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씨의 영원한 고향 구룡포 박바위를 가다
지난해부터 계획해 오던 구룡포 여행을 드디어 가기로 했다. 이 구룡포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은 강릉유씨 유전(劉荃) 도시조께서 남기신 죽간일집(竹諫逸集)에 나타나는 그 시문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답사하고 현장을 통해서 확인 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실로 유전 도시조님께서 오르셨던 박바위를 처음 답사하는 귀한 날인 것이다.
2020.4.11일 KTX편으로 08시 30분 대전역에 도착하니 이미 유찬종 실장님과 유풍종 종친.유재흠 종친 두분도 도착해 있었다.그곳 대전역 구내에서 차 한잔씩을 한 후,바로 유풍종 종친이 제공하는 차편으로 구룡포를 향하여 달려갔다. 그곳 유풍종 종친의 지인의 안내를 받아 포항의 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까지 대접을 받았는데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서 오셔서 또 식사까지 우리를 위해서 대접해 주시니 너무나 고마왔는데 사실은 유풍종 종친께서 마당발이기도 하지만, 실로 많은 공이 이러한 과정 속에는 녹아 있는 것이다. 참으로 멋있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이제 그분은 직장에 돌아 가고 나서, 이제는 그분이 소개한 구룡포(九龍浦) 향토사학자라는 분을 찾아 구룡포를 향하였다.그 곳 그 분의 사무실에서 만나 뵈면서 구룡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서 그립고 그립던 시문에 등장하는 구룡포 응암산(鷹巖山) 박바위를 찾아서 나섰다.
베테란 운전 실력의 유풍종 종친께서는 그곳 응암산 임도(林道)를 운전하여 잘도 박바위를 찾아 올라 갔는데 과연 중국 당나라 조정의 고위 관료 출신의 대 학자들이 한반도에 도착후 구룡포에 살면서 그 곳 주변에 있던 산을 그 팔학사 이름을 따서 스스로 팔학산(八學山)이라고 이름짓고 공부하다가 그 산에 올라 시문에는 소요(逍遙)하면서 지냈다는 그 팔학산 정상에 위치한 그 늠름하고도 아기 자기한 아담한 바위 박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에 죽간일집에 올라 있는 박바위 시를 올린다.
유전(劉荃) 선조께서 낯설고 물설은 이 땅에 도착해 살면서 이 산에 올랐다고 하는 그 박바위, 감회로웠다. 유찬종 실장께서 그 감격의 순간들을 영상화한 모습을 이곳에 올려 본다. 강릉유씨 유전 시조 후손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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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孝孫 四人--千年香氣에 醉하다.--2020.4.11-4.12일
죽간일집에 나타나는 팔학산 관련 시문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大同譜) 首卷 제 172페이지 수록
登八學山 八學山에 올라
山名以學士 산이름 팔학이라 이름진 뜻은
自我八人來 우리 八學士 온데서 기인함이라
其下成茅棟 산아래에 뗏집한채 마련해놓고
逍遙堪樂哉 거닐며 노는재미 정말 즐겁다.
위 시문에서 팔학산이란 이름은 팔학사들이 이곳에 살면서 그 산이름을 스스로 팔학산이라고 부르면서,
살았다고 하고 있다.제 2절에서는 이 팔학산은 우리가 오면서 그 산이름을 그냥 여덟명이 와서 그 산아래
살기 때문에 붙여 본 이름이로고 하고 있다.구룡포에서 대표적인 산이자 사실 이 응암산(鷹巖山) 하나 밖에 없는데
다른 산은 없다.이 산 즉 구룡포 응암산은 원래 말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이 산위에는 그 유명한 박바위가
있으며,이곳 지방의 등산 코스 즉 구룡포 응암산 등산의 정상이자 마지막 지점이 되는 것이다.매 바위.
이 바위를 두고 이제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 선조는 시문을 남긴다.그런데 위 시문에서 보면 제 삼절에는 "其下成茅棟" 산아래에 뗏집한채 마련해놓고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즉 그 산아래 즉 구룡포 응암산 스스로 팔학산이라고 명명하고 살던 그 산아래 떼를 떠다가 벽돌대신 삽으로 떠오 그 떼를 마치 벽돌처럼 차곡 차곡 쌓아 올려서 방의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잇고,즉 뗏집 다시 말하면,茅棟 을 짓고 살았노라고 한다.茅棟이란 뗏집도 되지만 자기의 집을 낮추어 부르는 謙語이기도 하다.
