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씨 유전 시조의 중국 고향
기주도(冀州道) 무산삼리(茂山三里)를 찾아 가다
三十三世孫 劉 慶 相
公居冀州道茂山三里<유전(劉荃) 도시조의 고향은 기주도 무산 삼리이다>
기주도 무산삼리를 찾는 길은 험난했다.결국 천신만고 끝에 기주도 무산삼리 조상의 도시조님 중국 고향마을을 찾아 갔다.지금 하남성 낙양시의 한개 행정구인 낙양시 길리구(洛陽市吉利區)가 옛 하양(河陽) 땅이다.
이 하양에서 북쪽으로 약 10여Km 지점에 지금은 하남성 제원시(濟源市) 지성진(軹城鎭)의 행정 자연부락인 조요촌,조묘촌,이허봉촌,이 세 부락이 둘러싸고 있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이 산의 이름이 지금은 망산(邙山)이다.기주도 무산삼리에서 “茂山“의 중국어 발음은 마오산(Maoshan)이다.이 마오산이 도시조 오신후 12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망산(Mangshan)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 곳을 가는 길은 오직 옛 하양 땅인 지금의 낙양시 길리구 지역에서 오직 그 통하는 길은 석장향(石莊鄕) 이라는 지역을 통하는 옛길 오직 이 하나뿐이다. 이 길은 지금은 차도 다니기는 하지만 옛길 그대로이다.그리고 지금 도시조 고향 망산(邙山)은 옛 하양과 지금의 하남성 제원시(濟源市)를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 되는 능선이다.
1.망산(邙山) 주변 삼리(三里) 마을 소개
위의 지도에 나타난 지명들을 잠시 상세히 설명드리고자 한다.
이 망산을 둘러싸고 있는 세 부락은 조요촌,조묘촌,이허봉촌이다.지도에서 보이는 소조요(小曺凹)촌은 이 지도에서 망산 주위에 있는 것처럼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이 마을을 가 보니 이 우리가 찾는 망산에서 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실제로 이 망산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은 조요촌(曺凹村) 조묘촌(曺廟村) 이허봉촌(李許峰) 세 마을이다.
이 망산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의 이름들이 조요촌,조묘촌등 曺 이 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이러하다.명(明)나라 홍무(洪武:서기 1368-1398)년간 曺氏가 이웃 산서성(山西省)에서 11대조가 들어 온후 그 인구가 늘어 지금은 조요촌,조묘촌에 그 마을이름에 曺字가 앞에 붙게 되었으며,실제로 조요촌(曺凹村)에는 조씨 사당을 마을 양지쪽에 잘 지어 놓고 있었다.그리고 이허봉은 李許峰 마을인데 이 마을 이름에 李字가 붙은 이유도 유사하다.청(淸)나라 건륭(乾隆:서기 1736-1795)년간 李氏가 서쪽 지역에서 들어 온후 이 마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실제로 이 세 개의 마을에는 그러나 조씨와 이씨만 사는 것은 아니었고,曺,趙,劉,李,衛,馬,張氏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2.망산(邙山) 주변 삼리(三里) 마을 풍경
조요촌(曺凹村) 曺氏 사당 2019.11.16.일 촬영
조요촌(曺凹村) 모습 2019.11.16.일 촬영
조요촌(曺凹村)과 조묘촌(曺廟村) 그리고 이허봉(李許峰)은 모두 이 산의 바로 아래에 동쪽,남쪽,서쪽에 위치해 있으면서,그 망산(邙山)의 언덕을 거의 위까지 밭을 만들어 경작하고 있었고 지금은 보리가 한참 秋色이 깊어가는 이 날씨에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마치 우리가 어릴 때 자라나던 옛 고향의 뒷동산처럼 포근했다.소몰고 올라가 놀던 그 뒷동산처럼 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체 역사의 숨결이 들려오는 듯...아름답다.
3. 冀州道茂山三里(기주도무산삼리)
“公居冀州道茂山三里<공거기주도무산삼리>“
1994년도 강릉유씨대동보 수권(首卷) 제 207페이지 수록되어 있음.
공거기주도무산삼리<公居冀州道茂山三里>
유전의 고향은 기주도 무산삼리였다.
