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유씨 족보와 죽간일집에 나오는 수송대(愁送臺)는
영천시 창구동의 조양각(朝陽閣)이 아니다.
또한 거창 위천면에 있는 수승대(搜勝臺)를 이 수송대(愁送臺)와 혼돈하는 이가 있다.수송대(愁送臺)는 서기 805년 3월에 현재의 영천 녹전동
지금 현재의 구인재(求仁齋 )터에 유전 선조 직접 지은 망루 건물이었다.
1. 수송대(愁送臺)와 조양각(朝陽閣)
강릉유씨 족보와 문집에 나타나는 수송대(愁送臺)는 영천시 창구동 소재 조양각(朝陽閣)이 아니다.
강릉유씨 족보와 강릉유씨 도시조 유전(劉荃)의 문집 죽간일집에 등장하는 수송대(愁送臺)에 관해 상술키로 한다.
수송대(愁送臺)는 서기 805년 3월에 경북 영천시 상대전동(上大田洞:현 지명 영천시 녹전동)에 강릉유씨 도시조 유전(劉荃)이 세운 것이며,경북 영천시 창구동 금호강변에 위치한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 서기 1368년에 세워진 누각이다.수송대와 조양각은 그 세운 연대가 수송대는 서기 805년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6년이며, 다른 하나 즉 영천 금호강변에 위치한 조양각(朝陽閣)의 건조 년대는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17년이다.
어떻게 비교를 할 수있을까. 다시 말하면 지금 영천시 녹전동(綠田洞)에 서기 805년 3월에 그곳 옛 관활구역 지명 上大田里에 수송대(愁送臺)를 세우고 시문을 읊던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의 생몰년대는 서기 751년-822년간 임으로 이분이 서기 822년 세상을 떠난지 무려 546년 이후인 서기 1368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건조물 이름 |
건조 년대 | 건조물 위치 | 건조물 세운 사람 |
수송대(愁送臺) |
서기 805년 3월(신라 애장왕때) | 현 영천시 녹전동 932번지 |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 |
조양각(朝陽閣) |
서기 1368년( 고려 공민왕17년) | 경북 영천시 창구동 1-1 | 당시 부사 이용 건립 |
2.우선 수송대(愁送臺)부터 알아 보자.
수송대(愁送臺)는 강릉유씨 족보와 강릉유씨 문집 죽간일집 시문에 나오고 있으며,수송대는 근심을 날려 보내는 망대가 될 것이다.
수송대(愁送臺)에서 이 "臺"란 어떠한 건물,사물일까를 알아보기 위한 그림을 위에 올려 보았다.
"臺"란 개방성 건축물이다.일종의 노천적 망대일 수도 있다.적진을 살피는 노천 망대(敵臺)일 수도 있다.
동해안 영덕군 영해면 바닷가에 있는에 관어대(觀魚臺)사진을 보자.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사진 출처:https://leeza.tistory.com/2847
◈이 "臺"와 비교될 영천시 창구동에 위치한 금호강변의 조양각(朝陽閣) 사진을 아래에 올려 본다.
경북 영천시 창구동 소재 조양각 모습
◈대(臺)와 각(閣)의 다른 점
이 "臺"와 각(閣)의 차이는 그 규모가 "閣"이 "臺"보다는 규모가 더 크고 그 조형(造型)이 풍부하다.
3.수송대(愁送臺)가 언급된 출전(出典)들을 살펴 보자
◈출전 1
수송대가 언급된 곳은 첫째 강릉유씨 문중의 문집인 죽간일집 판각본의 강릉유씨 도시조이신 유전(劉荃)의 인적사항 기록중 유전(劉荃)은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 온후 현재 구룡포 지역인 초해창주(楚海蒼州)라는곳의 팔학산 아래 기계주(杞溪州)에서 구룡포에서 잠시 살다가 경주 궁궐로 팔학사 공히 들어가며,38대 원성왕이 사망한후,즉 18년이 지나 경신(庚辰)년 10월에 즉 서기 800년 10월에 지금의 영천 동거군 상대전리로 이사와서 살면서 을유(乙酉)년 즉 서기 805년 3월에 수송대(愁送臺)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천시내에 있는 공민왕때 지은 조양각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잠시 이곳에 나오는 강릉유씨 도시조(都始祖) 유전(劉荃)에 과하여 기술해 보기로 한다.
