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임씨 시조 임팔급(林八及)님과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 연대를 고증하다.
林八及과 劉荃을 考證하다.
(1) 강릉유씨 都始祖 유전(劉荃) 출생년도 서기 751년(辛卯生): 唐玄宗 天寶 10年(신묘생/辛卯生)
출생지:중국 하남성 洛陽 하양(河陽) 출생
(2) 평택임씨 都始朝 임팔급(林八及) 출생 서기 765년(乙巳生): 唐代宗 永泰 元年(을사/乙巳生)
출생지:중국 하남성 靈寶/灵宝(Lingbao) 출생
1. 머릿말
서기 782년 당나라 덕종 建中3년도에는 중국 당나라에서 한반도 신라로 8명의 고급인재집단이 경북 구룡포항을 통하여 들어오며,이들은 서기 784년부터 신라 38대 원성왕이 서기 798년 사망할 때까지 신라궁궐에 들어가서 신라 현실 정치에 참여하며,한국 정치사회의 발전에 획기적 동력을 제공한다.이들 782년에 신라땅인 구룡포항을 통하여 오는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 가운데 오늘날까지 그 후손이 번창하며,족보를 지닌 문중은 평택임씨 임팔급(林八及) 후손,강릉유씨 유전(劉荃) 후손 그리고 남양송씨 송규(宋奎) 후손이다.그리고 그 문중의 족보에서 출생년도와 한반도 상륙년도를 밝히고 있는 문중은 평택임씨 임팔급님 문중과 강릉유씨 유전 시조의 문중이다.남양송씨 송규 도시조 문중의 족보에는 926년을 한반도 도래년도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강릉유씨 문중의 족보에서는 유전 도시조(都始祖) 의 출생년도 서기 1051년,한반도 도래년도 1082년,맏아들 견규(堅規)의 출생년월일을 1096년 (丙子生) 3월 15일로 기술하고 있으며,평택임씨 임팔급 도시조는 문중의 부안임씨전서공파선조보감(2000년 부안임씨전서공파대종회간)과 부안임씨전서공파문헌록(1994년 부안임씨전서공파종무소간)에서 共히 임팔급 도시조님의 한반도 도래 년도를 902년으로 적고 있다.그리고 2002년 4월 전국임씨중앙회에서 발간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 제 96항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두 문중의 도시조님들의 출생년도와 한반도 도래년도를 계산할 수있는 단서는 이 이미 두 문중에서 각각 기술하고 있는 기존자료에서 修正해서 밝혀 낼 수있다.
결론부터 기술하면 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님의 출생년도는 서기 765년 중국 하남성 영보(靈寶/灵宝市)로써 당나라 출생당시의 지명은 홍농(弘農/弘农)이었다.782년 18세 나이로 건중팔학사 일원으로 한반도에 건너 온다.18세에 이미 한림학사 등과한 신분이었다.강릉유씨 유전 도시조께서는 서기 751년도 중국 하남성 하양(河陽 오늘날 지명은 하남성 낙양시 吉利)에서 출생하며 건중팔학사의 일원으로 서기 782년 32세의 나이로 한반도에 오게 된다.각기 평택임씨 문중과 강릉유씨 족보기록은 갑자착오(甲子錯誤)를 수정하고 나면 완전히 정확하다.
즉 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님의 연대는 위의 부안임씨문중의 족보에 기술된 서기 902년도 한반도로 건너 왔다고 하는 그 기록에서 잘못된 2갑자 120년을 빼어주면 옳게 된다.
2갑자 착오분 즉 60년x2갑자 =120년 에서 902년-120년=782년도 도래년도,그리고 따라서 출생년도의 修正도 같은 방식으로 782년-17년(만나이를 차감함)=765년 출생이 된다.
강릉유씨 유전 도시조의 경우는 현재 출생을 서기 1051년,한반도 도래를 1082년 고려문종36년으로 되어 있으나 300년 착오분을 제하면 ,출생년도는 현재 족보기록 서기 1051년도 출생에서 300년을 차감하여 옳게 수정하면 서기 751년도 중국하남성 하양에서 태어나고 동도년도(東渡年度) 1082년-300년 =782년이 되면서 동도년도가 평택임씨 임팔급님 강릉유씨 유전 도시조 共히 서기 782년 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782년 도래년도가 일치하는 것은 알겠는데 평택임씨 2갑자 즉 120년착오분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를 설명코자 한다.부안임씨전서공파문헌록과 부안임씨전서공파족보기록에서 서기 902년을 한반도 동도년도라고 기술하고 있다.그리고 역시 출생년도를 885년 乙巳(을사) 생이라고 적고 있다.902-885=17세 (만나이) 이 계산은 완전히 정확하여 빈틈이 없다.그럼 부안임씨 족보에 기록하고 있는 기록을 보기로 하자.이렇게 쓰여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나라의 족보를 정성껏 보존 관리하는 대표적인 기관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 종로구 구 경기고등학교 부지를 이용하여 설치 운영중인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두 곳이 대표적인 기관이다.그곳에는 공히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 자료들이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보존 관리되고 있는 평택임씨 문중의 자료들을 검색해 보기로 한다.아래에 복사본을 떠와서 이곳 하단에 올려 놓았다. 즉 扶安林氏典書公派先祖寶鑑(부안임씨 전서공파 선조보감)이다. 그 곳 부안임씨 전서공파 선조보감의 제 105페이지 기록을 보기로 한다.아래와 같다.