公居 冀州道茂山三里
劉荃의 고향은 기주도 무산삼리였다
유전(劉荃) 도시조의 고향은 기주도 무산 삼리이다.이 구절은 우리의 강릉유씨족보에 올라와 있는 구절이다.즉 우리의 도시조(都始祖)의 고향은 중국 기주도(冀州道)에 있는 무산삼리(茂山三里)였다는 것이다.
建中丙子三月十五日子堅規生(건중병자삼월십오일 자견규생) 이 묘지글에 의해서 현행 강릉유씨 ,거창유씨 공히 공통 도시조이신 유전(劉荃)의 맏아들 견규는 서기 1096년생이 아닌 서기 796년생으로 변경되고,꼭 현행 족보의 견규생년과 300년이 오차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이 묘지명 글에 의해 밝혀진 당나라 서기 782년,신라 선덕왕(宣德王3年)으로 환산하여 그 당나라 당시의 지명을 고증해 나감을 밝힌다. 따라서 그 출생과 사망년도도 공히 300년 소급되어지며,중국 송나라 당시 제상 왕안석의 청묘취식법에 반대하다가 왔다는 현행 기록과 완전히 다른 해설을 전개해 나가게 되며,그 유전(劉荃)의 연표는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유전(劉荃)의 연표
출생 서기 751년,한반도 표착, 서기 782년 (당시 32세),경북 포항시 구룡포 해안 8학사 상륙.서기 796년 맏아들 견규(堅規) 출생,서기 822년 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 경북 영천 사망.
그러나 영천의 도시조 산소에서 墓誌石은 1903년 발견되고,1980년 10월 1일 대전 유춘식(劉春植) 당시 대전지역 종친회 총무(1932년생.2020년 현재 대전 생존) 종친 일행의 당시 사초행사시 재 발굴 확인한 후에 다시 매립한다.당시 확인 결과 작업현장의 종친들의 환호성이 그날 하늘을 찔렀다고 말한다.
평택나주임씨(平澤羅州林氏) 도시조이신 임팔급(林八及)님의 한반도 동도년도도 서기782년으로 우리의 도시님과 같다.全國林氏上系寶鑑에 기재되어 있는 임팔급(林八及)님의 한반도 동도년대도 우리의 유전 도시조님과 같은 서기 782년으로 일치함도 전국임씨현행 1082년 동도기록과 꼭 300년의 오차가 있었음을 알 수있다.
2019.11.15일 최초 유전 도시조의 고향 방문 첫날의 보리밭 풍경.
나는 11월 15일 이 망산 위에 있는 도시조 유전의 고향 보리밭 풍경에 감격케 된다.
2019.11.16일 이튿날인 第二日次 정밀 답사 하던 날
이틑날은 택시를 불러 타고 나는 중국 운전수와 함께 이곳 도시조 마을들을 정밀 답사한 제 2일차 순방이었다.6세의 아들이 있다는 36세의 장근(張謹) 이 중국 젊은이는 나와 함께 이 마을을 돌면서 마치 자기 고향을 찾는 듯 혈육을 만난듯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4. 기주도(冀州道)의 위치
이미 필자의 고증문<2013.12.2.일 대종회 기제출>에 의해 언급되어진 바있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서 말하는 지리와 역사에 관하여는 각기 1051년,1082년,1096년.1122년이 아닌 모두 300년 소급한 751년 탄생,782년 동도년도.796년 견규 생, 805년 愁送臺 건립, 822년 사망 등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기주도(冀州道)가 어느 곳인가를 먼저 설명합니다.“冀” 이 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쓰지 않지만 중국의 북경에 가면 차량 뒤편의 번호판 앞에 지역을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이 바랄기 (冀)字이다. 우리나라도 10여년전에는 지역 번호판을 차량 앞뒤에 넣어서 다녔지요.지금 중국은 이 제도를 쓰니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현재가 아닌 서기 751년~782년 즉 도시조의 탄생~한반도 移居까지의 당시 지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그럼 그 당시 즉 중국 당나라 서기 751년<당현종(唐玄宗) 연호 천보(天寶) 10년>에서 한반도 오신 연도인 서기 782년<당덕종(唐德宗) 연호 건중(建中) 三年>까지의 도시조께서 중국에 계시던 31년간의 당나라 당시에 기주도(冀州道) 지역이란 어느 곳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최대 포탈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서 검색하면 “冀州“의 당시 범위는
“冀州辖地相当于今河北中部和南部、山东西部、河南北部。”라고 나온다.
