·학자 브리태니커홍석주 요약정보
1774(영조 50)~ 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호기(鎬基).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아버지는 우부승지 인모(仁謨)이다.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았다. 그해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검열 등을 역임하고 1802년(순조 2)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후 성천부사(成川府使)·이조참의·병조참판·충청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양관대제학·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34년에는 좌의정으로서 세손(世孫)의 사부(師傅)가 되어 헌종과 인연을 맺었다. 안동김씨 세력의 주변적 신료로서 세도정국에 참여했고 순조가 죽은 후 풍양조씨와 세력을 다투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일익을 담당했다. 1836년(헌종 2) 남응중(南膺中)의 모반에 연루되어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839년 복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통상으로 노론 낙론(洛論) 계열인 김창협(金昌協)·김원행(金元行)을 이었으며,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고염무(顧炎武)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다. 실학(實學)·무실(務實)을 주안으로 하는 박학(博學)을 강조했으나, 고증학(考證學)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함을 주장했다. 주자학설의 인식방법에서도 현상을 통해 본질을 추구한다는 역추(逆推)·추리(推理)의 방법을 취했다. 특히 〈상서 尙書〉 연구에 힘을 기울여 성선설(性善說)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근거를 두고 군주와 소인이 선험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론을 강조했다. 이런 논리 위에서 봉건사회의 위기상황도 기존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부분적인 제도의 변통 및 능력 본위의 신료 선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신권중심정치론(臣權中心政治論)으로 나타났다. 한편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여 〈도덕경 道德經〉을 주해한 〈정노 訂老〉를 지었다. 저서로는 〈연천집〉·〈학해 學海〉·〈영가삼이집 永嘉三怡集〉·〈동사세가 東史世家〉·〈학강산필 鶴岡散筆〉·〈상서보전 尙書補傳〉 등이 있으며, 편서로는 〈속사략익전 續史略翼箋〉·〈상예회수 象藝薈粹〉·〈풍산세고 豊山世稿〉·〈대기지의 戴記志疑〉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洪奭周/洪世周로 한자로 넣고 검색해야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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