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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님 출생년도 중국 고향 한반도 도래년도 고증

송화강 2022. 7. 2. 12:39

평택임씨 나주임씨 시조 임팔급(林八及)님에 관한 출생 및 동도년대를 고증하다

임팔급(林八及)은 서기 765년도 중국 하남성 영보시(靈寶市/灵宝 링바오) 출생이다.

중국하남성 현재 링바오(靈寶) 市는 당나라 임팔급 출생시는  홍농(弘農)이었다.

 

왜? 강릉유씨 유전(劉荃)의 동도(東渡) 년도인 782년과 완전히 일치함에 주목하자!

 

 

 

출전(出典)

 

출전 자료 1

부안임씨 전서공파보(扶安林氏典書公派先祖寶監)

부안임씨전서공파보(종로구 소재 정독도서관 소장본)

윗 글 정리

서기 885년 당 덕종(唐德宗) 흥원(興元)  5년(乙巳)生.  902년(壬戌)년 당년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병부시랑 예부상서를 역임하시다가 당나라 말기에 간신들의 참소를 입고 팔학사(八學士)들과 즉 임팔급(林八及)....이 글을 잠시 정리해 본다

 

자료정리 1.

부안임씨전서공파 선조보감(扶安林氏典書公派 先朝寶鑑) (종로구 정독도서관 소장)

당덕종 흥원 5년(을사년)생.즉 임팔급께서는 당나라 덕종 흥원 5년생이라고 한다.이글의 팩트체크가 필요하다.당나라 덕종은 연호가 3개 인데

 

첫 연호는 건중(建中) 서기 780-783(4년간 사용),

둘째 연호는 흥원(興元) 서기 784년 단 1년뿐이었음.따라서 흥원 5년 부합치 않음

셋째 연호 정원(貞元) 서기 785-805년

 

따라서 임팔급께서 흥원(興元) 885년 을사생(乙巳生)이라함은 부합치않음 .서기 885년은 당나라 덕종때가 아닌 당희종(唐僖宗) 중화(中和) 5년 을사년이다.따라서 임팔급은 당 덕종때도 아니고 ;또한 당희종 때인 서기 885년 생도 아니다.즉 임팔급은 唐德宗 시대의 을사생(乙巳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甲子는 60년 마다 유구한 역사상에서 변함없이 변하여 나간다.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은 아라비아 숫자가 아직 도입되지 못한 시대를 오랜 세월 거쳐오게 된다.따라서 간지로 기록되는 그 시대에 많은 오차가 관련되어 있게 된 것이다.  서기 751년에 태어난 8명의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로 서기 782년 8월에 신라의 구룡포항에 상륙해 오는 여덟명의 학사중에서 지금은 그 후손이 이 한반도에 30여 만명의 후손을 거느린 강릉유씨 도시조(都始祖)거 되신 죽간일집이라는 최초의 신라 시문집을 내신 유전(劉荃)은 751년 생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문중의 족보에는 그리고 국내외의 인터넷 검색에서 보면 1051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5갑자 300년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유전( 劉荃) 한날 한시에 중국 당나라에서 와서 782년 8월에 구룡포항에 상륙한 평택임씨 도시조가 되신 임팔급(林八及)은 그 문중의 수많은 문중 파보를 포함한 모든 족보 자료에서 임팔급님의 생년과 한반도 도래년도등 자료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곳에서 임팔급님의 출생년도는 서기 765년(乙巳)生임을 밝혀내는 것이다.그 이유는 위에 소개하는 평택임씨 문중인 부안임씨전서공파선조보감(扶安林氏典書公派先祖寶鑑 2000년 回想社刊) 제 105페이지에 임팔급(林八及)님은 "당덕종(唐德宗) 을사생(乙巳生)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기록은 전국임씨중앙회에서 2002년 4월에 발간하는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 96페이지에도 동일한 당덕종 을사년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은 당시에 60여세를 넘지않은 시대였어서 당덕종은 서기 742년에 출생하여 805년 사망시 까지 64년을 이 세상에 생존한 인물이며 이 가운데 60갑자로 이루어진 일생가운데 을사년은 서기 765년 단 하나의 을사년이 있을 뿐이다.그럼 서기 765년 임팔급님의 출생년도는 아직 황제가 당나라 제 9대 代宗의 집권중이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 덕종(德宗)은 이름이 이괄(李适)이며 서기 742년 5월 27일 출생하여 서기 764년 2월 23일 황태자(皇太子)가 되며 당나라 제 10대 황제가 되는 것은 서기 779년 6월 12일 제 8대 대종의 사망후 황제의 자리를 물려 받게 된다.