즉 기주란 지금의 河北省 중부,남부,그리고 산동성 서부,하남성 북부이다.라고 나온다.즉 기주도라고 하는 지역은 지금의 낙양이 있는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낙양시 앞을 흐르는 황하강(黃河江)의 강 이북의 하남성 땅 모두를 말하기도 한다.우리 유전(劉荃) 도시조은 중국 고향에 관하여 이곳에 말한 기주도 무산삼리 이외에 우리에게 남겨 주신 죽간일집(竹諫逸集) 시문과 수송대기(愁送臺記)를 통하여 네 번이나 그 고향이 중국 하남성임을 말하고 있다.아래와 같다.
이 우리 유전(劉荃) 도시조님께서 사시던 그 낙양시 황하강 북쪽에 위치한 하양(河陽) 땅이 바로 이곳에서 말하는 그 광범위한 기주도(冀州道)의 최남단에 속한 하남성 땅이 었던 것이다.
5. 죽간일집에 등장하는 中州,中原의 위치
지금의 도시조님 산소가 있는 영천 녹전동 현재 구인재(求仁齋)가 있는 그 땅에 서기 805년도 3월달에 수송대를 지어 놓고 중국에서 함께 온 옛 친구 2,3명과 올라 옛날 고향 하남성 즉 당시 중주(中州) 땅을 향하여 시름을 달랬노라고 적고 있다.
~언제나 이 궁벽한 산속에서 나뭇가지 낙엽지는 가을이면,바다위 달 밝은 저녁이면,나는 서쪽 중주(中州) 땅을 향하여,임금 그리는 마음 깊어지고,지난 날을 회고하며,슬픔에 눈물 짓고.....~
라고 수송대기(愁送臺記)에서 유전(劉荃)은 이 고향그리는 詠嘆의 싯구(詩句)를 남긴다.
수송대기에서 도시조님께서 그리워 눈물짓던 이곳에 등장하는 그 중주(中州)가 어느 곳일까를 중국의 최대 포탈사이트 바이두에서 검색해 보자,
“中州是河南的古稱“<중주란 河南의 고칭이다.라고 나온다.이곳 도시조의 수송대기에 나오는 중주는 즉 고향은 하남성이라는 것이다.또한 죽간일집 시문중 옥천암 다녀 온 뒤 쓰신 “遊玉泉庵”에서는 머나먼 중원(中原) 땅으로 기러기 떼 보내노라,는 시문이 나온다, 이 시문에 나오는 中原은 어느 곳일까.또 다시 바이두에서 검색해 보자,
中原又稱中土,中州,華夏,是指洛陽至開封一帶爲中心的黃河中下遊地區,狹義上指今天的河南省-
중원이란 다시 중토이며,중주이고 하화 즉 고대의 하남성의 명칭이고,따라서 이는 낙양에서 개봉에 이르는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황하강 중하류 지역이고,협의로는 오늘날 하남성이다-라고 나온다.즉 도시조께서 꿈에도 그리던 그 고향이 하남성이라고 수송대기에서도,또한 죽간일집 시문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남성에 속한 하양(河陽) 오늘날 낙양시 길리구(吉利區) 지역이 바로 나의 고향이라고 죽간일집 시문
“범주유해상설왕적:泛舟遊海上說往蹟”<바다위 배 띄우고 지난 날 예기하다>에서 도시조 께서는 서풍에 흔들리는 외로운 배한척.온 눈에 흐르는 눈물 거둘 수없어라, 하양가국 금하 처:河陽家國今何處-하양 내집 내 고향 땅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돛단배 밖은 모두 이국땅이네.
이처럼 도시조께서는 이국땅에서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그리고 있다.
6. 길리구(吉利區)란 어떤 곳인가
강릉유씨 유전(劉荃) 도시조님의 중국 고향은 지금 하남성 길리구(吉利區)이다.
위치는 홀로 황하강을 건넌 황하강 이북에 위치하고 면적이 79.9 평방키로 인구 69만명인 곳이다.1982년부터 이웃 하남성 맹주시(孟州市)로부터 이곳으로 그 행정 소속이 옮겨진 곳이다.이곳은 도시조께서 죽간일집에서 하양가국금하처(河陽家國今河處)~내 나라 내집 하양 땅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시문에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의 낙양시 길리구이다..하남성 낙양시에는 여섯개의 구(區)가 있다.:江西區,洛龍區,澗西區,老城區,瀍河區,吉利區. 6개 區중 하나.즉 길리구란 현재 중국 하남성 낙양시의 한개의 구(區)인 것이다.
