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간일집(竹諫逸集)은 왜 신라문학(新羅文學)인가
江陵劉氏 劉門歷史硏究委員
劉 慶 相
一. 序言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강릉유씨 문중의 시조로써 현행 문중의 족보 기록은 서기 1051년 중국에서 태어나고 32세인 서기 1082년 중국 宋 나라에서 한반도 고려(高麗) 땅에 건너와서 강릉유씨 시조가 되었으며, 1122년 사망시까지 40년을 살다 간 고려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02년도에 경북 영천에 있는 유전(劉荃)의 묘소에서 발굴된 묘지석(墓誌石)에는 유전(劉荃)의 역사연대를 밝히는 귀중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이 묘지석에는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堅規生”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建中은 중국 당나라 덕종(德宗)의 연호로써 서기 780년에서 783년까지 4년간 사용되었으며,당나라 德宗의 서기 780년-805년 26년간의 치세 기간중 병자년은 서기 796년으로써 유전(劉荃)의 묘소에서 출토된 건중병자년 3월 15일 아들 견규(堅規) 生이라는 글귀는 바로 현행 후손인 강릉유씨 거창유씨 족보에 기록된 견규(堅規)의 생년월일 즉 서기 “1093년 3월 15일생“과 정확히 300년의 오차가 발생한다.따라서 따라서 유전(劉荃)의 동도년도는 300년 소급되어 서기 782년 중국 당나라 덕종조 건중(建中) 3년으로 소급되어지고 한반도 당시 연대는 신라(新羅) 37대 선덕왕(宣德王) 3년이 된다.300년 즉 5甲子 착오이다.
이 300년의 오차는 함께 동도해 온 평택나주임씨(平澤羅州林氏) 시조 임팔급(林八及)의 동도년대가 서기 782년임이 2002년 4월 25일 全國林氏中央會에서 발행한 임씨상계보감(林氏上系譜鑑)에서 밝혀짐으로써 현행 강릉유씨 거창유씨 유전(劉荃) 후손 문중의 기록에 나타난 고려시대 한반도 팔학사 동도설(東渡說)은 否定되어지며, 그 동도년대(東渡年代)는 서기 1082년 중국의 송나라 시대, 한반도의 고려시대가 아닌 300년 소급되어져서, 서기 782년 즉 중국의 당나라 시대, 한반도의 신라 시대로 증명되어진다.
현재의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 후손의 잘못 기록된 서기 1082년 즉 중국의 宋나라,한반도 高麗때 동도설(東渡說)을 300년 소급된 서기 782년 중국 唐나라 시대,한반도 신라시대로 바로잡기 위한 것이며 죽간일집 시문에서 풍부한 자료를 도출 증명키로 한다.
二. 竹諫逸集이 신라문학(新羅文學)임을 증명하는 많은 詩文들
1.퇴조(退朝) 관련 죽간일집 詩文들
퇴조(退朝)란 궁궐에 퇴임하는 경우, 궁궐에서 퇴근하는 경우의 언어이다.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의 동도설이 현행 후손 문중에서 기록하고 있는 서기 1082년 고려시대 동도해 온 사실이 맞다고 한다면 왜 죽간일집 시문에는 퇴조라는 궁궐에서만 이루어 지는 단어가 들어간 시문이 3首나 등장하는 것일까.
고려시대 궁궐은 당시 개경(開京) 즉 지금의 북한 개성(開城)에 있었음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며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항에 상륙해 온후 40년간 한반도 생활을 마감한 소위 후손 문중에서 기록하고 있는 서기 1122년 사망해서 경북 영천시 녹전동 현재의 묘소에 묻히기까지 개경(開京)에 간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시문에 등장하는 퇴조(退朝)는 고려 궁궐 개경(開京)에서의 퇴조가 아님은 바로 구룡포(九龍浦) 경주(慶州) 영천(永川)으로 이어지는 그의 생애의 행로 궤적과 일치하고 있음을 상기 언급한 연대 300년의 오차를 소급할 때, 소급되어 지는 서기 782년이 고려가 아닌 신라시대의 연대임과 관련하여 이를 부인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이 뚜렸한 사실을 아래의 수많은 죽간일집 시문들을 통하여 증명키로 한다. 죽간일집은 132수의 시문이 수록된 한시(漢詩) 시문집이며,이 시문들은 66수의 역사관련 시문과,67수의 순순문학 신라 시문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가.퇴조(退朝) 관련 시문 1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78페이지 수록
退朝歸路諸公口號 퇴조 귀로에 동료들과 함께 읊다.