유전(劉荃)이라는 분은 중국 당(唐)나라 제 9 대 황제(780∼805)인 덕종(德宗)의 연호 건중(建中) 2년인 서기 782년도에 당나라 조정에서 병부상서의 직위에 있다가 동료 7학사와 함께 한반도 당시 신라땅에 오셔서 2년후에는 이미 팔학사 전원 당시 신라 宣德王 5년(서기 784 甲子年) 신라 궁궐에서 관리로 근무하며,당나라 덕종이 파견했던 당나라 궁중의 고급관료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을 만난다.이 기록은 강릉유씨 죽간일집 목판본(안동국학진흥원 장판각 소장 및 중앙국립도서관 그 영인본 관리중)에 나와 있으며,또한 중국 역사서 구당서(舊唐書) 785년( 唐德宗 역사기록편)에 나오고 있으며,우리나라 신라김씨이천년사 (新羅金氏二千年史 1979년 寶蓮閣발행 제 213 쪽에 기록 宣德王 6年 正月)기록이 나옴.
지금 경주 궁궐에서 37대 선덕왕 ,38대 원성왕 궁중에서 18년을 사시다가 원성왕 사망후 서기 800년 10월에 영천 도시조 묘소가 있는 지금의 경북 영천으로 오셔서 그곳 영천 상대전리(上大田里:현재 경북 영천시 녹전동 932번지)의 현재 강릉유씨 구인재(求仁齋)가 있는 곳 이 땅에 오셔서 22년을 사시다가 서기 822년(통일신라 헌덕왕 14년)에 사망한 강릉유씨 시조(始祖)이며,그곳에 서기 800년도에 현재 지명 포항 구룡포로부터 이곳 영천으로 이사와셔서 5년이 지난후 서기 805년 3월에 이곳에 수송대(愁送臺)를 짓고 그곳에 올라 죽간일집이란는 詩文集을 남기며,136수의 시문중 제목이 題愁送臺<수송대라 제하고 시를 짓다>라는 한 首의 시문도 씁니다.그 시문을 이곳에 올려 봅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서기 800년에 구룡포에서 에서 영천으로 이사왔다는 그 연대는 아래의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께서 남기신 그 목판본의 기록에 나오는 기록에 의하 것이며 현재 서울 서초동 소재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수개 소의 전국 도서관에 귀중한 문서로 보존되고 있다.
◈목판본에 기록된 유전(劉荃) 강릉유씨 도시조의 기록
1902년도 영천의 도시조 유전(劉荃)의 묘소에서 출토된 당나라 덕종조 연호 건중(建中) 병자(丙子) 삼월십오일 子 견규
(堅規) 生 이라는 묘지석에 의하여 현행 족보는 300년 정확히 착오 발생이 증명되어,그리고 함께 구룡포에 상륙한 평택
임씨 도시조 임팔급(林八及)의 동도년도도 서기 782년 유전 도시조의 동도년도와 동일함이 밝혀져서 아래의 유전공의
행적을 기록한 목판본의 글자중에서 황송정헌대부(皇宋 正憲大夫)는 300년 소급한 연대로 즉 황당덕종 정헌대부로 수정,
그리고 인종(仁宗)시 여타 팔학사와 고려에 오다라는 기록은 당나라 덕종시 신라로 오다로 300년 수정된 연표를 적용합
니다.비석의 위조와 그리고 그 고무찬양 일색의 위조비석의 비문을 이용한 족보의 편찬으로 오늘날 아래사진의 기록과
같은 혼란상이 대두되어 있음을 알야야 할 것입니다.