東渡始祖忠節公林八及(동도시조 충절공 임팔급)
事蹟
서기 885년 唐德宗 興元五年(乙巳)生 902年(壬戌) 당년 十八歲로 登科하여 翰林學士를 거쳐 兵部侍郞 禮部尙書를 역임하다가 唐나라 末期에 奸臣들의 참소를 입고 八學士 즉 林八及 薛仁敬 許董 劉荃 宋奎 崔沍 權之奇 孔德狩등 八賢이...........................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그럼 이 글을 자세히 해석해 보기로 한다.
해석
1. 윗 글에서 임팔급님의 출생년도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평택임씨 문중의 도시조 임팔급님의 출생년도는 서기 885년 당나라 덕종때 연호(年號) 興元五年 을사년생이라는 것이다.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윗 글에서 서기 885년에 태어 났다고 하는 것은 120년을 그 문중의 후손들이 2갑자 즉 60갑자X2=120년을 발생시킨 것이다. 그 이유는 당나라 덕종때 연호 흥원 5년 을사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럼 자세히 보기로 한다.흥원(興元)은 당나라 德宗의 3개의 연호 즉 건중(建中) 흥원(興元) 정원(貞元) 세 개의 연호중에서 두번째 연호이며 이 흥원이라는 연호는 단, 1년만 사용된 후 바로 정원(貞元)으로 바뀌며,덕종이 사망하는 서기 805년까지 내리 21년간을 사용한다.따라서 윗 평택임씨 전서공파 선조보감의 글에서 기록한 흥원(興元) 5년이라는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흥원이란 서기 784년 단 1년만 사용된 연호로써 서기 784년은 흥원 원년만 있을 뿐이다.이어서 다음해인 785년은 정원(貞元) 원년(元年)이다.
덕종(德宗)의 연호 변화
당나라 덕종은 서기 742년 5월 27일 (음력: 4월 9일) 출생:당나라 제 8대 황제 代宗의 장자로 태어난다.
덕종은 서기 764년 2월 23일 황태자(皇太子)에 오른다.(林八及 님께서는 다음해인 765년에 출생한다)
덕종은 서기 779년 6월 12일 당나라 제 9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1994년 평택임씨 문중의 부안임씨 문중에서는 扶安林氏典書公派先祖寶鑑을 발간한다. 이 책은 지금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正讀圖書館에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이 부안임씨 전서공파 선조보감( 扶安林氏典書公派先祖寶鑑)
제 105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다음:서기 八八五年 唐德宗 興元五年(乙巳)生 九0二年(壬戌) 당년 十八歲에 登科하여 翰林學士를 거쳐 兵部侍郞을 역임하시다가 唐나라 末期에 奸臣들의 모함을 받고 8학사 함께 동도해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이 기록은 그 후 2002년 4월 25일 발간되는 全國林氏中央會에서 발간하는 林氏上系譜鑑에도 동일하게 올라 있다. 이 글의 아랫 부분에 상술하는 임팔급님의 출생년도가 765년이며 만 나이 17세 세는 나이 18세에 8학사 일원으로 한반도로 건너 온 사유와 시기를 아주 상세히 기술하게 된다.
단, 이곳에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평택임씨 도시조이신 林八及님께서 한반도에 건너 오신 년도인 765년은 아직 덕종이 왕이 되기 이전인 즉 그의 부친이신 당나라 제 8대 대종(代宗) 황제 때임을 이야기 하는 이가 있어 서술하게 된다.
덕종은 서기 764년 2월 23일 황태자(皇太子)에 오른다.
덕종은 서기 779년 6월 12일 당나라 제 9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764년에 황태자가 되었으므로 이듬해인 765년은 황태자의 신분이다. 황태자란 현재 황제가 유고시에 바로 이어서 차기 황제가 되는 신분을 나타낸다.서기 765년 황태자의 신분인 차기 황제 당 德宗이 될 분의 연대를 기록하고 있다.
건중(建中) 780년,781년,782년,783년
흥원(興元) 784년
정원(貞元) 785년-805년 (21년간 사용)
왜 흥원은 단 1년 뿐일까.
해설
해설: 덕종의 아버지 당나라 제 8대 황제 대종(代宗)은 서기 726년 10월 13일 출생하여 779년 5월 21일 사망한다.그리고 그 아들 덕종(德宗)은 742년 4월 9일 출생하여 764년 2월에는 당나라 장안궁에서 황태자(皇太子)로 책명된다.평택임씨 도시조이신 임팔급님은 그 이듬해 즉 덕종이 황태자가 된 764년 이듬해인 서기 765년 하남성 링보(靈寶)에서 출생한다.