필자는 어릴때 내가 국민학교도 들어 가지 않았을 때인데 나보다 한 두 살쯤 어린 몽선이라는 아이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는데 그 몽선네 집이 떼를 떠다 쌓아 올려 짓고 살던 집이어서 잘 알고 있다. 몽선네 집에 가면 몽선 어머니는 나에게 차조로 지은 푸른색이 도는 차조밥을 주어서 너무도 맛있게 먹곤 하던 그 그림같은 장면은 지금도 선하다.
그래서 이 시문에 등장하는 모동(茅棟) 즉 뗏 집의 등장은 나에게는 유년기 시절의 고향 향수를 불어 온다.이렇게 팔학산 아래 뗏집을 짓고 살면서,그 산에 올라 소요(逍遙)하면서 지냈는데 너무도 즐거웠다고 시문은 읊고 있다.그 산 지금은 구룡포 응암산 그 산을 간 것이다.
그리고 그 산에 올라서 그 산 정상에 있는 박바위에 올라 지은 시문이 "팔학산 바위"인데
아래에 팔학산 바위의 시문을 보기로 하자. 지금은 그 구룡포 사람들은 이 바위를 박바위라고 부른다.
사실 그 매바위(鷹巖)의 위에는 마치 박바가지를 연상시키는 비가 오면 물이 꽤나 고일만한 움푹파인 인상적인 모습의 물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을 연상해서 박바위라고 부르게 되지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박바위 관련 죽간일집 시문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72페이지 수록
題八學山岩石 팔학산 암석이라고 題하다
石老苔凝面 바윗돌 오래되니 이끼가 끼이고
山深地有名 山이 깊숙한데 地域도 이름났네
此間多藥草 이곳에는 어찌나 藥草가 많은지
能醫俗病萌 잡다한 속세병을 잘도 났구네
이 시문의 제목은 팔학산 암석이다.팔학산 암석이라고 題하다.
팔학산 암석이라고 제목을 놓고 시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그 지금은 응암산 위 정상에 있는 박바위에 올라 지은 시문이다.당나라 조정에서 고관 출신의 이 당나라 학사(學士)들이 아니 대 문장가이기도 한 이 분들이 이 땅에 와서 살면서 그 시문에 등장하는 제목을 놓고 지을 대상의 바위라면,그 바위는 범상한 바위가 아니었음은 우리는 알 수있다.이번여행에서 일말의 회의도 없는 그 사실 바로 이 시문에 등장하는 구룡포 장기 반도에 오로지 하나의 명산 응암산 정상의 그 바위가 바로 박바위인 것이다.
위 시문에서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그 바윗돌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고,산은 깊고 유명했는데,이 기슭에는 약초도 많아서,속세의 병도 능히 고칠 수있었다고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 올라 본 그 응암산은 깊었고,그 바위 박바위는 이 시문에 기록한 대로 예나 지금이나 과연 명물이었다.이 팔학산에 관해서는 죽간일집에서 황국절등림이라는 시문에서도 또 등장한다.한번 보기로 하자.
팔학산이 등장하는 죽간일집 시문--"黃菊節登臨"--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90페이지 수록
黃菊節登臨 국화꽃 필때 山에 오름
學遊嘯立學山頂 八學山마루 서서 팔학사들 놀고
愁還扶登愁送臺 수송대에 올라 근심보내네
晩節黃花眞可愛 늦가을 국화꽃 정말 귀여워라
衆芳飄盡獨能開 묻꽃은 다졌는데 저혼자만 피었네
위 시문의 제 1절은 "學遊嘯立學山頂" 이라고 나온다.이 것은 번역하면,공부하다가 시간나면 휘파람 불면서 팔학산 정상에 올라 소요하며 놀았노라 이렇게 되겠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팔학산이 이 시문에 등장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올려 본 것이다.제 2절에서 수송대에 서로 올라서 시름을 보냈다고 하는 것은 이제 영천(永川)의 전원생활이 시작된 서기 800년 10월 이후에 지어진 시문이다.유전(劉荃)은 그곳에서 22년을 살다가 서기 822년에 세상을 떠난다.이 영천의 전원생활중 지은 시문이다.품격 높은 그 詩香은 향기롭기 그지없다.늦가을 노란 국화 참으로 아름답네.묻꽃은 다 졌는데 혼자서 피어있네.그리고 이곳에서 소개할 죽간일집 시문이 한 수가 더 있다.구룡포 고향을 그리는 시문이다.위 시문의 제목에 나오는 黃菊節은 중국인들의 최대 명절인 九九節(重陽節)이기도 하다.음력 구월 초아흐렛 날이다.우리나라의 추석명절과 같다.