2018.4.17일 최초 도시조 고향 방문단.(길리구 하양 광장 앞에서)
최초 도시조 고향 방문단 명단(2018.4.20일)
인솔 대표: 단장 유종식(劉鍾植)
유기찬(劉基燦),유영경(劉永京),유승조(劉承祖),유준상(劉準相),유재정(劉載正)
유영식/도영숙(劉永植/都榮淑),유재흥(劉載興),유상종(劉尙鍾),유풍종(劉豊鍾)
유재흠(劉載欽),유한종(劉漢鍾),유일남(劉一南),유영호/공종자(劉永鎬/孔鍾子)
유경수(劉京守),유영옥(劉永玉),유미광(劉美光)유경상(劉慶相),유규상(劉奎相)
유명상/황치봉(劉明相/黃治鳳)
7. 망산(邙山) 왜 무산(茂山)일까(1)
그 길리구(吉利區)에서 직선거리 10여 킬로미터 북방에 위치한 당나라 당시는 하양(河陽) 땅이었지만 근대 사회에서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는 하남성 제원시(濟源市) 지성진(軹城鎭)에 속해 있는 망산(邙山)을 둘러 싸고 있는 삼리(三里) 마을 즉 세 마을을 찾아 갔던 것이다.즉 “冀州道茂山三里“를 찾아 갔던 것이다.그런데 왜 이 망산(邙山)이 무산(茂山)이라고 동일시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는 아래와 같다.
이 기주도 무산삼리를 찾는 과정은 이렇게 된다.역사의 사실를 고증 규명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좀더 상세히 언급하면 언급할수록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상술코자 합니다.이미 죽간일집 시문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 인하여 도시조님의 고향이 하양 즉 중국 하남성 낙양시 길리구(吉利區)임을 알고 있고,그런데 그러면 길리구까지만 알면 되는가.그것은 아니다.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길리구에서도 그 태어나서 자라난 그 고향마을을 알고싶은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그런데 그 태어나서 자란 마을에 관하여 우리의 족보 문집에에는 공거기주도무산삼리(公居冀州道茂山三里)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도시조께서는 이미 그 자손들에게 나의 고향은 기주도 무산삼리(冀州道茂山三里)라는 곳이라고 밝혀 놓으신 그 기록을 후손되는 우리들이 찾아 나선 것이다.이 유전 도시조의 고향을 찾아 나섰던 지금까지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1.2016년 4월 19일 중국 하남성 평정산시에서 열리는 유루(劉累) 제사 행사 참석 및 하남성 맹주시 제북두촌 (劉氏集姓村) 방문 劉豊鍾 劉慶相 2명.
2.2018년 4월 16~21일 강릉유씨 중국선조 탐방여행 26명.
가.섬서성 서안 유방릉(劉邦陵) 참배
나.하남성 맹주 제북두촌 현성왕묘(顯聖王廟) 관광 및 그 곳 중국종친 방문.
다.낙양시(洛陽市) 길리구(吉利區) 하양광장(河陽廣場) 내려서 강릉유씨 초도 (初度) 도시조(都始祖) 고향 방문
8. 망산(邙山) 왜 무산(茂山)일까(2)
3.2019.7.9.일-7월 16일 유경상 1인
가.중국 하남성 맹주시 제북두촌(堤北頭村) 중국 종친 마을 방문 중국 종친들과 기주도 무산삼리(公居冀州道茂山三里)를 찾기 위해 맹주지역 산야를 그곳 중국 유씨종친들과 합동으로 답사.
나.낙양시 길리구(옛 하양) 河陽 길리구로 옮겨 길리구(吉利區) 지리답사
4.2019.11.4.일~18일 유경상 1인
기주도 무산삼리(公居冀州道茂山三里)를 찾기 위한 인근지역 정밀 답사.
가.하양(河陽)이라는 지역이 최초로 그 행정처를 설치했던 괴수향(槐樹鄕)의 상와촌(桑洼村) 지역 그리고 하양고성(河陽古城) 지역을 답사하고,인근의 유씨 집성촌 유장촌(劉莊村)등을 돌아 보다.맹주와 괴수향 지역 공히 산은 전무하다.