東國際無事 이 나라 무사 태평한 이 때에
千官晩退朝 만조백관이 늦게서 퇴근하네
阿容多取媚 아첨하는 무리들은 아양 많이 떨지만
得志不當驕 뜻있는 우리들은 절대 교만 말게나
나라는 태평하고 궁중의 관리들은 그럼에도 늦게 퇴근하는 아름다운 궁궐 모습이 그림과 같이 아름답고 고귀하다.1082년 한반도에 왔다는 문중의 기록이 300년 착오임이 저자의 묘소 출토 지석문(誌石文)과 평택나주임씨 동도 동료 팔학사 임팔급(林八及)의 동도 서기 782년과 일치되어 이루어 지는 경주의 당시 신라 궁궐의 모습을 볼 수있다. 어떻게 고려 궁궐에 관한 이야기인가.
나.퇴조(退朝) 관련 시문 2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7페이지 수록
和金翰林退朝詩 金한림의 退朝詩를 화답함
拜入蓬萊五色雲 자네가 學士로서 翰林院에 들어감은
九重閶闔自天聞 九重궁궐에 임금이 아셨음이라
知君才德兼文武 그대의 재덕에 文武를 兼했으니
將見殊時樹大勳 장차 非常한 때에는 큰공을 세우리
김한림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퇴조(退朝)한 후에 한림원에 들어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퇴조(退朝)는 궁궐에서 퇴근하는 모습이 아닌 궁궐에서의 직분을 마치고, 이제 한림원으로 들어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和答하는 한 편의 시문으로서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의 인품이 드러나 있다.
다.퇴조(退朝) 관련 시문 3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8페이지 수록
退朝後獨賦 退朝한 뒤에 혼자 읊음
符籍堆傍盡日催 公文書 옆에 쌓여 해지도록 바빴으니
平生堪愧乏良材 내 平生 才能모자람 부끄럽구나
村丹每欲嵩呼碧 충심으로 임금님 만세를 크게 부르고
拜入朝瑞擊玉盃 朝廷에 들어가 술잔 받들고 싶네
퇴근후에 혼자 읊은 시문이다.위 시문에서 보면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은 종일토록 공문서 더미에 묻혀 하루를 보냈노라고 이 시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그리고 그 온 종일 걸려 일했음은 자신의 재주가 비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시문이다.역시 이 시문에서 등장하는 궁궐근무에 관한 사항은 결코 고려 조정 개경(開京)을 두고 지은 시문이 아님을 알 수있다.
잠시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의 일생을 짚어 본다. 이미 300년 문중 족보 문헌 기록이 5갑자 착오로 인한 300년 소급한 연대인 서기 1082년이 아닌 서기 782년도에 구룡포로 상륙한 유전(劉荃)의 일생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안동국학진흥원의 장판각(藏板閣)에 보존된 죽간일집 목판본 원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任戌八月日下陸於楚海蒼州卜居于八學山下經十八年庚辰十月日移居于上大田乙酉三月日作愁送臺”
“임술년 즉 서기 782년도(신라 宣德王 三年)에 초해창주 즉 구룡포항에 상륙해서 그곳 팔학산 즉 지금의 구룡포 응암산(鷹巖山) 아래에 터를 잡아 살았고, 그리고 18년이 경과한 후에 서기 800년도 즉 경진년 10월에 上大田으로 이사했고 을유년 즉 서기 805년 3월달에 수송대(愁送臺)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말하는 상대전(上大田)은 바로 현재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이 묻혀 있는 경북 영천 녹전동 현재 지명은 영천시 중앙동 예하의 행정 동명이다.이곳은 상대전동이고 지금도 영천에는 대전동(大田洞)이 있는데 이 영천시 대전동이라 함은 바로 옛 지명 하대전동(下大田洞)에 해당하는 지역이다.현재의 강릉유씨 재실이 있고 그 유전(劉荃)의 묘소와, 묘지석이 발견된 그 곳은 上大田洞이다.
이곳으로 이사해서 살면서 이사한지 5년이 지난 서기 805년 수송대를 지어 놓고 중국에서 함께 온 동료들과 올라 고향 중국 중원땅을 바라보며 회포를 달랬노라고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은 수송대기(愁送臺記)에서 술회하고 있다.이 서기 805년 3월에 이곳 현재의 문중 종토(宗土) 자리에 유전(劉荃)께서 서기 800년 이사와서 살면서 5년이 지난 서기 805년 3월에 建立해 놓고 살았던 그 수송대(愁送臺)를 무려 그후 500년 후에 나타날 즉 영천시 금호강변에 고려 공민왕 17년 서기 1368년 당시 고려정부 영천 관리가 주도해서 지어 놓은 조양각(朝陽閣)으로 착각하는 이러한 잘못된 일이 다시는 없길 바란다.
이상에서 열거한 3首의 퇴조관련 시문은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이 경주 궁궐에서 근무한 그 기록에 관한 시문임을 볼 때에 죽간일집은 바로 신라 문학인 것이다.아래에는 이어서 경주 궁궐에 있으면서 지은 시문들이 이어진다.