강릉유씨 족보 연대 고증문 보기
https://blog.daum.net/rosy900/category/%E7%AC%AC%E4%B8%80%E6%AC%A1%E8%80%83%E8%AF%81%E6%96%87
위의 사진은 서기 1911년 (辛亥年) 음력11월 4일(양력 1911년 12월 23일) 동짓날에 판각이 완성되어경북 영덕군 소재 재오정(霽梧亭)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2016년 5월 20일 경북 안동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옮겨 수장되며,한편 이 죽간일집 목판본은 활판인쇄술이 보편화되면서 평양의 일신(一信) 활판인쇄소에서 1924년도에 인쇄본으로 출간되며,2년후 1926에는 다시 충남 문화당(文化堂)에서도 출간된다.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한국 국학진흥원,성균관대 존경각,경기대 수원캠퍼스,과천 국사편찬위원회등에서 보관되고 있으며,귀중한 자료로 관리되고 있다.
한편 이 목판본은 1939년도에는 경북 영주 이산면 어우실 인맥이 새로운 판각을 제작해서 그곳에 소재한 칠자정(七自淨亭)에 보관해 오다가 영덕 제오정 보관 목판본보다 더 일찍 2005년도에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옮겨 전문 목판 보전처인 장판각(藏板閣)에서 잘 수장(收藏) 관리되고 있다.죽간일집 목판본은 1911년 제작 영덕 제오정 보관본과 영주 칠자정 보관 목판본 공히 두 목판본의 죽간일집 판각들이 경북 안동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잘 수장 보존 관리되고 있다.
◈출전 2강릉유씨 문중에서 1994년도에 발간한 강릉유씨대동보 수권(首券) 제 210페이지와 211페이지에는 각각여대실기(麗代實記) 한자 원문글과 한글 해석문이 실려있다.우선 보기 쉬운 한글 해석 부분을 보자.....그중에 위토전(位土田)이 五百斗落(十萬坪) 율목(栗木)이 三百株.대추나무 二百株가 들어있고,개펄밭이 左右로 둘러있다.재실(齋室) 이름은 수송대(愁送臺)니 정침(正寢)이 五間이요 동행랑과 서행랑이 각각 三間이며................라고 적혀 있다.
◈수송대(愁送臺)는 바로 지금 영천시 녹전동에 위치한 강릉유씨 재각 구인제라는 사실이 나오는 곳은 그 출전이2개소로 집약된다.즉 강릉유씨 문집인 죽간일집 판각본의 유전(劉荃) 도시조 인적사항 설명 부분에 나와 있고 강릉유씨 문중 1994년 발행한 강릉유씨대동보 수권(首卷)의 여대실기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위에서 연대를 표기하는 중에 보면 중국 당(唐)나라 제 9 대 황제(780∼805)도 나오고 유전 도시조가 구룡포에서 경북 영천으로 이사 온 연도가 서기 800년 10월 이라고도 나온다.그럼 현행 강릉유씨 족보에서 말하는
유전((劉荃)이라는 분의 기록은 고려 문종 36년 (서기 1082년도)에 중국에서 팔학사 일원으로 한반도에 왔노라고 지금까지기술되어 있는데 이거 전혀 일치하지 않는 사항아닌가 하는 분이 있을 수있다.그래서 아래에 본인의 지금까지 300년 5개 갑자(甲子) 착오를 일으켜서 당초 족보가 잘못 설정된 연유임을 밝힌 고증문
주소를 이곳에 함께 올리니 일단 접속하여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300년 착오 고증문 글주소
http://blog.daum.net/rosy900/5666614
3.영천 조양각을 강릉유씨 문중에서 나오는 수송대(愁送臺) 잘못 알아온 모든 기록을 추적해 보자.
◈죽간일집의 시문 제수송대(題愁送臺:수송대란 시문을 짓다)라는 시문과 그 시문을 오역한 기록을 보자.
