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刘/资料

유가협 명칭 유래(劉家峽名稱由來)/강릉유씨 문중의 관심

송화강 2017. 7. 30. 17:42

 

유가협의 명칭 유래

"劉家峽"名稱 由來





우리 문중의 강릉유씨(江陵劉氏) 종친 한분이 이번 2017년 8월 1일 중국여행길에 오르면서 8월 6일날은 유가협(劉家峽)을 가게 되는데 그 이름이 유가협(劉家峽)이라서 우리 유씨와의 연관성에 관하여 궁금하다고 해서 그 유래를 옮겨 본다.


황하강 대교와 유가협 대교


 

"유가협"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여보니 요즘은 개인 블로그와 카페를 통하여 그 여행기록을 너무도 상세히 잘 기록되어 있다.그래도 그 명칭이 왜 유(劉)씨 관련의 유가협(劉家峽/유씨네 골짜기)일까.


유가협(劉家峽)은 중국의 감숙성(甘肃省) 영정현(永靖县)에 위치하고 있으며,중국 감숙성 성도(中国甘肃省省都)란주 (兰州) 상류인 황하강 80Km 지점에 위치한다.지금은 이곳에 땜과 100만 Kw의 설비용량 수력발전소가 세워져 있는데 이 땜은 당초 1958년

9월에 러시아 기술진이 들어와서 건설케 되는데 1961년에는 역사문제가 발생하며 러시아 기술진은 퇴각하면서 설계도면도 함께 갖고 가는 바람에 공사는 중지된다.

 

1964년에는 모택동 지시로 다시 자체 설계도면을 작성하고 재 시공을 시작하여 1974년도에 완공케 된다.이곳의 관광은 결국 이곳을 통과하는 황하강(黄河江)강변의 유가협 풍경과 이곳 암벽에 세워진 역사 깊은 유적지 병령사(炳靈寺)를 보는 두가지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명칭이 유가협(劉家峽)이 된 연유는 아래와 같다.

 

황하강을 구비구비 흐르면서 큰산을 지나고 감숙성 중부에 다달아 영정현 부근에 이르면 20여 Km 길이의 대협곡으로 접어든다.협곡 양안의 산봉우리들은 서로 다투듯 솟아있는데,보면 곧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황하수는 고삐풀린 말처럼 협곡을 소리치며 내달린다.


협곡에서 멀지않은 두메산골에 작은 산장이 있었는데,이곳에 유(劉)라는 노인이 처와 두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네 식구는 몇 그루의 호도나무,대추나무,배나무등에 기대어 살면서 보물처럼 여겼다.수확한 과일은 황하강을 건너서 성내에 가서 팔았다.


비록 살기가 부유치는 못해도 먹고 살기는 그런대로 괺찮았다.유노인은 한푼도 헛되이 씀씀이가 없었다.기름이나 소금을 살 때에도 이리저리 재고는 했다.가난한 집이 성내로 진출은 할 수없고,만일 돈을 못 번다면,이때에 일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어쩐다지?


그해 가을 유노인은 가득찬 호도 광주리를 메고,일찍 일어나서 팔러 나섰다.그는 마치 양창자처럼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한 발짝씩 내 딛으면서,산꼭대기를 내려와서 대낮이 되서야,황하강나루에 닿았다.양피(羊皮)로 만든 나룻배가 강 건너편에 있어서.유노인은 하나의 돌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 양피 나룻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황하강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이 물결이 강변산의 돌위에 꽃히며 물기둥이 몇길이나 일고,보니까 무서웠다.그 양피나룻배는  사람이 가득 타고 있었는데,이제 막 건너편에서 출발했고,물결은 더욱 크게 일었다.


유노인은 몸을 일으켜서,마음을 졸이며 눈을 부릅뜨고,강물위의 양피 나룻배를 보는데,나룻배는 오르내리면서 물속에 보일락 말락 한다.유노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무릅꿇고 땅에 머리가 닿게 절을 올린다.하늘이시여,하늘이시여,도와 주소서.이때 양피나룻배가 강 중심쯤 닿자,돌연 한 물결이 덮치자.배는 안 보이게 됐는데 나룻배 사람들은 바짝 서로 붙어,어떤이는 눈을 감고,어떤이는 소리를 외쳐대고,어떤 이는 운다.,이때 양피나룻배가 수중에서 다시 솟아 올랐다.결국 강가에 접안됐다.유노인이 머리를 들었을때 사람들은 그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오히려 유노인은 놀랐고,사실은 공교롭게도 물결의 방향이 나룻배를 가라안지않게 할 때도 있었던 것이었는데...유노인은 외려 생각하기를 자기가 신령님께 빌은 효과라고 생각했다.

밤에 유노인은 집에 도착했고,저녁밥을 먹을 때는 사발을 손에 들고 먹지 않았고,잠잘 때에도 몸을 뒤척이며,잠을 잘 수없었다.밤중에 부인을 깨워서 낮동안 황하강변의 일을 보는 듯이 이야기를 했으며,그는 사당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사람들이 황하강을 무사히 건너게 할려는데 부인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말하는대로 부인은 잘 따라 주었고,이어서 두 아들들도 설득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금한 돈을 모두 내어서 벽돌,목재,모두 사고 장인들을 구해서 일을 했으나 아직도 들어갈 돈이 반은 남아 있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몇그루의 과일 나무를 팔았다.

온 가족이 죽을 힘을 다한 결과 겨우 재료를 준비하여,그 협곡에 사당이 서게 됐다.


이때부터 배를 건너는 사람들은이 사당에 들려 우선 신령께 기도하고,평안을 빌었다.부처님 도움으로 흉악한 일도 모두 길하게 되고 광풍과 거센 풍랑을 만나도 나룻배는 위험을 피할 수있어서 능히 강 저쪽에 닿을 수있다고 믿게 되었다.


많은 햇수가 지나자,사람들은 이 마음씨 고운 유노인을 떠 올리며,이 계곡을 유가협(劉家峽)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