2. 신라궁궐(新羅宮闕)에서의 생활을 그린 죽간일집 詩文들
가.궁궐(宮闕) 관련 시문들을 보자.시문 1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77페이지 수록
題省中院壁 궁중(宮中)의 벽에 씀
槐我一羇旅 부끄럽다. 내 한나그네 몸도
猥承寵愛恩 한때는 王의 寵恩 받아보았네
鍾聲鳴玉佩 종소리는 玉을 찬 女人 울리고
花氣繞金門 꽃향기는 大闕門을 둘러 쌓았네
職㤁風雲外 벼슬은 못난 나의 분수에 넘쳤고
身霑雨露痕 몸만이 성은(聖恩)에 흠뻑 젖었네
材疏難仰答 쓸모없는 재목이라 보은(報恩)못해서
憂似醉於罇 마음아파 괴로워 술에 취한 척
이곳부터는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이 경주 신라 궁궐에서 근무한 기록이 나타나는 시문들 만을 소개하기로 한다.위에 우선 소개하는 “題省中院壁”이라는 시문에는 궁궐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들어 있다.총애는 임금의 신뢰,금문은 대궐문,우로는 임금의 은혜 이러한 단어들이 들어 있다.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이 궁궐에 근무했음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시문이다.
나.궁궐(宮闕) 관련 시문 2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78페이지 수록
省中夜思 궁중(宮中)에서 밤에 생각함
做來何事業 나는 이내 무슨일을 해왔던가
永夜未成眠 밤새도록 생각타 잠못 이뤘네
畫閣稀聞漏 宮闕에 물시계소리 드물게 들리고
茶煙細擁煙 차 다리는 火爐에 煙氣가 가늘게 나네
憂民思樂歲 백성을 염려하여 풍년들기 바라고
奉國恐遺賢 나라 받들매 賢臣아니쓸가 두려워라
위의 시문에 나타나는 “省”과 “畵閣”은 각기 관서(官署)와 화려한 채색의 누각이라는 뜻이지만 이곳에서는 곧 궁궐을 나타내고 있다.특히 말미의 “憂民思樂歲 백성을 염려하여 풍년들기 바라고” 이 싯귀절에서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이 백성을 염려하면서 풍년들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奉國恐遺賢 나라 받들매 賢臣아니쓸가 두려워라“나라 받들고 일하면서 혹시 현명한 신하를 쓰지 못하는 우를 범할까 두려워 하는 매우 높은 도덕성을 보이고 있다.이 분이 현재 강릉거창 유씨의 시조이신 문양공(文襄公) 劉荃이다.후손들은 영원히 이 죽간일집 시문의 깊이를 새기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궁궐(宮闕) 관련 시문 3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8페이지 수록
與諸宰臣登樓 宰相들과 함께 누각에 올라서
暫抛公務賦登樓 公務를 잠깐쉬고 누각에 올라보니
民海層層碧玉流 人波는 층층이 玉물결일세
莫把靑雲誇當貴 벼슬을 가졌다고 부귀를 자랑말라
古來賢者遯無求 옛부터 어진이는 隱居해 마다했네
여기서 與諸宰臣이란 모든 宰臣 즉 궁궐에 함께 근무하는 제상들과 함께라는 뜻이 된다. 함께 누각에 올라간 한 수의 시문이다.공무를 쉬고 잠시 누각에 올라가 왕궁 주변의 행인들을 내려다 보면서 지은 시문인데 벼슬을 가졌다고 부귀를 자랑마라 이 구절에서 역시 저자 죽간선생의 인품을 엿 볼 수 있다.
여러 재상들과 함께 누각에 오르다 라는 시문은 바로 궁중 생활에 관한 시문이다.죽간일집이 신라시대 시문임을 증명하는 대표적 자료이다.
라.궁궐(宮闕) 관련 시문 4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8페이지 수록
永晝自遣 긴긴해를 보냄
悠悠宦跡滯要津 오래된 벼슬자취 要職에 머무르니
軍國安危繫此身 國家의 安危가 이몸에 매였구나
未報涓埃生白髮 最少의 聖恩도 갚지 못하고 白髮이 되니
無言半晌似含醇 말없이 반나절을 술에 취한 듯
궁중에서 한가한 틈에 자신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을 시문에 담아 낸 글이다.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이 시문에서 “軍國安危繫此身: 國家의 安危가 이몸에 매였구나”라는 구절의 싯구를 남긴다.국가안위가 이몸에 달리다.