다시 흥원 원년 이야기로 돌아간다. 왜 흥원 5년은 없고 단지 흥원 원년 즉 784년 단 1년 뿐인가를 보자.흥원(興元)이란 연호는 덕종이 황제가 된고 나서 황태자 기간(764-779년)에 안록산의 난 (755-763)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지방 군벌들의 반란으로 소란하던중 779년 6월에 당나라 제 9대 황제가 되자 바로 지방군벌들을 다스리기 위한 삭번정책(削藩政策)을 구상하던중 성덕절도사 이보신(李寶臣)이 죽자 그 아들 이유악(李惟岳)이 그 아버지 다스리던 영지를 물려받기를 덕종에게 올린다.그러난 덕종은 당연히 거절한다.그러자 이유악은 인근의 번 장수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서기 781년 건중(建中) 2년에 발발한 건중지란(建中之亂)이다. 그리고 이유악은 그 전란중에 패하여 사망한다.그러자 이번에는 그 죽은 이유악의 영지를 두고 다시 인근 번들의 장수들간에 다툼이 발생하는데 이 전란은 사진지란(四鎭之亂)이라고 한다. 이 와중에 이 전란이 극심해 지자 당 덕종은 황급히 섬서성 건현(乾縣)으로 몸을 피한다.간신히 그 후 전란이 진정되자 이제 황궁으로 돌아 와서 자신의 삭번정책을 취소하고 전란이 평정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위하여 그 연호를 건중(建中)에서 흥원(興元)으로 바꾼다. 그리고 전국에 전란으로 일어 났던 문제에 관하여 전국적 사면령을 내린다. 흥원이라는 연호는 그렇게 784년 1년을 사용하고 이듬해는 정원(貞元)이 된다. 따라서 평택임씨 전서공파보에 기록된 임팔급님의 흥원 5년 출생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임팔급님의 출생이 을사생(乙巳生)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事實)이 되고 있다.
그럼 이제 평택임씨 전서공파보 제 105페이지에 기록된 잘못된 사항들은 삼제(芟除)한 후 그 事實만 추려보기로한다. 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林八及)님은 당 덕종 을사생이라는 것이다. 그럼 당덕종 출생 서기 782년,황태자 책명 서기 764년 황제등극 779년 사망 805년의 일생중 을사년(乙巳年)은 서기 765년 하나 뿐이다.
사람의 수명은 옛날에 덕종이 782년 출생하여 805년까지 63년을 살아 가는 중에 을사년은 단 하나뿐이다. 간지(干支)는 동양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역사상 오류들을 검증하는 아주 유용한 자료인 것이다.덕종이 63년간 사는 동안 을사년(乙巳年) 단 하나 서기 765년 하나 뿐인 것이다. 평택임씨 都始祖 임팔급(林八及) 님의 출생년도는 서기 765년 을사년인 것이다. 당나라 덕종은 아직 765년도에 아버지 대종(代宗)의 생존기간이어서 아직 황제는 되지 못하였지만 765년은 엄연히 덕종 이괄의 황태자(皇太子)신분 서기 764-779 황태자의 신분중에 속하는 년도인 것이다.그래서 평택임씨 전서공파보에 덕종 을사년(765년)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인간의 수명이 옛날 환갑을 거의 넘지 못한 시대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귀중한 기록은 문중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럼 검산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강릉유씨(江陵劉氏) 도시조 유전(劉荃) 문중의 족보기록을 보기로 한다.현행 강릉유씨 문중의 도시조 유전 기록은 서기 1051년에 출생하여 34세인 1082년 고려 문종 때에 한반도에 8학사 일원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墓에서 출토된 묘지석(墓誌石)에는 건중(建中) 병자년(796년)에 그의 맏아들 견규(堅規)가 탄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행 견규의 족보 기록은 1096년 병자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럼 1096년에서 300년 5갑자 착오분을 수정해 보기로 한다.
수정(修正) 현행 수치에서 모두 300년씩 차감하면 된다.
유전의 맏아들 유견규(劉堅規) 현 기록 1096년생-300년=796년(당 덕종 丙子年生)
그리고 모든 기록을 300년씩 차감하면 강릉유씨 도시조 유전(劉荃) 출생 현행 1051년에서 1051-300= 751년생,동도년도 1082년-300년=782년도.이 782년도는 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님의 동도년도 782년과 일치한다. 당연한 것아닌가.즉 평택임씨 임팔급님의 출생년도가 서기 765년 乙巳生이며 18세(만 17세 해당)에 한반도에 건너 왔다고 평택임씨전서공파보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765년+17년=782년이 되면서 강릉유씨 도시조 782년 동도(東渡) 년도와 완전 일치하게 된다. 선조들의 기록은 정확했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세월을 살아 오면서 그 간지(干支)의 갯수에서 착오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이러한 인터넷 정보시대를 맞이하여 기뻐할 일이다.
그리고 나서 기록은 저의 "죽간일집과 신라역사"라는 고증문에 자세히 기록된다.평택임씨 임팔급님의 딸은 강릉유씨 유전 도시조의 맏아들 유견규와 혼인을 하게 되며 저도 평택임씨 문중의 따님의 후손이다. 그 기록은 강릉유씨 문중의 족보와 평택임씨 문중의 족보에 공히 기록되어 있는 사항이다.