이 시문에 나오는 수송대(愁送臺)란 유전 도시조께서 경주 궁궐의 신라 제 38대 원성왕(元聖王)을 14년간이나 모시다가 서기 798년 12월 원성왕이 돌아 가신후 서기 800년 10월에 도시조께서는 이제 永川으로 이거(移居)하시는데 그로부터 4년 반이 지난 서기 805년 3월에 수송대를 짓고 이곳에 올라 중국의 고향 河南省을 그리워 하며 지냇노라고 수송대기(愁送臺記)에서 말하고 있다.
구룡포 관련 죽간일집 시문--"만추유감(晩秋有感)"--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9-190페이지 수록
晩秋有感 늦가울에 느낌
近來羇抱自難寬 요사이 나그네 마음 달래기 어려워
俛首紅塵不足懽 세상을 굽어봄에 기쁜일 없네
遙想蒼州龍浦屋 멀리 생각컨대 蒼州 龍浦의 옛 집에는
書風黃菊好誰看 西風에 피는 국화 누가 즐겨 볼까나
위 시문에 등장하는 구절중 제 1절에 보면,羇(나그네 기) 이 글자가 등장하는데 이 글자는 타향에 오래 머물면서 나그네가 된 신분을 이르는 말이다.멀리 중국에서 온 그 신분의 타향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겠는가.죽간(竹諫) 선생 유전(劉荃)은 서기 800년 영천의 전원생활을 하게 된 후 22년을 살게 되는 데 이 시문은 영천생활 중에 지은 시문으로 보인다.
위 시문에서 제 3절을 보자--"遙想蒼州龍浦屋" 멀리 생각컨데 창주용포 집에는 이라는 옛날 처음 낮 설고 물설은 이국땅 한반도에 상륙해서 처음 떼를 떠서 이것으로 모동(茅棟)을 짓고 살던 그 시절을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문인데 창주 용포 즉 지금의 구룡포 그 당시의 시절을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문이다.
이 시문이 관직을 물러나서 영천에서 지은 시문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창주용포 시절의 茅屋을 그리면서 지은 시문이기 때문이다, 죽간은 서기 785년부터 신라 제 38대 원성왕 집권기간인 서기 798년까지 14년간을 신라 궁궐의 국방담당 최 고위직으로 있은 것으로 영주자견(永晝自遣/긴긴 낮 시간을 홀로 보내면서 ) 이라는 시문에서 나타나며 아울러 죽간시문에는 다섯 수의 무술(병아)- 武術(兵衙) 관련 시문이 있기 때문이다.兵衙란 궁중의 병무담당 부서를 말한다.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은 신라 궁중 병무담당 최 고위직이었던 것이다.영주자견이라는 시문에는 軍國安危(국가의 안녕과 위태로움)이 繫此身(이 몸에 매었나니)라고 나온다. 본인의 詩文에 이러한 말을 쓸 수있는 사람은 한 국가의 王이 아니라면 국방의 최고 책임을 맡고 있는 國防最高責任者 국방최고 책임자 이외에는 불가능한 언어인 것이다.
영천의 죽간일집을 남깃신 劉荃의 묘소를 "劉陵"이라고 강릉유씨 족보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1994년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에는 능묘사적실기(陵墓事蹟實記)가 올라 있다.
이러한 궁중의 고위직에 있을 경우 수많은 문무 백관들과 동료가 되어 생활 하면서 이러한 한가한 멀리 구룡포의 옛집을 그리워 할 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공무에 바쁘고 궁중의 수많은 동료 관료들과의 생활에 분주하였을 것이다.이제 퇴임후 전원에 와서 살면서 이러한 창주용포의 옛집을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문임을 우리는 생각할 수있다.