이러한 말을 누구나 글로 쓸 수있는가,그럼 유전(劉荃)은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알아 보아야 한다.劉荃은 서기 782년 팔학사와 함께 중국 지금의 서안(西安) 즉 당시 당나라(AD 618年-907年)의 수도였던 長安에서 궁중 영재(英材) 교육기관인 이영전(邇英殿)에서 공부한 후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며 직위는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다가 한반도로 건너 온 분이다.
이분이 이제 서기 782년에 경북 구룡포 해안에 상륙한 후 그곳 구룡포 시내에 위치한 산 아래 이곳에서 이 팔학사들이 스스로를 달래며 그 산 이름을 팔학산(八學山)이라고 이름 짓고 공부하며,함께 그 산에 올라 소요(逍遙) 하면서 지내다가 이제 한반도에서 언어와 물정이 좀 익숙해지면서 이 당나라 장안에서 고관을 지내던 팔학사 팀 학자들은 자연히 인근에 위치한 당시 한반도 신라 나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옮겨가서 지내면서 이 죽간일집에 퇴조(退朝) 궁궐(宮闕) 무술(武術)등에 관한 많은 시문을 죽간일집에 남긴다.
그러나 구룡포 생활을 얼마 동안 지낸후 경주로 옮겼는지는 자료가 남아 있다. 강릉유씨 문중에 남아있는 죽간일집 원본 (안동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죽간일집 판각본이 보관되어 있으며,국립중앙도서관에 그 영인본이 보관관리되고 있음)에는 "甲子春逢上國星軺故人"이라는 글에서 당덕종께서(1) 서기 784년 말과 서기 785년 정월 사이에 한국의 신라 제 37대 선덕왕의 작위식에 파견오는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의 신라 선덕왕(宣德王)때 지절사(持節使)로 온 사실이 잘 기록되어 있으며 (2)한국의 중요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신라 선덕왕 5년 기록에, 이 모습이 그대로 잘 기록되어 있어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3)따라서 고려때 유전은 한반도에 온 사람이 아니며,신라시대에 신라 37대 선덕왕때 한반도에 온 사실의 기록을 통하여 이 죽간일집은 신라문학임이 증명된다.
逢上國星軺故人 (中國에서 使臣온 친구를 만나서)
送上國故人 (中國의 옛날 친구를 送別하다)라는 두편의 시문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이어서 이 두편의 시문이 올려져 있다.
살구꽃 핀 봄날 행화교(杏花橋) 다리위에서 이제 멀리 신라궁궐에 찾아 온 이 국사(國使) 옛 중국 당나라 궁궐 장안성
옛벗의 손을 잡고 돌아가면 옛벗들이 내 소식을 묻거든 동국 신라의 궁궐에서 잘 있다고 소식 전해주오
중앙국립도서관과 안동국학진흥원에 남아 있는 죽간일집 목판본과 그 목판본 글의 영인본에는 죽간선생은 구룡포 도착 18년 후에 경북 영천 현재 묘소가 있고 강릉유씨 재실이 있는 영천시 녹전동(현재 중앙동) 당시 상대전리(上大田里)로 이거했다고 되어 있으며,이거한 해는 임술년(任戌年) 서기 800년 10월 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任戌八月日下陸於楚海蒼州卜居于八學山下經十八年庚辰十月日移居于上大田
중국 당나라 궁중 영재 교육기관에서 수학한 기록에 관한 죽간일집 시문을 보자.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2페이지 수록된 憶故國이라는 시문을 보자. 億故國이란 고국에 있을때를 회고한다는 시문이다.
憶故國 故國을 생각함
昔忝邇英席 옛적에 저 英席에 욕되이 오른건
猥蒙聖主知 외람되이 聖主께서 알아줌을 입음이니라.
官遷賈誼日 벼슬이 賈誼처럼 左遷한 날과
輦過馮唐詩 임금이 馮唐에 지난일을 생각해본다
未效涓埃報 성은(聖恩)을 조금도 갚지 못하고
謾尋湖海期 부질없이 山水만 찾아온지 一年됐구려
經年旅宦久 나그네 벼슬아치 해 지나 오래니
何日不追思 어느날에 고국 생각 아니할손가
위의 시문은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 공(公)께서 당나라 영재 교육기관에서 수학한 때를 기록한 것으로써 당시 영재 교육기관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그 큰 혜택에 대해서 분수 넘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겸양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영재가 당시 국방담당의 위치에 있다가 시운이 불운하여 팔학사 공히 한반도로 오게 되어, 신라 나라의 구룡포에 왔던 이민자의 신분이었지만 인재는 어느 시대이든 어느 장소에 있던 그 중요한 인재들이 이제 낫설고 물설은 땅이지만 조금 지나면서 바로 당시 인근 신라 조정으로 옮겨 감은 매우 정상적인 이치 아닐 것인가.