"서기 902년 18세 나이로 한반도 오다"라고 기재됨
임팔급님의 동도년 서기 782년과 강릉유씨 유전(劉荃) 동도년도 일치
부안임씨 전서공파 기록 임팔급님의 동도년도 서기 902년으로 기재되어 있음
902년-120년(2갑자 착오분120년 차감=서기 782년도 한반도 상륙
강릉유씨 현행 족보 도시조 유전의 동도년도 서기 1082년 8월로 기록
1082년-300년(5갑자 착오분 300년 차감=서기 782년도 한반도상륙.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강릉유씨 족보에는 도시조 유전의 출생년도가 서기 1051년이고 한반도 도래년도가 1082년 32세에 한반도에 건너 왔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강릉유씨 족보는 5갑자 즉 300년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강릉유씨 유전(劉荃) 도시조는 782년 8월에 팔학사 공히 한반도에 오신후 처음 낮선땅에 오셔서 그냥 구룡포항에 배를 내려 상륙한후 바로 그곳에서 모동(茅棟)을 짓고 살다가 1년 반이 지난 서기 784년 봄(甲子春)에는 당나라 덕종이 신라궁궐에 신라 제 37대 선덕왕(宣德王)의 책명(冊命)을 위해 보내온 당나라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을 만나 지은 두 수(首)의 시문이 유전 도시조가 남긴 죽간일집 목판본에 실려있다.
즉 782년 구룡포항 상륙,784년 봄 신라 궁궐에서 근무중,서기 798년 신라 제 38대 원성왕(元聖王) 사망후 2년 지난 서기 800년 10월에 경주를 떠나 경북 영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서기 822년까지 사시다가 그곳에 묻혀 있는데 1902년도에는 족인 유인원(劉仁源)에 의하여 지석(誌石)이 발견되며 그 지석의 묘지명(墓誌銘)에는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堅規生"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여기서 건중병자(建中)은 당나라 덕종의 연호이며,덕종 치세기간 780-805년간 병자년은 서기 796년이다.그리고 3월 15일에 맏아들 견규(堅規)가 태어났다는 기록은 현행 강릉유씨 족보의 유전도시조의 맏아들 견규(堅規)의 생년월일 서기 1096년 3월 15일과는 날자까지도 똑같은 꼭 300년차이가 남으로써 현행 강릉유씨 족보의 모든 현행족보는 5갑자 300년의 착오를 지닌체 전해 오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현재 안동에 소재한 한국국한진흥원 장판각에 보존되고 있는 죽간일집(竹諫逸集) 목판본(木版本)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죽간일집은 유전 도시조가 남긴 시문집이며,현재 목판은 안동 국학진흥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으며,그 영인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어서 항시 출력이 가능하다.
망명동기
서기 782년도에 중국 당나라 덕종(德宗)의 연호 건중(建中) 3년에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중국의 덕종황제의 삭번정책(削藩政策)에 반대하는 지방 군벌들의 연합세력이 반란을 일으킨다.덕종의 연호 건중2년(782년)에 일어난 각 지방을 다스리는 번(藩)의 군벌들이 연합하여 덕종황제의 삭번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군벌의 난리이다.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 명단
평택나주임씨의 임팔급(林八及) 도시조와 강릉거창유씨 유전(劉荃) 도시조 두 분은 중국에서 여타 6학사와 함께 모두 8학사가 배를 타고 당나라때 한반도로 건너 오셨다.
함께 東渡해온 팔학사 명단은 아래와 같다.
팔학사 명단
후손이 밝혀진 문중 3명: 임팔급(林八及) 유전(劉荃) 송규(宋奎)
후손이 밝혀지지 않은 문중 5명: 許董 權之奇 孔德狩 薛仁敬 崔沍
후손이 밝혀진 세 문중의 동도년대 기록은 서로 相異하다.
평택나주 임씨 도시조 林八及: 서기 850년경
남양 송씨 도시조 宋 奎: 서기 926년
강릉거창유씨 도시조 劉 荃: 서기 1082년
2. 각 문중의 현재 관리 상태
가.남양송씨 宋奎 후손 문중
남양송씨 송규 후손 문중은 전남 고흥군 동강면을 중심으로 많이 세거하고 있다.
문중의 세보에 의하면 서기 926년 당나라 한림학사로 난신의 참소로 서기 926년 신라 景哀王三年 동료 7학사와 함께 와서 경순왕때 이부상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여타 기록은 전무하다.
나.평택나주임씨 林八及 후손 문중
東渡 年代 調査 팔급(八及)公의 동도(東渡) 연대는 상계(上系) 정립(定立)에 중요한 요인으로서 지금 까지는 당나라 문종(文宗)조(827-840)이라는 설과 후당(後唐) 명종(明宗)조(926-933)라는 설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서기 850년~900년 전후라고만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上系 연구 과정에서 논자(論者)가 조사 한 바에 의하면 서기 870년 전후가 타당하다고 본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글을 해당 문중의 글 검색에서 볼 수있다.
다.강릉거창유씨 유전 도시조에 관한 동도년대 족보 기록
강릉유씨 족보와 거창유씨 족보는 공히 劉荃 도시조의 동도년대를 1082년으로 기술하고 있다.중국 宋나라 한반도 고려 시대에 동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3.문제점
4.지금까지 세 문중의 도시조 史蹟 보존 관리 실태
가.남양송씨 송규 후손 문중
거의 기록사항이 발견되지 않는다.
나.평택나주임씨 임팔급 후손 문중
(1) 林八及 묘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 경기도 평택군 안정리에 임팔급 도시조의 입상을 세웠다.
(3) 중국 복건성 해안에 임팔급 도시조의 渡海處 비석을 세워 관리하고 있다.
다. 강릉거창유씨 유전 후손 문중
(1) 墓所는 경북 영천시 녹전동에 실존한다.
