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玉溪

강릉과 우계 옥계 옥천

송화강 2019. 6. 17. 16:12

강릉과 우계 옥계 옥천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48240449&qb=6rCV66aJ7Jyg7JSoIOyhseuztCDqs6Dspp0=&enc=utf8§ion=kin&rank=4&search_sort=0&spq=0

 

강릉유씨의 본향(本鄕)인 강릉에 대하여 고증(考證)해보면 강릉의 고호(古號)가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고도 하였고 신라 때에는 명주(溟洲) 또는 소경(小京)이라고 하다가 신라 19대 태종 무열왕(武烈王) 때에는 주(州)로 승격하였고 고려 태조(太祖) 때 동경(東京)이라고 하다가 또 명주(溟洲)로 개칭하였고 고려 6대 성종(成宗) 때에 하서(河西)로 고쳤다가 다시 명주(溟洲)주라 하였으며 24대 원종(元宗) 때는 경흥(慶興)으로 불렀다가 25대 충렬왕(忠烈王) 때 와서 다시 강릉(江陵)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구려 때 강릉의 속현(屬縣)이 셋이 있으니

 지산(支山), 양곡(陽谷), 우곡(羽谷) 또는 옥당(玉堂)이었다.

 

지산(支山)은 동토지산(東土支山)이라 했는데 고려 때는 연곡(連谷)이라 했다.

동토지산(東土支山)은 신라 때 동제(棟堤)라 했고 우곡(羽谷)은 신라 때 우계(羽溪)라고 하였으며 고려 때도 같이 불러오다가 고려 현종(顯宗) 때 명주(溟洲)에 속하게 하였다.

어떻든 모두 강릉을 칭한 것으로서 우곡(羽谷)은 일명 옥당(玉堂)이라고 하다가 옥성(玉城)으로도 불렀으나 뒤에는 옥천(玉川)으로 개칭하였으며

 

우계(羽溪)가 강릉부(江陵府)로 편입 되면서 강릉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