팔학사 공히 궁궐에서 함께 한 흔적들은 각 동료 팔학사들에게 죽간일집 저자가 준 팔학사 이름을 넣어 지은 시문들에서 알 수있다.
국가의 안위가 이 몸에 매었구나! (軍國安危繫此身)
이러한 국방안위(國防安危)가 이몸에 매었다고 말 할 수있는사람의 신분은 어떠한 사람일까.그것은 당시의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자리가 아니면 불가능한 언어임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은 新羅 조정에서 이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마.궁궐(宮闕) 관련 시문 5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8페이지수록
逢上國星軺故人 中國에서 使臣온 친구를 만나서
春花秋月幾相思 봄가을로 몇번이나 그대 생각했지만
此地逢迎本不期 여기서 만날줄은 정말 몰랐소
爲問皇朝聖天子 묻노니 皇朝의 天子께 옵서
平安依舊袞裳垂 곤룡포(袞龍袍)에 如前히 平安하신가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당나라 장안 궁중에서 있을 때 동료가 경주 신라 궁궐로 당나라 황제의 사절로 방문하는 벗을 맞이 하면서 봄날 꽃피는 계절이면,가을 달 쳐다보며 그립고 그립던 고국 친구를 맞이하자,감회에 젖어 묻는다.
皇朝聖天子(황조성천자)께서 편히 계시온지를,이곳에서 皇朝 황조는 당시 당나라를 팔학사가 떠나오던 서기 782년 당시의 당나라 황제(皇帝) 덕종(德宗)을 가리키며,덕종의 안부를 묻고 있다.그 곤룡포 내리신 그 모습 여전하며,평안하시온지! 人之常情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럼 이제 逢上國星軺故人 즉 星軺 타고 온 옛 친구에서 성초(星軺)가 무엇이길래 그가 고위 사절인가를 알아 보자.星 별성자 이 글자는 일반적으로 별을 나타내는 글자지만 역사에서는 星 이 글자는 군주(Imperial)을 나타내고 있다.軺는 수레이다.따라서 星軺는 군주가 보낸 사자(使者)의 수레를 말한다.묻나니 황제 천자께서는 곤룡포에 여전히 평안하신가. 이렇게 묻고 있다.
바.궁궐(宮闕) 관련 시문 6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9페이지수록
送上國故人 中國의 친구를 送別함
春風分手杏花橋 봄바람에 杏花橋에서 작별을 하니
驛路蒼茫萬里遙 머나먼 萬里길 驛路가 아득하네
故舊諸公如問我 벗들이 내 소식을 묻거들랑
爲言來在海東朝 新羅朝에 와서 잘있다고 말해주게나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 옛 당나라 궁궐 동료 벗이 이제 사절의 공식 임무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 가는 모습이다. 그립고 그리운 그 벗들이 있는 고국 산천으로 돌아 가는 그 벗을 떠나 보내면서 살구꽃 핀 그 다리위에서의 이별의 모습은 애잔하기 눈물겹다.
사.궁궐(宮闕) 관련 시문 7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9페이지수록
秋凉憂龍樓不勝寒 가을에 宮闕이 차가움을 걱정함
晩衙紅樹葉紛紛 늦가을 관아(官衙)에 나무잎이 날리니
何處秋風送鴈群 가을바람 어데서 기러기떼 보낼까
問寢玉樓寒曉色 寢殿이 차가운지 새벽문안 드리고
敬將心線補龍裙 바늘에 실꿰여 袞龍袍를 지으리
부모님 살아 생전 부모님 잠자리에 새벽 문안 한번 드려 본일없는 이 못난 불효자는 지금 울고 있읍니다.그런데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지금 경주 궁궐의 임금 침전이 차가운지 새벽문안 드리고 바늘에 실 꿰어 곤룡포를 지으리 라는 시를 읊고 있다.
강릉유씨 거창유씨 도시조(都始祖)이신 유전(劉荃)은 이처럼 지극정성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 시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우리는 이 죽간일집을 단순한 시문집으로 다룰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문양공(文襄公) 유전(劉荃)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전혀 연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寢殿이란 임금의 寢房을 말한다.위 시문 제목의 龍樓不勝寒에서 龍樓는 朝堂을 가리키는 말로써 바로 朝廷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궁궐(宮闕) 관련 시문 8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9페이지수록
千秋節祝壽 임금님 誕辰日(千秋節)에 聖壽를 빔
天貽哲命祖吾東 하늘이 哲命주어 우리 나라 도우시니
一國臣民慶賀同 온나라 백성들이 다같이 慶賀하네
瑞甲重回新莢曆 새책력에 상서로운 甲이 거듭오니
休申昭愛醉桃宮 祝賀를 받아들여 仙宮에서 醉하셨네
龍樓陪列弁星翠 宮뜰앞에 뫼시는 臣下들 朝服 번쩍이고
鶴禁趍來冑彩紅 東宮의 行步에 世子服 燦爛해라
如海聖恩何以答 河海같은 聖恩을 무엇으로 보답할까
萬年遐祝碧呼嵩 萬壽無疆 빌면서 萬萬歲 불러보네
위 시문에서 용루(龍樓)는 궁궐의 朝堂이고,鶴禁이란 태자의 거소를 말한다.천추절(千秋節) 날에 임금님 생신을 맞이하여 만수무강을 비는 시문이다.그럼 천추절(千秋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당현종(唐玄宗) 開元 17년(AD 729년) 문무백관이 현종의 탄신일을 축하하고 그날을 천추절로 정했다.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역시 당나라 궁전에서 지나다가 이로부터 53년이 지난 서기 782년도에 한반도로 이거(移居)하여 구룡포 초창기 시절을 거쳐 경주 궁궐에 근무하면서 이 죽간일집의 궁중생활에 관련된 많은 시문을 남긴다.