(2) 죽간일집(竹諫逸集)이라는 유전(劉荃)이 직접 남긴 문집이 전해 오고 있다.
(3) 유전(劉荃)의 묘소에서 중국 당(唐)나라 연대가 표기된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었다.
5.각 문중의 동도(東渡) 년대 관리 실태
가.남양송씨 송규 후손 문중
서기 926년 동도설이 문중의 세보에 기록된 사항 이외에는 어떠한 기술도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나.평택나주 임씨 임팔급 후손 문중
서기 2001년 12월 11일 당시 평택나주 임씨 임방현(林芳鉉) 대종회장 이하 중국 복건성(福建省) 혜안현(惠安縣) 동령(東岭) 팽성촌(彭城村) 해안에 팔급공(八及公) 도해처(渡海處) 비석을 세운 후 왕래하고 있다.
다.강릉거창유씨 유전 후손 문중
(1).묘지석(墓誌石)의 출토(出土)와 연대가 기록된 지석문(誌石文) 발견 및 보존
1902년 경북 영천시(永川市)에 소재한 유전(劉荃) 도시조(都始祖)의 묘소에서 출토 된 묘지석(墓誌石)에 기록된 글에는 서기 796년 3월 15일 아들 견규(堅規)가 태어 났다고 적혀 있다.
(2) 이 지석(誌石)은 1902년 강릉유싸 문중의 劉仁源에 의하여 발견되고 필사(筆寫) 후에 판각(板刻)되어 지고 그 판각본은 현재는 경북 안동에 있는 안동국학진흥원 장판각(藏版閣)에서 잘 보존 관리되고 있으며,仁源祖께서는 이 지석을 발견후 필사하고 매립했으며, 이 매립된 지석은 다시 한번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1980년 10월 1일 지석은 대전의 강릉유씨종친회에서 대대적인 사초(莎草) 행사일에 현장에서 다시 한번 확인케 된다.劉春植(당시 대전 유씨 종친회 총무:1934년생 2021.5.30일 현재 대전 거주중)
6.평택나주 임씨 임팔급(林八及) 도시조의 고향
임팔급 도시조의 중국 고향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영보시(靈寶市)이다.
<근거>
현재 평택 임씨 문중에서는 임팔급 도시조의 중국 고향을 아직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도 발간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 제 119항에 실려 있는 임씨상계연구조사 보고서에 실려 있는 임씨세가대동보 권지일(林氏世家大同譜卷之一)에 기록된 팔급(八及)의 기록을 보면 “初諱汲十八歲爲翰林學士自中原弘農始到平澤”이라고 적혀 있다.
임씨상계연구조사 보고서에 기록된 글
“初諱汲十八歲爲翰林學士 自中原弘農 始到平澤”
임팔급께서는 한
이를 해석하면 이렇다.임팔급은 그 초휘가 及아닌 汲이었다고 한다.그리고 18세에 한림학사였는데 중국 하남성 홍농(弘農:현재의 지명으로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영보(靈寶/灵宝 중국하남성 링바오市)에서 처음 평택에 도착했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 강릉거창 유씨 도시조의 고향 중국 하남성 낙양시 길리구(吉利區:당시 지명 河陽)와 함께 멀지 않은 거리의 황하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임팔급 조상님의 고향 靈寶/灵宝市
중국 임팔급 님의 고향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영보시(靈寶市)이다.灵宝市(Lingbao city)
"中祖八及初諱汲十八世爲翰林學士自中原弘農始到平澤"라고 기록됨
중국에 조상을 둔 임팔급(林八及) 시조의 최초의 이름은 임팔급(林八汲)이었으며,18세에 한림학사를 하고,고향은
중국 하남성 홍농(弘農:현재는 하남성 링바오市/靈寶市/灵宝市/Lingbao city)이며,처음에 평택에 도착했다.
"中祖八及初諱汲十八世爲翰林學士自中原弘農始到平澤"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 소장 평택임씨 족보 열람
7.평택나주 임씨 임팔급 도시조의 동도년대는 서기 782년으로써 유전 도시조와 동일하다.
임팔급 도시조의 동도년대는 서기 782년도로써 유전 도시조와 동일하다.
<근거>
2002년도에 전국임씨중앙회에서 발간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 제 96항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게재되어 있다.
임씨상계연구조사(林氏上系硏究調査) 보고서
2,八及公 東渡 年代와 東渡에 관한 調査
1), 東渡 年代 調査
(3) 팔급공(八及公)은 당 덕종(德宗) 乙巳生이며 당년 18세에 등과하여,한림학사를 역임하시다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동도..............
위의 문장을 분석하면 이렇게 된다.
<해석> 唐 德宗은 중국 당나라 황제로써 재임기간은 서기 780-805년간이다.
당 德宗은 25년 재위기간중 干支에는 을사년(乙巳年)은 해당되지 아니하고 선친인 대종(代宗)의 재위 기간중인 서기 765년이 바로 을사년(乙巳年)이다.
따라서 八及의 생년이 당 덕종 乙巳生이라고 한 것은 선친인 代宗의 연호 永泰元年 을사년인 것이다.그러나 당나라 덕종은 林八及 님께서 출생하는 765년 1년 전인 서기 764년 2월 23일에 황태자(皇太子)가 된다.황태자란 현재 황제가 유고시에 바로 이어서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 신분이다. 덕종은 742년-805년을 살며 64년 일생중에서 임팔급님이 출생하는 을사년(乙巳年)은 오직 한번 밖에 없다.즉 덕종의 황태자(皇太子) 신분일 때인 서기 765년 을사년에 출생한다.