1994년 발간 강릉유씨대동보 수권(首卷) 제 174페이지 올려 있는 시문을 보자
題愁送臺 愁送臺에서 씀
襟氣多秋色 쓸쓸한 가을날 수송대에 올라서
登臺送遠愁 내시름 멀리 고국(故國)으로 보내네
無人知此意 남들은 이 내마음 몰라주니
何處是中州 어느 곳이 이 중국땅이냐
◈위의 이 시문은 이제 2013년도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천년의 향기"라는 제목으로 이 죽간일집 시문이 다시 해석되어 발간되는데 제 58페이지에 올려 있는 시문 해석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題愁送臺 愁送臺에 제(題)하다
襟氣多秋色 옷깃에 드는 기운 가을빛 짙은데
登臺送遠愁 누대 올라 멀리로 시름 보내노라.
無人知此意 이 뜻을 아는이가 없나니
何處是中州 어느 곳이 중원(中原) 땅일까?
아래 해설 부분에서 역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아 놓게 된다.
◈愁送臺(수송대):오늘날 영천시 창구동에 있었던 누대로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새로 지어져 명원루(明遠樓)로 불렸으며 그 명원루가 변하여 조양각(朝陽閣)이 되었다고 한다.조양각은 정몽주(鄭夢周)를 기념하는 정자로 영남 7루 가운데 하나이다.조양각의 현재 건물은 인조 16년(1638년)에 중건한 것이다.
◈천년의 향기에서 역자는 죽간일집의 시문중 본 해당 제수송대(題愁送臺) 시문을 해석하면서 왜 이곳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조양각을 수송대라고 해석해 놓은 것일까.
(1)이 시문을 쓴 강릉유씨 도시조 되시는 유전(劉荃) 저자는 현재 강릉유씨 족보에서의 기록에 의해도 서기 1122년(고려 예종 17년)에 사망한 분이다.이 영천의 조양루는 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보다도 무려 246년 후인 고려 공민왕 17년 서기 1368년에야 지어진 건물이다.어떻게 죽간일집 저자가 무려 246년 이나 이후에 지어질 건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가?
전혀 해당되지 않는 주석(注釋)의 글을 해당 시문의 해석 아래에 달아 놓은 것이다.따라서 강릉유씨 문집에 또는 강릉유씨 족보 기록에 등장하는 愁送臺(수송대)는 영천 금호강변에 서 있는 조양각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현행강릉유씨 족보기록인 유전(劉荃) 작자의 사망년도 1122년만 해도 이러한데 실제로 본인의 고증문에 의하면 300년 소급되어져서 실제로 유전(劉荃) 작자의 사망년도는 신라 애장왕때인 서기 822년도 인것이다.무려 그 분의 사망이후 546후에 고려 공민왕때 지어진 건물인 조양각을 연관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역이다.따라서 수송대와 조양각은 하등의 관련이 없다.
◈또 이 주석(注釋)은 이어진다.
수송대에 올라 지은 이 시는 죽간선생의 고국인 송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고려로 온 후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을 터이지만 그리움은 다함이 없어"이 뜻을 아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문제점>
1.수송대에 올라 지은 이 시는 죽간선생이 고국인 송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럼 이 말이 맞는지를 검토해 본다.분명히 역자는 죽간선생이 고국이 "송나라"라고 하고 있다.그러면
같은 책 "천년의 향기" 즉 동일한 책의 108페이지,184페이지,198페이지에는 각기 퇴조(退朝)를 관련한 제목의 시문이 등장하는데 이 시문들은 무엇인가.고려 때 수도(首都)가 경주가 아니고 개성(開城)이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당시 강릉유씨 시조되시는 죽간일집 저자 유전(劉荃) 작자께서는 지금의 포항지역인 구룡포와 그후 경북 영천에 이주하여 사셨다.이 불일치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양각에 올라 서기 822년에 사망한 분이 그곳에서 시를 지었다는 말인가.송나라때는 한반도에는 고려가 있던 시대이다.
천년의 향기 (竹諫逸集)
제 108페이지 죽간일집 시문
제목:退朝歸路與諸公口號
제 184페이지 죽간일집 시문
제목:和金翰林退朝詩
제 198페이지 죽간일집 시문
제목:退朝後獨賦
위와 같이 세 수의 퇴조관련 시문이 동일한 책에 등장한다.
題 愁送臺(수송대로 제하고 시를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