 

당 덕종 이괄의 약력(唐德宗 李适)

가.서기 742년 5월 27일(음력 4월 9일) 출생-805년 2월 25일 사망

나.서기 762년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 統軍平定安史之亂) 762년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한다.

다.서기 764년 황태자(皇太子)가 된다.

라.서기 765년 을사년(乙巳年) 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 林八及) 님은 河南省 靈寶(당나라 당시 弘農) 출생

라.서기 779년 제 9대 대종(代宗)에 이어 당나라 제 10대 황제가 된다.

 

따라서 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님이 출생는 당 덕종은 황태자(皇太子) 신분이었음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제 아래의 전국임씨중앙회(全國林氏中央會)에서 서기 2002년 4.25일 발간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寶監)의 기록을 보자.아래에 상술되어 있다.임팔급께서는 서기 765년 을사생으로써 당 대종(唐代宗) 영태원년(永泰元年) 을사생이다.

 

자료정리 2

전국임씨중앙회(全國林氏中央會) 발간 林氏上系譜鑑에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寶鑑): 2002년 4월 25일 전국임씨중앙회(全國林氏中央會) 발간

및 국립중앙도서관 및 종로구에 위치한 정독도서관에 비치된 평택 임씨,나주임씨 각 문중,소문중 족보에 해당부분의 상계연구조사를 쓴 문장들을 사진본이 족보에 그대로 올라 있다.

 

기재된 내용

林氏上系譜鑑(2002.4.25일 전국임씨중앙회 발간)제 96페이지 기록되어 있는 내용.

팔급공(八及公)은 당 덕종(德宗) 乙巳生이며 당년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역임하시다 간신들에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동도 신라 신덕(神德) 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는 사례(扶安林氏典書公派先祖寶鑑 P 105)라는 기록이 족보에 올라있다.

 

관련 해설:

"팔급공(八及公)은 당 덕종(德宗) 乙巳生이며 당년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역임하시다 간신들에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동도" 라고 2002.4.25일 해당 문중에서 발간한 문집에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평택임씨(平澤林氏)  시조 임팔급(林八及)은 서기 765년 을사년( 乙巳年)생이며,당년 18세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시다가,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동도(東渡)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진위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寶鑑) 2002년 4월 25일 출간됨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寶鑑) 이라는 전국임씨중앙회에서 발간한 임씨상계 연구조사(林氏上系硏究調査)라는 책은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에 장서로 잘 비치 관리되어 있어서 누구나 林氏의 상계 조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문중의 젊은 이들이 항시 연구조사 자료로 긴밀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윗 글의 정확도 검증 (上記文章 正確度 確認)

(1) 팔급공(八及公)은 당 덕종(德宗) 을사생(乙巳生) 이라고 기술해 놓았는데 그럼 당(唐) 덕종(德宗) 때의 을사생이라고한 그 년대를 검증해 보자.

 

중국 당나라 덕종은 이름이 이괄(李适)이며 그의 생몰기간은 서기 742년 5월 27일 태어나서 서기 805년 2월 25일 사망한다.재위(在位) 기간은 서기 779-805년(26년간)이다.

 

서기 742년에서 805년까지의 기간중에서 간지(干支)를 보면 을사년은 서기 765년(乙巳年)이다. 이 해는 덕종이 아직 집권하기 전인 그의 선친인 당 대종(代宗) 이예(李豫)가 집권하던 기간이다.즉 임팔급은 서기 765년 을사생이다.

 

                         평택임씨 시조이신 林八及公께서는 서기 765년 중국 당나라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元年) 을사년에  중국 하남성 링바오(靈寶)市에서 출생한다.

                         출생 당시 당나라 시절의 이곳 지명은 홍농(弘農)이었다.

 

 

임팔급 고향 중국 하남성 영보시

 

 

 林八及 평택임씨 시조의 고향 중국 하남성 영보시(靈寶 Lingbao City)

그리고 다음 귀절은 18세에 등과(登科)하여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항목을 검증해 보자.

그리고 이어서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시다가...라고 나오고 있다. 이점을 검증하다.

 

아래 사진에서 임팔급에 관한 기록사항을 정리해 본다.

