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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ongyong

송화강 2014. 4. 4. 19:20

나는 바보인가?

 

이글은 사실 내 자신이 지금까지 그 답을 알고 싶은 미제의 사항인데

제목을 붙인다면 나는 바보인가 뭐 이런 종류의 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도은님께서 쓰신 나의 무료한 삶이라는 글과  한국 학부모님들의

선생님께 대하는 문제에 관하여 올린 댓글들을 보면서...

 

애들이 한창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날 두째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선생님이 부모님이 한번도 안 오시니 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어린 것은 아직 선생님의 뜻을 알리는 없고

지금은 학교 선생님 풍토가 어떻게 변해 있는지는 더욱 모르는 사항이지만

 

그때에 나는 학교에 가지않았다.

슬펐다.

 

나는 항상 주변의 어려운 학부모님들 아니 주변의 많은 이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에 나의 형편이 좀 좋다고 해서 선생님을 찾아가 촌지로

내 아이의 보살핌을 부탁했다고 하자 ,

 

그럼 어렵게 사는 어린 친구들께 죄를 짓는 매우 비열한 행위이다 라고

또 아울러 어린 아니 젊은 선생님들의 양심에 화살을 쏫는 비이성적인 행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빈손으로 찾아 볼 수도 있지않았냐고 한다면 그게 공자나 맹자 반열에

오르지 못한 평민으로써 당시 통용되기나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살았고 우리 아이들 셋은 모두 학교를 졸업했고 다 지금은 잘 살고있지만

나의 이러한 방식의 삶을 융통성없는 행위다,아니다 안중근 의사같은 지사쯤 된다.라고

 

나는 아직도 답을 모른다.

오늘 위에 언급한 글을 읽다가 댓글도 읽어 보면서 갑자기 애들 어릴때 생각이 나서

적어본다.

 

 

 

 

中庸중용 [中庸]유교 | 브리태니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하는 유교의 개념.

중용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우선 〈서경 書經〉에는 "진실로 그 '중용'을 잡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서경〉에서의 중용은 요·순·우·탕으로 이어진 중국 고대 제왕의 정치의 기본 원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논어〉·〈맹자〉에서도 〈서경〉과 동일한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중용의 개념을 명백히 인간의 윤리와 결합한 사상을 전개한 것이 〈중용 中庸〉이다. 〈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의 미발(未發)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중절(中節)된 것을 화(和)라고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중이란 희로애락 등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는 상태의 내면적 마음을 의미하며, 화는 이미 촉발된 정(情)이 중에 의해 조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화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수양의 방법으로 신독(愼獨)을 제시했다. 한편 〈주역 周易〉에서는 하나의 괘(卦)가 상(上) 삼효(三爻)와 하(下) 삼효로 구성되는데, 64괘 384효는 끊임없는 사물의 변화를 상징하며, 각 효는 그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가장 적절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2효와 5효를 중이라 하고, 초효 및 3·4·6효는 불중(不中)이라 하며, 2·5효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적의(適宜)한 자리로 길(吉)하다고 했다. 〈주역〉의 이러한 사상은 시중설(時中說)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시중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그에 대한 처신이 부합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중설은 본래적인 모습을 지키면서도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대처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후 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성립하면서 특히 〈중용〉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중화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 정이(程頤)는 중을 적연부동(寂然不動)으로, 화를 감이수통(感而遂通)으로 해석했다. 이를 계승한 주희는 사려(思慮)가 싹트지 않고 사물이 이르지 않은 때를 미발이라 하고, 이때의 심은 적연부동한 본체가 되며 천명지성(天命之性)이 온전히 갖추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는 과불급이나 치우침이 없기 때문에 중이라 했다. 또 천하의 일에 감이수통하게 되면 희로애락의 정이 촉발되어 심의 작용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 중절되는 상태를 가리켜 화라고 했다.

 

 

 

중용(中庸)이란 무엇인가.-오쇼라즈니쉬-

중용이란 행복과 슬픔,슬픔과 기쁨의 정중앙에 멈추어선다는 뜻이다

이렇게 정중앙에 멈추면 슬픔도 없고 기쁨도 없다.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으며,고통도 없고 쾌락도 없다.

이 정중앙에서 초월이 일어난다.

이때 그대는 다만 지켜보는자 주시자(注視者)이다.

이 주시가 우리들의 목표이다.

나는 나의 산야신(山野神)들 모두가 주시자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것을 주시하라.

아무것에도 동일시되지 말라.

아름답고 즐거운 것에도 동일시 되지 말라.

멀리 떨어져 거리를 유지하라.

거기에 휘말려 들지 말라.

모든것이 오고 가게 놔두라.

한번 온것은 가기 마련이며,태어난 모든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대는 항시 주시자로 남는다.

이 영원한 주시자를 발견하면 그대는 신을 발견한 것이다.

신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다.

그대의 주체성 자체가 신이다.

 

중용이란:

http://blog.daum.net/rosy900/5664044

 

 

 

 

오쇼 라즈니쉬 (Rajneesh Chandra Mohan Jain) (전직) 작가 , (전직) 대학 교수
생몰1931년 12월 11일 ~ 1990년 1월 19일
출생지인도
경력자발푸르대학교 교수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 자인(힌디어: रजनीश चन्द्र मोहन जैन, 1931년 12월 11일 ~ 1990년 1월 19일)은 인도신비가, 구루철학자이다. 1960년대 이후로 아차리아 라즈니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1970년대1980년대에는 자신을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라 불렀고, 1989년에 '오쇼'라는 이름을 새로 택하여 그 뒤로는 주로 오쇼 라즈니쉬로 불린다.

오쇼는 1960년대에 철학 교수로서 인도를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그는 사회주의마하트마 간디 및 기성 종교에 반대하고 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970년 오쇼는 제자를 받으며 정신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세계의 종교적 경전이나 신비가 및 철학자들의 글을 재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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