이 경주에서의 생활은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구룡포 상륙부터 경주 신라궁궐 생활까지 총 18년을 지나고 서기 800년 10월에 경북 영천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22년을 전원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여 현재 경북 영천 녹전동에 묻혀 있다.
영천 상대전동 지금 녹전동으로 서기 800년 10월 이사온 후 5년이 지난 서기 805년 3월에는 그곳 터전에 수송대(愁送臺)라는 누각(樓閣)을 지어 놓고 중국서 함께 온 몇몇 동료 친구들과 함께 올라 中原(지금의 중국 하남성 옛 지명)쪽을 바라보며 시름을 달랬노라고 죽간일집 시문의 맨 끝부분을 장식하는 유명한 수송대기(愁送臺記)라는 글이 1994년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발간된 강릉유씨 대동보 네 202페이지에 올라 있다. 물론 안동국학진흥원에 수장(收藏)되어 있는 죽간일집 목판본(木板本)에도 동일한 내용임은 말 할 필요도 없다.
1902년도에 후손 劉仁源에 의하여 묘지석(墓誌石)이 발굴된다. 지금까지 문중 족보문헌에 기록되어 온 고려(高麗) 시대 동도설(東渡說)은 이제 唐나라 신라(新羅)시대로 밝혀지게 된다.아울러 타 문중의 시조상계 조사 보고서에서도 임팔급의 동도년대가 동시에 AD 782년 신라 시대로 기록됨이 밝혀져 있다.
2020.4.25일 全國林氏中央會發行 임씨상계보감 제 96페이지 수록.
자.궁궐(宮闕) 관련 시문 9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9페이지수록
肇夏避署 첫 여름에 避暑함
將相樓臺署雨晴 將相樓에 여름이 맑게 개이니
逍遙裘帶好招迎 놀러온 옷차림에 좋게 불러맞이네
炎天祇恐淸風少 더운때 혹시 맑은 바람 적을까 해서
分付靑童捲水晶 아이를 시켜서 門 발걷었어라
위 시문은 將相들이 將相樓臺에 올라 고관의 관복을 느슨히 한 모습으로 將相樓에 올라 소요(逍遙)하는 대표적인 문무대신(將相)들의 궁궐내의 문무백관의 풍경화다.여기서 말하는 將相이라는 말은 문무대신(文武大臣)을 이르는 말로 장수(將帥)와 대신(大臣)을 말한다.
그리고 “裘帶”란 古代 達官 귀인의 복식으로써 아주 귀한 고관들의 복식을 입고 느슨한 상태로 한 모습을 말하는데 그 모습을 옛 사람들은 경구박대(輕裘博帶)라고 표현했다. 또는 이 모습의 복식상태를 경구완대(輕裘緩帶)라고도 했다.
궁중의 장수와 제상들 즉 문무대신들이 관복을 느슨히 한 모습으로 궁궐내에 문무대신들만의 누각에 올라 소요하는 그림같은 시문이 아닌가. 이 시문도 경주 궁궐에서의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이 궁궐의 대신(大臣)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표적 시문이다.
차.궁궐(宮闕) 관련 시문 10
시문 제목 강릉유씨 1994년 발행 강릉유씨 대동보 首卷 제 189페이지수록
東宮册禮獻賀 세자책립(世子册立)을 하례함
燕翼嘉謨萬世垂 先王의 좋은 計策이 萬世에 드리우니
冑筵寶册覽休儀 寶册받은 世子가 아름답게 보이네
聖功今日開蒙正 오늘날 임금님 公德 바르게 펴시는데
睿德他時出震治 덕망 세자 임금되면 善政펴시리
箋幅爭登千一頌 축하 글월 다투어 올림에 千首가 다 頌이요
管絃送奏四重詩 거문고 젓대는번가라 四重詩를 合奏하네
羇臣亦忝淸朝列 나그네 臣도 朝廷에 참여했으니
報答無如祝壽巵 보은으로 祝盃드림 제일이라네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궁중의 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시문을 남긴다.한 폭의 그림같은 궁궐 세자 책봉 모습이 그려져 있다.거문고 젓대가 사중시(四重詩)를 합주하고 그 축하 글월들이 1천 수가 넘는다고 하고 있다.