따라서 "八及"의 출생년도는 서기 765년 을사년(乙巳年)인 것이다.동양의 역사 기록에 있어서 수많은 연대착오중 왕의 이름이나,중국 황제의 이름을 착오로 기록한 예는 부지기수이지만 다행인 것은 동양의 역사 기록에는 꼭 그 지주(支柱)가 되는 간지(干支)가 있고 이 간지는 기나긴 역사 선상에서 한치의 변함없이 60년 마다 그 주기(周期)를 돌아 오고 있어서 거의 모든 연대 착오가 다시 확실히 정정(訂正)되는 것이다.
임팔급은 서기 765년도에 중국 하남성 영보시(靈寶市)에서 출생한다.
유전 우리의 도시조는 서기 751년 하남성 낙양시 길리구(吉利區:河陽)에서 출생한다.
위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임팔급 도시조는 서기 765년도에 출생하여 17년이 되던해 등과(登科)하여 한림학사가 되고 이해가 중국과 한국의 나이 계산법으로 한 살이 더 해져서 18세가 되는데(출생시 2세 한국의 나이 계산법은 중국과 동일함) 위의 임씨 보첩에 보면 18세에 한반도에 팔학사 일원으로 왔다는 것은 바로 출생후 17년 되던해 등과(登科)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다가 한반도에 왔다는 기록인 것이다.
이러한 나이 계산법은 우리 강릉유씨 도시조의 나이 계산법과 동일하다.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는 유전(劉荃) 도시조는 서기 1051년 생으로써 32세 되던 1082년도 한반도에 팔학사 일원으로 도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751년 탄생후 31년 지난 만 31세 때의 세는 나이 32세에 왔다고 강릉유씨 족보에 기록 된 그대로이다. 실제는 착오분 300년을 차감하면 동도년도가 서기 782년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경북 영천에서 나타난 지석의 글“건중병자 3월 15일 견규생”으로 300년 착오분을 정정하면 그 출생년도와 한반도 오신 년도는 각각 서기 751년과 782년이 되는 것이다.
임팔급 도시조가 서기 765년에 태어나서 17년 지난 18세때 한반도에 온 782년과 동일한 해인 것이다.같은 782년 (중국 당나라 덕종 연호 建中3년도)에 함께 한반도에 왔음이 이곳에서 증명되는 것이다.즉 덕종은 서기 780년에서 서기 805년까지 25년간 재위하지만 그 년간에는 간지(干支)에 을사년(乙巳年)이 없다.아래의 중국역사연대표를 보기로 한다.
林八及 都始祖는 唐 代宗 永泰元年 乙巳年 서기 765년 하남성 弘農(現靈寶市)에서 출생.
위의 사진은 서울 종로구 소재 정독도서관의 족보문헌실에 비치되어 있는 평택임씨문중의 족보열람사진이다.
이곳에 기록된 서기 902년도에 18세로써 한반도에 오셨다고 하는 이 족보 기록에 관하여 오류를 검사해 보자.서기 782년 당나라 덕종 연호 건중(建中) 3년(서기 782년)에 구룡포항을 통하여 팔학사가 당시 즉 서기 781년 즉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 여덟분이 구룡포항을 통하여 한반도 신라땅에 오시기 1년전에 일어난,건중지란(建中之亂)과 중국역사상 최고의 악신(惡臣) 재상(宰相)의 살육만행으로 정국이 파국에 이른 엄혹한 시대를 당하여 팔학사가 한반도 신라땅으로 건너오게 된다.건중지란은 한반도 오게 되는 782년 바로 전해인 781년에 일어나는데안록산의 난은 서기 755년 일어나서 9년만인 763년 끝났다고 하지만,지방 군벌들은 계속 준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군벌들의 잠재적 위험을 피하고자 덕종(德宗) 황제는 이 세력을 줄여 나가기 위한 삭번정책(削藩政策)을 구상하고 있을때에 마침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죽자 그의 아들 이유악(李惟岳)이 여타 번의 군벌들과 연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정국은 소용돌이 속에 빠지고 재상 노기(盧杞)의 명신(名臣)들 살육이계속된다.이 군벌들의 건중지란에 의하여 덕종황재는 다음해 783년 즉 건중팔학사가 구룡포를 통하여 한반도로건너온 이듬해인 783년에는 봉천(奉天/현재 섬서성 乾縣 소재의 소도시)로 피난간다.涇師之亂이라고도 한다.지방군벌들의 반란의 소용돌이 중에 덕종황제는 경원병력(涇原兵力) 5천을 지원받았으나 식량이 부족하자 이들도반란대열에 참여하자 덕종황제는 봉천으로 몸을 피한다.그리고 재상 노기의 명신들 살육행위는 이어진다.
