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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下着(妈妈照片)

송화강 2013. 12. 19. 23:51

 

 

 

 

  放下着

 

 대롱대롱 매어달린 봉사스님은 사람살려 외쳤다.

가만히 보니 1cm 아래가 바로 땅인데 이 봉사스님 ,

]

손을 놓으시오.

결국 말 안듯던 스님 힘빠져서 떨어 졌을때는 가벼운 엉덩방아 였다.

어처구니없는 이 광경을 떠올리면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일 터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는 일일 터입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아! 괴로움!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입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습니다.
''나'' ''내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놓음...
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방하착(放下着)!!
그 속에 불교 수행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방하착...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걸림''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의 자리에
몰록 놓으라는 것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
연기(緣起)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의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중도(中道)의 진리...
공(空)의 진리...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에 대한 충실한 실천수행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잠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 인연들이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연기법]

인연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는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상]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제법무아]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마음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데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인상]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중생상, 수자상]

그런 수많은 분별심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이라는 수많은 극단의 분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본래로 인연따라 길고 짧음이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는 것이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따라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우리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따라 장단, 귀추, 생사, 거래, 시종, 고저, 대소 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극단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이와 같이 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
인연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이렇듯 모든 불교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한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두가 집착(執着)에서 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 소멸이란 지혜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의 해답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올바른 괴로움 소멸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를
여덟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성제를 가장 쉽게 풀어 이야기 한다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이 바로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하착인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 이야기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놈입니다.
그것을 놓고 가는 길이
참 수행자의 밝은 정도인 것입니다.
방하착인 것입니다.

 

 


다시 보는 ...  방하착 !!!

그러면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방하착(着)이란
착심(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마땅히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일입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입니다.
다만 마음을 한 쪽으로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됩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일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벌되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그 자체에 마음이 머물면
많이 벌게 될 때 즐거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돈에대한 집착을 놓으면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았기에 적게 벌어도 여여하며,
많은 돈을 벌었어도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돈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지 '집착'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
그 지고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녹이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이렇듯
내 안에 밝은 자리에 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방하착..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합니다.

함이 없이 늘 묵묵히 일을 해 나갑니다.
이렇듯 함이 없이 해야합니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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