나.다음은 길리구 북방 인근지역인 석장향(石莊鄕) 지역과 인근의 유씨집성촌 (劉氏集姓村)을 답사했다.역시 이 지역도 산은 없었다.즉 무산삼리(茂山三里)에서의 우선 산(山)이 있고 봐야 하는데 도대체 산이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도시조께서 말씀하신 기주도 무산삼리에서의 그 산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산삼리(茂山三里)란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까.너무나도 실망하여 그냥 귀국할까 하던 때에 결국 중국 바이두(百度) 지도를 스마트폰으로 살피던중 이곳 석장향 북방에 망산(邙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邙山이라니까 혹시 낙양시내에 있는 우리가 아는 북망산천 고묘박물관 뒤의 北芒山과 혼동없으시길바랍니다.완전히 다른 이곳은 황하강 이북의 다른 邙山 이야기입니다.
9. 망산(邙山) 왜 무산(茂山)일까(3)
중국에는 외국인이 도시지역의 관광권을 떠나 시골마을을 홀로 다니는 행위를 감시한다.한국의 중국 대사관에서도 그 중국의 개인비자는 그 방문 목적등에 유의하며,중국의 숙소는 일부 자유로운 선택을 불허한다.외지인에 대한 감시가 삼엄하다.이튿날은 그래서 생각해 냈다.
중국 운전수와 함께 그 마을을 다니면서 자세히 다시 보기로 하고 차를 몰았으며,자세히 그곳 지역을 답사하고 온 것이다.이렇게 최초의 도시조 고향방문을 모험하듯이 마치었는데,최초의 역사적 방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럼 이 지금 이야기하는 망산(邙山)이 기주도무산삼리(公居冀州道茂山三里)에서 나오는 그산과 일치해서 맞아야 할 것아닌가.이 문제에 관하여 살펴보자.
1.어차피 도시조 고향은 하남성 하양이라는 곳이다 라고 그 범위를 한정했다.
2.그러면 하양(河陽)이 옛날 중국역사에서 기주도(冀州道)에 속함은 위에서 누차 언급한 바있으며,필자는 현지 길리구의 수많은 그곳 중국인 주민들에게 그 길리구의 기주도에 속함에 관하여 누차 확인해서 현지인들도 그 점에 관하여는 완전 일치하고 동의함에 이의가 전혀 없었다.
3.그러면 이 기주도 무산삼리는 지명은 바로 하양땅 즉 현재의 길리구 지역과 그 인근 가까운 범위내에 존재하는 것이다.
4.그러면 몇칠동안 인근 맹주(孟州) 지역과 길리구(吉利區)는 물론 이웃 석장향(石莊鄕) 지역에도 아무런 산도 없다.이곳 맹주지역과 이곳 길리 지역 공히 황하강 강변에 위치한 지역으로써 근본적으로 산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이다.우리 한국의 지형과는 완전히 그 형세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제 바이두(百度) 지도를 스마트폰을 통하여 본 그 바이두 지도상에 나타난 “邙山“은 이제 이 황하강의 북쪽으로 10여 킬로미터 올라간 지역으로써 이제 비로서 작은 동산이긴 하지만 산이란 명칭의 지명이 나타난 것이다.
망산(邙山) 위의 보리밭 <2019.11.15일 촬영> 유경상
10. 망산(邙山) 왜 무산(茂山)일까(4)
그리고 그곳 운전수에게 한국의 카톡에 해당하는 위챗(微信 wechat)을 통하여
그곳 망산까지 19 킬로미터라고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직선 거리는 이보다 짧아서 한 15킬로는 되는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면 그곳에 이 망산(邙山)외에 다른 산들은 없는가.이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그곳 지도를 보면 망산(邙山) 외에서 인근에 아니 조금 더 멀리 몇 개의 산들이 보인다.이들도 산은 아니다.작은 흙산 동산들이다.
그 이름은 후첨산(後尖山)이 있이 있는데 이 산 주위에는 이 산을 둘러싼 바로 인근한 세 개의 마을 즉 기주도 무산삼리에 해당하는 “三里” 즉 세동네가 그 산들 주위에는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산의 이름은 후첨산(後尖山 Houjianshan 허우잰산)이어서 기주도무산삼리(冀州道茂山三里)에서 말하는 무산(茂山:Maoshan 마오산)이 그곳 망산(邙山:Mangshan 망산)의 그 발음 유사성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그 지역의 마을 이름이 이 원시사회를 통해서 지나올 때에 현대 사회의 급속한 사회 변천과는 다른 현상을 지니는 속성으로 인하여 그 변화가 없는 것이다.옛 마을의 즉 자연부락 이름이 어느날 변 할수 없듯이 그 지역의 산 이름도 또한 전혀 자연부락 단위에서는 변할 수없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이다.