저자 유전(劉荃)의 신라궁궐 모습을 그린 이상 10수의 시문을 올렸다.이렇게 죽간일집이란 시문집에는 우리가 평소 알지 못하였던 엄청난 내용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그리고 죽간일집은 우리 국문학사에 신라 문학으로써의 그 위상이 들어 나야 할 것이다.
실로 珠玉같은 史實과 그림같은 유려한 문체로 작성된 시문들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죽간일집은 고려시대 시문집이 아닌 신라시대 시문집이며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의 한반도 동도년대(東渡年代)는 고려시대가 아닌 신라시대인 것이다.죽간일집(竹諫逸集)은 신라문학(新羅文學)이다.
三. 유전(劉荃)의 시대 배경과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은 서기 782년 경북 구룡포 해안으로 상륙한다.그후 언제인가 그 년도를 알 수없지만 경주로 이거하여 경주 왕궁에서 병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는다.그런데 신라의 왕궁에서 근무할때의 주옥같은 많은 시문을 죽간일집에 남겼는데 그 당시의 신라 궁궐의 왕은 누구였을까를 보자.
우선 유전(劉荃)의 한반도 40년 생애의 년표를 보자.서기 782년 新羅 37代 宣德王 3년에 한반도 경북 구룡포(九龍浦) 해안에 상륙한 중국 唐나라 조정이 있던 장안(長安) 궁궐 고관 출신 당나라 학자 관료들은 이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처음 도착한후 이제 한반도 한반도 언어를 익히고 적응하자,몇년이 지난후 멀지 않은 당시 신라 왕궁이 있는 경주로 옮겼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은 이미 중국 당나라 조정에서 한림학사의 신분을 지니고 각기 병부상서(兵部尙書)를 비롯한 고관 출신들의 대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이때 한반도 도착당시의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의 나이는 32세,평택나주임씨 시조 동료 팔학사 임팔급은 18세였는데 이미 한림학사를 획득하였다고 전국임씨중앙회에서 2002년도 발간한 林氏上系譜鑑에 적혀 있음을 이미 상술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급 인재들이 비록 물설고 낯설은 이국땅 이민의 땅이지만 어찌 곧 이어서 그 명성(名聲)과 학문(學文)들이 바로 궁중에 알려지지 않을 수없음은 고금의 이치에 일말의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들이 한반도에 도착한 해인 서기 782년에서 3년이 지나자 서기 785년에는 신라 37대 선덕왕은 후사없이 사망하자 이어서 서기 785년에는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며,이제 즉위 할때 쯤이면 이 중국의 당나라 조정에서 실무경험이 풍부한 고관출신들이 한반도 신라의 언어와 새로운 풍토에서의 적응도 충분할때 이며,이때 새로 즉위하게 되는 신라 38대 원성왕은 새로운 조각(造閣)을 구성함에 있어 완벽히 잘 준비된 고급 인재들이 있었던 것이다.이 원성왕은 서기 798년까지 14년간을 집권한다.유전 일행 중국에서 온 팔학사 일원은 이 궁궐에서 근무하면서 이 주옥같은 역사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죽간일집(竹諫逸集) 132수의 시문을 남긴다.이는 죽간일집에 함께 온 동료 팔학사들에게 전하는 각 수의 시문들이 있는데 ,이 시문들에 그들의 관직이 함께 언급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서기 782년 음력 8월달에 구룡포에 상륙해서 18년을 지난후 서기 800년 10월 현재 영천의 녹전동인 영천 上大田洞으로 이거하며 그곳에서 전토를 장만하고 전원생활을 하면서 살다가 22년이 경과한 후 사망하여 그곳에 묻힌다.신라 38대 원성왕이 사망한 2년 후인 서기 800년 10월 경북 영천시 녹전동 당시 상대전으로 옮긴 유전은 5년 지난 서기 805년 3월에 그곳 전원생활 터전에 수송대(愁送代)를 지어 놓고 고향땅인 중국의 하남성쪽을 바라보면서 회포를 달랬노라고 그가 죽간일집에 남긴 愁送代記에서 말하고 있다
四. 結 言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 유전(劉荃)의 후손들인 강릉유씨,거창유씨 문중 각종 문집에서 지금까지도 그 한반도 동도년대를 중국 송나라 신종때 즉 한반도 고려 문종때로 한 서기 1082년으로 하고 있고,한편 함께 동도한 평택임씨,나주임씨 문중의 임팔급(林八及) 후손 문중의 각종 족보를 비롯한 문헌들은 그 동도년도를 서기 850년경으로 하고 있다.한편 강릉유씨 문중의 자료들은 유전(劉荃)의 한반도 상륙지점이 경북 구룡포 즉 창주용포(蒼州龍浦)라고 되어 있음에 비추어 나주평택임씨 문중에서는 평택 해안을 통해 상륙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죽간일집 목판본 영인본인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竹諫逸集木板本 글의 영인본에 의하면 팔학사 공히 楚海龍浦里로 상륙했다고 林氏譜牒에 기록되어 있다고 올라 있다.같은 배를 타고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통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이다.어떻게 각 문중의 기록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인가.