 

中祖八及初諱汲十八世爲翰林學士自中原弘農始到平澤

중국에서 온 임팔급 시조의 초휘는 팔급(八汲)이 었으며,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었으며,

고향은 중국 하남성 홍농(弘農:현재의 지명은 영보/靈寶 )市이며,처음 평택에 도착했다.

 

위의 사진은 종로구에 위치한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지금은 정독도서관(精讀圖書館)이 있는데 그곳 족보코나에는 수많은 성씨의 족보들이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특히 평택 나주임씨 족보들은

각 문중에서 발간한 많은 족보들이 보존되고 있다. 이 족보들에 올라있는 사진본들이다.

윗 사진에서 평택임씨 한반도 도시조 되시는 임팔급(林八及)님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中祖八及初諱汲十八世爲翰林學士自中原弘農始到平澤

중국에서 오신 임팔급님의 처음 사용하던 첫 이름은 林八汲이었으며,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등과하였으며,고향은 중국 하남성 홍농(弘農,당나라 한반도 건너 올때의 지명,현재는 영보(靈寶/灵宝)Lingbao city이며, 처음 평택에 도착했다.라고 쓰여 있다.평택임씨 문중 족보에 이처럼 기록되어 있다.

 

 

中祖八及 初諱汲十八歲 爲翰林學士 自中原弘農 始到平澤

中祖八及 初諱汲十八歲 爲翰林學士 自中原弘農 始到平澤

해석:평택임씨 도시조이신 임팔급은 중국에서 오셨으며,처음 이름은 林八汲이었으며,18세에 한림학사에 오르셨으며

        중국 하남성(河南省) 홍농(당나라 당시 지명 弘農)에서 출생하시고,처음 도착한 곳은 평택(平澤)이다.

 

1.우선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역임하시다가 ...이 항목을 검증해 보면 다음과 같다.중국에서 이미 한림학사의 직위오름.

가.중국과 한국은 그 나이를 세는 세수(歲數) 방식이 완전히 동일하다.즉 태어난 해에서 배냇 나이 한살을 더해서 부른다.

 

18세라는 기록은 만 17세가 되면서 서기 765년 태어난 임팔급의 18세 되는 해는 765년에 17년을 더한 서기 782년도가 된다. 한편 강릉유씨 거창유씨 시조이신 유전(劉荃)은 751년생으로 32세에 동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만 31세때인 782년이 된다.

 

위와 같이 모두 평택나주 임씨 시조인 임팔급님과 강릉 거창유씨 시조인 유전(劉荃)의 한반도 구룡포 상륙 연도는 동일하다. 이처럼 전국임씨 중앙회가 2002년 4월 25일 발간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寶鑑)의 기록은 강릉유씨 문중의 문집인 유전이 남긴 죽간일집(竹諫逸集)에 나타난 기록과 일치한다.

 

林八及=劉荃=한반도 상륙년도 동일함=서기 782년 구룡포

 

다시 한번 상술(詳述)코자 한다.

임팔급 출생 서기 765년+만17세= 782년 (동일함)        구룡포항 상륙

유  전 출생 서기 751년+만31세=  782년  (동일함)       구룡포항 상륙

 

이 두분 서기 782년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 3년) 경북 구룡포항에 상륙한 중국 당나라 건중의난(建中之亂)과 악신 재상(惡臣宰相) 노기(盧杞)의 만행을 피하여 한반도로 건너오는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 8인중 두분이다. 그 한반도 상륙 연도가 동일하며,서기 782년도 8월에 구룡포 상륙한다.일치하고 있다.이 자료는 강릉유씨 문중의 각종 자료와 유전께서 남기신 죽간일집(竹諫逸集) 자료,그리고 전국임씨상계보감(2002년 발간)의 기록과

국립중앙도서관 및 종로구 정독도서관에 비치된 평택임씨 각 문중에서 발간된 족보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다.

 

 

2.그럼 이 전국임씨중앙회에 나타난 임팔급의 관직 한림학사에 관하여 알아 보자.

이 임팔급의 관직에 관하여는 강릉유씨 거창유씨의 도시조인 유전이 남기신 죽간일집의 목판본이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고 이 소장본의 영인본이 서울 서초동 소재의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에 디지탈 전자 기록 문서로 저장 관리되고 있는데 이 기록에 나타난 임팔급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유전(劉荃)의 子 견규(堅規):配貞敬夫人羅州林氏父中朝吏部尙書八及) 즉 강릉유씨 문집에도 임팔급의 관직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나오고 있다. 중조(中朝)란 중국조정을 뜻함.