783년에는 경원병력중 주자(朱泚)는 이 와중에 병력의 추천에 의하여 帝(황제)의 위치에 오르고 국호를 대진(大秦),연호는 응천(應天)으로하고,이듬해 784년에는 국호를 한국(漢國) 연호는 천황(天皇)으로 고친다.그리고 병력을이끌고 덕종을 살해키위해 봉천(奉天)을 포위한다.그러나 병력이 싸움에 패하자 긴급히 도망치다가 부하 장수에게살해된다.43세다.이 건중지란은 781년 지방 군벌들에 의해 일어났다면,봉천으로 피난간 783년의 난은 지원받은 병력의 식량부족으로 발생된 난리로써 경원병변(涇原兵變)이라고 부른다.한편 궁궐에서 노기(盧杞) 재상은 명신781년 양염(楊炎) 783년에는 장일(張鎰),784년에는 안진경(安眞卿)을 살해한다.
이상은 한림학사에 등과한 고위 관리들이 그 귀한 당나라 장안(長安)의 대명궁 궁전을 버리고,여덟명의 고관들이가족을 버리고 멀리 한반도 신라땅으로 떠나온 그 동기(動機)를 설명한 것이다. 이 설명은 매우 중요하다.지금 서기 782년도 구룡포에 상륙하여.1년반 정도의 구룡포 생활로 낯선 이국땅에서의 적응기간을 지난 이들 팔학사들은 서기 784년 갑자년(甲子年春)에는 신라궁전에 들어가 근무하고 있으며,이 785년 신라 제 37대 선덕왕작위 수여를 위해 당나라 덕종이 보낸 지절사(持節使)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을 만나게 되며,이 옛 중국시절장안성 궁전의 옛 동료 친구를 만나 덕종의 안부를 묻은 시문이 죽간일집에는 들어 있다.
이듬해 785년도에는 살구꽃 핀 행화교(杏花橋)에서 떠나 보내면서 동료들에게 우리는 동국에 와서 잘 있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의 시문도 있다.봉상국성초고인(逢上國星軺故人)과 송상국고인(送上國故人)이란 시문이다.
자,이제 본론인 평택임씨 시조 임팔급(林八及) 시조께서 한반도에 오신 즉 평택땅에 상륙해 오신 연도가 윗 사진에 나타난 서기 902년 당년 18세에 한림학사 등과한 후에 한반도에 오게 되었다는 윗 사진의 평택임씨 문중기록에 대하여 자세하게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함께 오신 건중팔학사는 모두 여덟명으로써,평택임씨 도시조 임팔급(林八及),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남양송씨 시조 송규(宋圭) 그리고 아직까지 그 후손 문중이 밝혀지지 않은 5분의 팔학사들이다.즉 許董 權之奇 孔德狩 薛仁敬 崔冱이다..그런데 782년 함께 한반도 구룡포 항으로 상륙한 사실은 강릉유씨 문중의 도시조 유전(劉荃)의 영천 묘소에서 1902년 출토된 묘지석의 명문(銘文)에 의하여 건중병자삼월십오일 자 견규생(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堅規生)에 의하여,그리고 기타 제반 자료에 의하여 이미 300년을 소급한 서기 1082년 고려 문종 36년 중국측 송나라 신종조에 한반도에 팔학사가 건너왔다는
현행 해 문중의 족보기록이 잘못 되어 있음을 밝힌 바있다.
즉 서기 782년도에 강릉유씨 시조인 유전께서는서기 751년 중국에서 태어나서 만 31세 즉 세는 나이 32세인 서기 782년 구룡포에 상륙했다고 고증기록이 이미 완료되어 있다.그런데 이제 평택임씨 임팔급님께서는 위의 사진에서 서기 902년도에 한반도 평택에상륙했다고 기록코 있다.
두 문중이 모두 각기 족보에서 오차를 발행하고 있다.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 현행족보 동도년도 서기 1082년평택임씨 시조 임팔급(林八及) 구룡포 서기 902년 평택 상륙
그럼 왜 두 문중은 이렇게 한반도 상륙년도가 서로 차이가 나고 있으며 서기 782년에서 300년,120년 오차가 나고 있을까,.옛날에는 지금처럼 서기,단기 이러한 숫자로 기록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는 그리고 인터넷같은 기록은 물론 검색 수단이 전혀없는 시대속에 60년 마다 돌아오는 60甲子로 기록하던 시대였다.이 갑자가 하나 착오나면 60년 둘 착오나면 바로 120년 차이가 난다.,평택임씨 임팔급 조상께서는 결국 2갑자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902-120=782년
강릉유씨 문중의 유전 도시조께서는 갑자 다섯개 착오 즉 60x5=300년 현행 1082년 족보기록 동도년대에서 1082-(60x5)=782년 ....................한반도 상륙 두 문중이 공히 782년 일치하고 있다.상륙은 구룡포항으로 통일 된다.
임팔급님의 생년은 이미 평택임씨 문중에서 자체 2002년 4월에 발간한 당덕종 을사생에 관한 글에서 이미 언급 한바있다.아래에 기록되는 문장을 다시 이곳에 한번 더 올려본다.
林八及: 765년 + 17년 (세는 나이 18세 나이) = 서기 782년 동도 년도 일치
劉 荃 : 751년 + 31년 (세는 나이 32세 나이)= 서기 782년 동도 년도 일치하고 있다.
강릉유씨 시조 유전과 나주평택임씨 시조 임팔급님의 동도년도는
서기 782년도로써 완전 일치한다.