각 팔학사 후손 문중의 정리할 공통과제인 샘이다.죽간일집의 내용은 우리 國文學史에서는 新羅文學의 귀한 資源이 될 것이지만 팔학사 후손 문중들 특히 지금 이땅에 그 후손들의 실체가 알려져 있는 세 문중 즉 강릉거창 유씨 유전(劉荃)의 후손들과 나주평택 임씨 임팔급(林八及) 후손 문중,그리고 전남 동강면을 중심으로 세거 하고 있는 남양송씨 송규(宋奎) 후손 문중의 시조 역사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됨은 말 할 것도 없다 할 것이다.
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이 한반도에서 살다 간 서기 782년에서 서기 822년까지 40년간의 당시 신라의 역사연대표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新羅歷史年代表(劉荃 한반도 생존 기간 AD 782-822年 40년간)
代 |
왕명 |
재위기간 |
성 |
약사
|
37대 신라 선덕왕(宣德王) 780년~785년
38대 신라 원성왕(元聖王) 785년~798년(신라왕궁)
39대 신라 소성왕(昭聖王) 798년~800년
40대 신라 애장왕(哀莊王) 788년~809년
41대 신라 헌덕왕(憲德王) 809년~826년
신라 38대 元聖王과 죽간일집의 저자 劉荃의 연대의 同時性 살펴보기
元聖王 왕위에 즉위 년도 AD 785년
劉荃 구룡포 상륙 입국 AD 782년(八學士 중국에서 입국후 3년 38대 元聖王 즉위)
元聖王 사망으로 퇴위,퇴위년도 AD 798년
劉荃은 퇴임후 영천(永川)으로 이거 ,이거 년도 AD 800년 10월.
신라 조정에서 원성왕 때의 劉荃의 위치를 볼 수 있는 죽간일집 시문은 132수의 시문중 제목 영주자견(永晝自遣) 이 시문에 나오는 구절 즉 軍國安危繫此身 “國家의 安危가 이몸에 매였구나” 이 구절인데 국방의 핵심을 책임진 자였음을 이 시문에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원성왕 신라 조정에서의 그 직분과 그 직분에 어울리는 이러한 싯귀를 남길 수 있는 것은 劉荃이 중국 당나라 조정에서 궁중 영재(英材) 교육기관인 이영전(邇英殿)에서 修學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오르고 강릉유씨 족보에는 일관되게 중국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부상서란 현재의 국방의 최고 책임자를 이른다.신라 원성왕 조정에서 아마도 이 시문에 의하면 이 몸에 국가의 안위가 매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최고 국방 책임자임에 틀림없다.
신라 원성왕 서기 785년-798년간의 역사를 조감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신라 역사의 기록은 한국의 역사학계, 중국의 신라 역사 기록 방면에서도 매우 빈약하다.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中國正史朝鮮傳에 약간 언급이 있을 정도이다.지금까지 한문으로 쓰여진 최치원(崔致遠) 중심의 신라문학에서 이 유전(劉荃) 죽간일집 시문이 더해 질 때 신라문학의 범위의 확장과 아울러 그 시문 내용에서 나타나는 그 역사성이 매우 중시될 것이다.
이상으로 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詩文)은 신라문학(新羅文學)임을 밝히면서 본고를 마칩니다.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 연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애정을 아끼지 않으시는 讀者諸賢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자료
1.江陵劉氏大同譜 首卷 1994년 강릉유씨 대종회
2.竹諫逸集木板本 影印本 1926년 국립중앙도서관
3.長興林氏梧亭系家族史 2010년 林東根
4.자랑스런 林氏 이야기 2014년 올린피플스토리
5.林氏上系譜鑑 2002년 全國林氏中央會
6.江陵劉氏宗報創刊號 1990년 강릉유씨대종회
7.高麗崇義殿史 1992년 崇義殿仰巖齋中
8.中國歷史年代表 1994년 中國文物出版社
9.新羅金氏二千年史 1979년 寶蓮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