 

 

즉 임팔급은 18세인 서기 782년 강릉유씨 시조인 유전(劉荃)등 팔학사로써 한반도에 도착한 그 해 당시 중국에서의 지위는 18세에 한림학사에 등과한 후 그 관직이 이부상서(吏部尙書)였음을 알 수있다.유전(劉荃)이 남긴 죽간일집에는 132수의 시문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2首의 시문(詩文)이 임팔급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다.두 수의 그 시문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죽간일집의 임팔급관련 시문1: 만추증임학사 팔급(晩秋贈林學士八汲)

(2)죽간일집의 임팔급관련 시문2: 동임학사등강정( 同林學士登江亭)

위의 두 수의 시문에서 칭하는 林學士 임팔급의 호칭은 바로 중국 당시의 한림학사(翰林學士)였음을 말하고 있다.

 

유전(劉荃)은 일관되게 함께 온 본인을 제외한 7명의 중국에서 함께 온 동료들에게

시문을 한 두수씩 전해 주면서 그 중국에서의 관직을 함께 불러 주는데 두수의 시문에 나타난 임팔급의 칭호를 임 학사로 호칭하고 있다.그리고 林八及의 한자 표기가 위의 유전이 남기 죽간일집에서 八及이 아닌 八汲으로 나타난 것은 각종 문집에서

임팔급의 초휘(初諱)는 八汲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점과 일치한다.林氏上系調査 기록인 이 임씨상계보감 제 119페이지의 임팔급 기록에도 초휘(初諱)가 八汲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강릉유씨 죽간일집에서 말한 八汲과 일치한다.

 

평택임씨 나주임씨 시조이신 임팔급(林八及) 님의 동도년도는 서기 782년 (신라 37대 선덕왕 3년)으로 강릉유씨 시조 유전의 동도 년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서기 800년 이후의 동도년대 이론과은 다른 것이다.그리고 임팔급님의 출생이 덕종조 을사생 즉 서기 765년도라고 이미 2002년 해 문중에서 발급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동도해온 팔학사의 일원인 강릉유씨 유전(劉荃)의 동도(東渡) 년도와 완전 일치하는 서기 782년인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일 아닌가.함께 한 배를 타고 구룡포 해안을 통하여 한 날 한 시에 도착했다면 어떻게 그 상륙년도가 서로 상이 할 수가 있겠는가? 나주 평택임씨 도시조인 임팔급님의 동도년도와 강릉 거창유씨 시조인 유전(劉荃)의 동도년대는 서기 782년 상호 완전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이 해는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 3년이며,중국의 당시 연대는 당나라 덕종(德宗) 연호(年號) 건중(建中) 3년인 것이다.

 

3.왜 이러한 임팔급의 한반도 동도년도와 그의 출생년도를 고증하고 있는가.

이에 관하여는 한국역사에서 현재 미스테리로 되어 있는 신라 38대 원성왕릉에 있는 서역인을 닮았다고 하는 문인석과 무인석의 그 비밀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그 해답을 풀어 줄 열쇠가 이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중요한 테마인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 건중 3년 서기 782년도에 한반도에 건너온 팔학사를 수많은 한반도 중국간의 팔학사팀들의 한반도 동도와 구별하기 위한 그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어서 중국에 건너 올때에 그 연호가 건중(建中) 3년 (서기 782년) 이었음을 감안해 이 팔학사의 명칭을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라고 불러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이 팔학사의 신라 원성왕 14년을 통하여 신라 조정에 합류하여 이룬 획기적 공헌에 관하여,즉 매우 다이나믹한 당나라 조정에서 이미 현직을 거친 고급 관료출신들의 신라 조정에의 합류가 신라하대(新羅下代) 정치문화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저 온 때문이다.많은 연구가 기대된다.임팔급의 출생년도는 서기 765년이며 ,같은 2002년 4월 25일 출간된 임씨 상계보감 상계보감 119페이지에는 임팔급의 출생지를 즉 고향을 중국 하남성 홍농(弘農)이라고 적고 있다.

 

홍농(弘農)은 중국 당나라때의 서기 782년도 임팔급의 동도 당시의 지명으로서 지금은 그 이름 즉 현재의 지명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영보시(靈寶市)이며 중국어 발음으로는 灵宝市(Lingbao 市)이다.강릉유씨 시조 유전의 고향도 역시 같은 하남성 낙양시 (洛陽市) 河陽(현재는 낙양시 吉利區)로써 임팔급님의 고향 영보시와는 가까운 같은 하남성이다.