현행 평택나주 임씨의 족보상 기록 "林八及 한반도 東渡年度" 서기 850년경 (고증 결과: 서기 782년)
현행 강릉거창 유씨의 족보상 기록 "劉 荃 한반도 東渡年度" 서기 1082년 (고증 결과: 서기 782년)
남양송씨 송규 후손 족보상 기록 "宋 奎 한반도 東渡年度" 서기 926년 기술됨
따라서 같은 배를 타고 온 남양송씨 송규 후손 문중도 동일할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중국역사연대표는 中國文物出版社에서 1994년 8월에 제 2판 출판된 책이다.
8.일팔급(林八及)과 유전(劉荃)의 동일한 팔학사인 점을 증명하다.
잠시 한반도에 중국에서 온 팔학사의 실태를 짚어 보기고 한다.
현재 8학사 후손임을 나타내는 문중만 해도 한국에는 33개 문중이나 되고 그 올때에 한줄씩의 팔학사 인원이 남긴 시문의 글들도 우리 팔학사 외에도 또 있다.
그럼 왜 임팔급과 유전 도시조는 동일한 팔학사 팀이 맞는 것일까.
지금 평택나주 임씨 일부 문중 사람들은 이 팔학사의 많음과 그 설이 정설로 확정된 경우가 적고 또한 분분하다 보니 결국 임팔급의 동도년도의 상이함과.도착 해안의 주장이 서로 상이함,그리고 또 임팔급의 도해처가 멀리 중국 복건성 천주시 해안임을 들어서 우리는 강릉거창 유씨 유전 도시조와 다른 팔학사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는 그렇지 아니하고, 동일한 배를 타고 같이 온 동료로써 함께 온 팔학사임을 증명해 본다.
1) 첫째 팔학사(八學士) 동도시(東渡詩)에 임팔급,유전은 동시에 등장한다.
팔학사는 함께 동도 해 오면서 한줄 씩의 한시(漢詩) 한 줄씩을 남긴다.
팔학사 동도시가 아래와 같이 남아 있다.임팔급도 당연히 그 명단에 포함됨
임팔급 도시조가 이 여덟명의 명단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建中八學士 東渡 詩文
林八及 ; 八人浮海兮여 桂棹蘭檣이로다.
(여덟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 계수나무 돛대에 난초의 삿대로다)
薛仁敬 ; 仙李運盡兮여 賢士被讒이로다.
(당나라의 운수가 다 함이여 어진 선비가 참소를 입었도다.)
劉 荃 ; 波濤闊矣兮 여 舟楫利逝로다.
(파도가 넓음이여 뱃길이 편히 가도다.)
許 董 ; 吾徒東矣兮여 可以免禍로다.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가히 화를 면함이로다.)
宋 奎 ; 接淅而去兮여 謝暗投明이로다.
(파도를 조리질하며 떠남이여 어두운곳 버리고밝은곳 찾아가네.)
崔 冱 ; 李老入海兮여 殷道衰亡이로다.
(이씨 시대는 늙고 저물어 입해하누나. 은나라도 곧 망할것이로다.)
權之奇 ; 賢士出東兮여 竭誠盡忠이로다.
(어진선비가 동쪽으로 감이여 충성을 다 하리다.)
2) 함께 동도해 온 강릉유씨 도시조 유전(劉荃)이 남긴 시문집에 등장하는 임팔급 도시조
강릉거창유씨 도시조 팔학사 님께서는 한반도 생존시 죽간일집(竹諫逸集)이라는 시문집을 남긴다.그 시문집(詩文集)에는 여타 동료 칠학사에게 드리는 시문도 한 수씩 있으며 그중에는 당연히 동료 팔학사 임팔급에게 전하는 시문도 한 수(首) 들어 있다.
晩秋贈林學士八汲: 늦 가을 임학사 팔급에게 보내는 劉荃의 詩
黃菊秋香晩: 노란 국화 가을 향기 늦도록 진한데
蒼葭露意寒: 푸른 갈대에 내린 이슬 냉기가 서렸구려.
此時多夢想: 지금쯤 회포 또한 많으리라
懷抱向誰寬: 그 회포 누구에게 풀으리
이제 임팔급이 유전(劉荃) 도시조와 함께 오지 아니 하였다고 말 할 수있는가.
9. 最終結論
林八及: 765년 + 17년 (18세 나이) = 서기 782년 동도 년도 일치
劉 荃 : 751년 + 31년 (32세 나이)= 서기 782년 동도 년도 일치
강릉유씨 시조 유전과 나주평택임씨 시조 임팔급의 동도년도는
서기 782년도로써 완전 일치한다.
현행 평택나주 임씨의 족보상 기록 "林八及 한반도 東渡年度" 서기 850년경 (고증 결과: 서기 782년)
현행 강릉거창 유씨의 족보상 기록 "劉 荃 한반도 東渡年度" 서기 1082년 (고증 결과: 서기 782년)
남양송씨 송규 후손 족보상 기록 "宋 奎 한반도 東渡年度" 서기 926년 기술됨
따라서 같은 배를 타고 온 남양송씨 송규 후손 문중도 동일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방치하면,역사는 향후 이 잘못된 기록이
固着化 되면서 역사상 영원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팔학사의 이 기록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2019년 8월 31일
劉 慶 相
2019.8.31 江陵劉氏 劉門歷史硏究會 上記 考證文 報告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