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식인풍습의 절정은 당나라 시기로, 당시 세계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당나라는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으며 끊임없는 귀족들의 특미(特味)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인육을 요리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는데, ‘철경록(輟耕錄)’에는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조야첨재’ 에도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이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당나라 시기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몰래 유통되다가 이때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 공개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상설 인육시장이 있던 곳이다)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으며 또 중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곤 했는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방 등으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곤 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보통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값을 폭락시킬 정도였다.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한다)
상설 인육시장은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 송나라 때의 항주(杭州)와 변경(?京), 명나라 때의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의 안경(安京) 등에 개설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이러한 인육시장에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육판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송나라때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인육이 판매되곤 했는데 1919년에는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중국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육은 어느 시대에나 싼 고기로 취급되었는데, 명나라 때 사천(四川)지방에서는 인육이 남자일 경우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는 것이었다. 1백여 년 전 청나라 때의 정치가 증국번의 일기에는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으며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중국의 식인풍습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곤 했는데 중국문명의 찬미자로 불리는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의 견문록에도 이러한 식인풍습에 대한 목격담이 나타나 있다.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 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