이제 죽간일집 시문 소개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곳 구룡포의 응암산과 박바위를 보고 나서는 그 유명한 장기반도의 끝에 위치한 호미곶을 돌아 보고,구룡포 시내의 무한리필 대게를 먹게 된다.그리고 그곳에서 숙박한다.
이제 이틑날 새벽 비가 내렸다.그렇다고 구룡포에 와서 그냥 떠날 수도 없다.나는 구룡포 새벽을 보기 위하여 구룡포 어판장으로 향했다.경매가 힘차게 이루어 지는 삶의 현장은 분주했다.그리고 더욱 빗발이 세어져서 더는 걸을 수없게 되자 택시편을 이용해서 구룡포 시내를 돌아 보았다.그 택시 운전수가 알려준 구룡포에서 24시간 영업하는 아주 대표적인 식당인 참뼈해장국집에 모두 함께 가서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구룡포에서의 명성만큼이나 이른 새벽인데도 식당은 꽤 사람들이 있었고, 아침 뼈 해장국도 맛있어서 이번 구룡포 여행의 맛을 더해 주었다.참뼈 해장국이라고 하네.이름도 참 감칠 맛나네.,
그리고 바로 내리 해안을 따라 남행해서 죽간일집 저자와 함께 온 팔학사 일행이 함께 경주 신라 궁궐에서 관료로 있을 때 신라 왕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 제 38대 元聖王陵으로 향했다.원성왕릉 처음 보지만 낫 설지않은 듯했다.오히려 포근한 정감이 흘러 든다.그 입구에 양편에는 꼭 절간의 수문장같이 생긴 석상이 서 있는데 그 석상중에는 양 편에 각기 하나씩의 석상은 마치 중국 서역의 인물상을 한 두 사람의 석상이 있었는데 이것은 나에게는 이질적 이라기 보다는 신라 시대의 수많은 당나라와의 사신 유학생들이 드나들면서 ,이곳 중국 당나라 계열의 무관들도 수많이 신라 조정에 와서 근무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 모습(2020.4.12일 탐방)
신라와 당나라간의 관계를 우리는 역사에서 나당연합군(羅唐連合軍)이라는 항목을 통하여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다.그러나 중국의 역사에는 신라인들의 거류지가 수많이 등장하고,당시에 이미 신라문학의 계원필경으로 유명한 최치원이라든지 중국의 산동반도에 있는 장보고 유적지에 나타나는 우리 역사의 장보고 청해진은 물론 당나라 조정에 등장하는 많은 신라인들의 모습도 있다. 최치원등은 일찌기 당나라 조정에서 낮에는 조정의 무관같은 직을 담당하면서 그곳에서 이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신라의 학생들은 그 당나라 조정에 아주 많았다고 한다.지금으로 말하면 그곳 궁중에서 일하면서,공부하는 학생들이 었던 것이다.
이 신라 유학생들은 학승(學僧)과 일반 유학생으로 이루어 지고,이들이 당시의 발달된 중국의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면서,한반도 문화의 그 원류를 이루게 된다.일본도 또한 같다.그리고 거류민에 관한 기사는 아주 많다.즉 신라방(新羅坊)이라고 있었는데 新羅坊이란 신라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거리이다.그러니 이런 인물상이 원성왕릉에 그리고 입구에 서 있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 아닌 것이다.죽간시문 중에는 당나라 사절이 신라 궁궐에 다녀갈때 모습을 그린,옛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는 그 당나라 고위 관료에게 친구들의 안부를 전하면서 쓴 두편의 시문도 실려 있다.봉상국성초고인(逢上國星軺故人)과 송상국고인(送上國故人)이라는 두 수의 시문이다.
이렇게 원성왕릉 탐방을 마치고 이어서 경주로 와서 분황대를 보고 영천 도시조님 산소를 참배하고 귀가했다.참으로 의의있고 유익한 일박이일 여행이었다.죽간일집 시문에 등장하는 팔학산과 박바위를 우리 문중에서 첫 발을 디딘 매우 뜻깊은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 함께해 주신 종친 여러분 건강하세요!
신라 제 38대 원성왕릉 2020.4.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