이러한 혈거문화 지역에서 그 산 이름이 어떻게 변할 수있을까.무산(茂山)은 이 한자를 우리 한국에서는 무성할 무자로 읽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 한자의 태어난 고장이며,그 무산(茂山)은 중국인의 발음이 “무산”이 아니고 중국발음 “마오산”인 것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다.다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해서 즉 왜 이곳 망산(邙山) 즉 “망산“을 두고 “마오산“이라고 동일시 하려고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두 산의 비슷한 발음
茂山(Maoshan: 마오산)
邙山(Mangshan:망산 )
11. 망산(邙山) 왜 무산(茂山)일까(5)
첫째는 이곳에 이 지역 전체에 산이 없고 ,산다운 산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때문이고,그리고 단지 하나 있는 산은 그 이름이 허우잰산(後尖山)인데 그 발음이 전혀 거리가 멀고 망산 Mangshan 과 Maoshan이 모두 미음“ㅁ”즉 “M"계열의 音이고 그 발음도 유사함에 비추어 허우잰산은 너무나 이질적인 발음이면서 그 주위에 마을이 가까이 없다.이곳 망산(邙山:Mangshan 망산)은 바로 산 하부에 붙어서 세 개의 마을이 직접 위치해 있다.그 세 개의 마을이 기주도 무산삼리의 三里에 해당 할 것이며,그 마을의 이름은 조요촌(曺凹村) 조묘촌(曺廟村) 이허봉(李許峰) 村 세마을이 사이 좋게 이웃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산은 고속 국도 건너 저 멀리 있는데 거리도 완전히 딴 곳이고 해서 언급을 할 필요도 없는데 그 산 이름은 국도 건너편에 부처불자 불산(佛山)인데 이름도 포어산(Foshan: 佛山:포어산)인데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하는 망산,마오산등과 너무나 그 발음도 다르고 거리도 멀리 혼자 떨어져 인근에 마을도 없어 논외로 하자.그러면 결국 이곳 지방은 산이 없고,그나마 산 3개중에 하나는 이름도 다르고 주위에 마을도 없고 해서 제외하고,하나는 산 이름이 라고 해야 허우잰산(後尖山:Houjianshan) 이어서 “M" 계열의 발음도 아닐뿐더러 그 주변 가까이 삼리(三里) 세 동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망산,마오산처럼 그 산 이름의 유사성“M" 계열의 발음 음가(音價)가 그 단어의 어두(語頭)에 함께 공존(共存)하는가 여부이다.이 발음의 유사성은 민속 전통과 그 언어의 계승 전달 과정에서 기본적 핵심인 것이다.우리는 이 망산을 무산 즉 중국 원 발음 마오산(茂山:Maoshan)으로 보는 이유이다.그리고 세 개의 마을이 함께 이웃하고 있다.주변에 길리.맹주.모두 산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오직 망산(邙山) 밖에 유사한 산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이유는 선조의 문집 자료들에서 하양(河陽)이라는 지역 내에 시조님의 고향이 있다고,문집의 각종 자료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어떠한 다른 선택이 또 더 있을 수있을까.수많은 후인들의 고찰이 있기를 바란다.
12.邙山 三里
위의 지도에서 보면 오직 하양 길리구 지역에는 3개의 산 밖에는 없다.그중 불산,후첨산은 이름이 유사성에서 멀고,주변에 3개의 마을이 포진하고 있는 산이 없어서 우리가 찾는 세 마을 즉 三里에 해당하는 산이 없다.
▲:그런데 이번 현장 답사 결과 이 망산(邙山)은 꼭 중절모자를 엎어 놓은 작은 마을 뒷동산 같았으며,세 마을 조요(曺凹),조묘(曺廟),이허봉(李許峰) 세 마을이 그 중절모 하단에 바로 하단에 배치되어 있는 자연 부락이었다.