 

당 나라 당시의 하남성 낙양은 현재의 섬서성 장안(長安)과 더불어 낙양(洛陽)이 양경(兩京)으로 불리었으며 황제들은 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두 도시에 궁궐을 갖고 있으며,수시로 왕래하고 다녔다.이러한 당시의 역사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지리 문화적 시대 배경을 함께 이해함으로써 그 들의 시대 고증에 도움되기 위함이다.

 

당시의 당대 대 시인인 두보(杜甫)의 고향도 같은 하남성(河南省)으로서 공의시(鞏義市)이다.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문인들의 시대가 이 낙양과 장안성을 중심으로 이루어 진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바로 낙양,장안을 중심으로한 당시의 그 양경(兩京)이라는 엄청난 문화권 내에서 탄생하는 그 당시 하남성은 바로 지금으로 말하면 중국의 수도권(首都圈)이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젊은 이들이 장안성(長安城)의 궁중교육기관을 거쳐 한림학사에 등과하는 등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서기 782년도 8월에 한반도 당시 신라 선덕왕(宣德王) 3년 경북 구룡포(九龍浦/당시 지명 창주용포,蒼州龍浦)로 상륙한 八學士의 名單은 아래와 같다.

 

임팔급(林八及) 평택 나주 임씨 시조

유전 (劉荃) 강릉 거창 유씨 시조

송규 (宋奎) 남양 송씨 시조 御史大夫.......

 

전남 고흥군 동강면 중심 세거 이 세 문중은 한반도에 족보를 가진 번성한 문중으로 살고 있다.

 

설인검(薛仁儉)

허동 (許董)

최호 (崔冱)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

 

이들 다섯분의 후손은 현재 한반도에 그 후손의 족보가 확인되고 있지 않는 문중이다.

 

 

이 고증문은 함께 동도해 온 팔학사의 한분인 강릉유씨 거창유씨 시조이신 유전(劉荃)이 남긴 죽간일집(竹諫逸集)의 시문에 나타난 내용과 함께 이루어 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신라문학으로써의 관련사항도 검토됩니다.

 

지금 이 고증문은 강릉유씨 족보 및 죽간일집 자료는 물론부안임씨전서공파 족보를 비롯한 2002.4.25일 전국임씨(林氏)문중에서발간된 자체 임씨상계보감기록에서 해설하는 사항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한반도 역사고증에 필요한 사항을 역사고증을 위한  순수한 제안이자 고증문임을 諒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서기 782년 8월 구룡포항에 상륙한 건중팔학사 8인의 당나라 고급관료출신 학자들은 784년 선덕왕 5년 갑자년 봄

에는 이미 신라 경주 궁궐에 들어가 근무하고 있음이 밝혀진다.윗 사진은 782년 8월 당나라 궁궐에서 신라 구룡포항으로

상륙해 온 이들 임팔급을 비롯한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 여덟명이 서기 784년 갑자년 봄에서 부터 신라 38대 원성왕을 

모시면서 신라궁궐에 근무한후 원성왕이 사망하자 그의 묘소는 경주 외곽인 외동읍(外東邑) 괴릉리(掛陵里)에 세워지며 이

들의 잔영이 원성왕릉 입구에 세워져 있다.즉 화표주(華標柱) 무인석상(武人石像) 문인석상(文人石像) 그리고 사자상(獅子像)등이 서있다. 중국풍(中國風)의 원성왕릉 조영물들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한글파일 고증문에 상술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 제 37대 선덕왕은 785년 정월 13일 서거하고,이어서 신라 제 38대 원성왕이 집권하며 서기 798년

12월 서거 할 때까지 이 782년 8월 구룡포로 상륙한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는 원성왕 집권 14년 함께한다.

강릉유씨 시조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서기 800년 10월 영천(永川) 녹전동으로 이거(移居)하며 그곳에서

8005년 3월 그곳에서 수송대(愁送臺)를 짓고 살다가 서기 822년 2월 사망하여 그 곳에 묻힌다.

 

 

이 역사적인 고증문은 이러한 단편적인 설명으로는 부족하여 그 전체를 설명한 고증문을 아래에 올려 놓는다.

 

죽간일집과 신라역사

죽간일집과 신라역사.hwp
12.0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