▲:도시조께서 태어나 자란 그 세 개의 자연부락은 어찌보면 멀리 타국에 나와 있는 몸으로써는 같이 자란 그 세 마을의 어린날 친구들을 그리며 그 세마을이 곧 한 마을로 여겼을 것이다.그 작은 부락 당신의 집이 있던 그 마을을 속칭하기 보다는 그 세마을을 그 동산을 중심으로한 그 마을을 하나의 단위 유
니트로 계산한 개념의 언어가 바로 이국에서의 고향을 그리는 단어로 표현된 것이 바로 망산을 가운데 놓고 삼리(三里)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산도 없는 개활지 같은 지형에 이 산이라고는 지도상에도 오직 불산(佛山),망산(邙山),후첨산(後尖山) 단지 셋 밖에 없는데 이처럼 중절모 아래 세 개의 산이 옹기종기 어깨를 나란이 하고 있는 이 조건의 망산 중심의 한 단위로 이루어진 그 작은 향촌(鄕村)을 갖춘 이러한 삼리(三里) 또 어느 곳에 있기나 할까.그래서 우리 족보에서 나오는 유전(劉荃) 도시조님의 기주도 무산삼리를 이곳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의 운전수를 돌려 보내고 내려서 마을을 혼자 통과하면서,나는 감히 신분의 노출을 관리하느라고 사진을 아니 사진기를 꺼낼수 없었다.그리고 혼자 다시 하양(吉利區)로 돌아 오겠다고 도로를 따라 걸은 길은 방향이 틀리고 결국 제원시(濟源市)로 가는 길이었으며,도로는 이제 고갯길로 접어들었고 그 고갯길을 혼자 넘으면서,나는 정말 무서움이 엄습해왔다.왜 여인네들은 혼자 길을 걸을 때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들지않고 지나가는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었다.결국 두시간여를 걸었을 때 한 대의 버스가 오길래 손들어 타고 제원시로 갔으며,운전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하루에 여섯 번 다니는 버스였다.
13.유전고향 삼십릿길 (劉荃之路 三十里)
이 길이 우리의 도시조께서 어린날 걷던 하양(河陽) 다니시던 옛길 이다.
유전고향 삼십릿길 <劉荃之路三十里>
이 길은 우리의 도시조께서 어린날 망산삼리에서 걸어서 하양(河陽)을 다니시던 옛길이다.현재의 낙양시 길리구(吉利區) 즉 하양 이곳은 면적이 79.9평방킬로라고 해도 시내의 폭은 10킬로미터쯤되며 이 도시조의 고향가는 길은 오직 위의 지도에서 보는 석장향(石莊鄕)을 지나가는 오직 외길이다.
이 길은 옛길이다.마치 옛날 우리가 시골 어린날 아버지 손을 잡고 장에 따라 다니던 바로 그 길이다.다른 길은 없다.지금은 이 길리구의 양편에 윗 지도에서 보면 고속도로가 양옆에 잘 달리고 있다.그러나 도시조의 고향가는 길은 그냥 옛날 선비들이 짚신 신고 다녔던 그길이 지금은 시골길로 포장되어 외길이지만 차가 다닌다.나는 이길을 2019.11.15.일 처음 걸었다.도시조께서 어린날 청운의 꿈을 품고 다녔던 그길 1200여년 지난 오늘 그 후손이 이 길을 걸어 그 고향을 찾아 갔던 것이다.
영원히 남을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없다.그래서 그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시골길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이 석장향을 통과하는 이 길 우리의 후손들이 고향처럼 걷는 30리 순례길이 되기를 바란다.유전고향 삼십릿길이 고즈녁하기만 하다.우리 후손들이 모두 걸어 보길 기대한다.
2019.11.8일 석장향(石莊鄕)의 두 노인
14.끝 맺음
글을 끝 맺으려고 한다.사실 필자는 이러한 고증문을 이미 세 건이나 작성해서 대종회에 제출도 했지만 많이 난해해 하는 것으로 보이며,현대 사회의 바쁜 일상속에서 무슨 관심이 이 방면에 많을 것인가.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꼭 해 놓아야 할 필연적 당위라 하지 않을 수있겠는가.후손은 이 땅에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를 교육하지 않는 이 땅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러한 고증작업을 할 수있을까.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우리들 유씨 후손들을 위한 창고에 많은 자료들을 챙겨 놓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고귀하지 않은가.마치 어느 선사가 읊은 글을 백범 김구 선생이 좋아 했던 글이라고 해서 유명하듯이 그 답설가<踏雪歌> 같다고나 할까.
2019년 11월 23일
三十三世孫 유 경 상
강릉유씨 대종회
유문역사연구회 연구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