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외국 유학생을 받은 이후, 현재까지 최고령 유학생인 85세의 한국인 유이균 옹. 증손자를 볼 고령의 나이인 여든이 다 되어 홀홀단신 중국에 와서 6년 동안 중국어 공부로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는 그를 우다오커우(五道口)에 있는 그의 공부방이자, 숙소에서 만났다. 20평방미터 남짓한 작은 방 안에는 침대 하나와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배치하고 벽에는 힘이 넘치는 붓글씨체의 한자를 사방으로 빼곡이 붙여놓았다.
그는 이미 기존 중국어 평가시험인 (구)HSK 6급을 받았으며 현지 중국인과도 막힘이 없이 대화할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갖췄다. 이 정도의 실력만으로도 칭화대학 교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워 한다. 하지만 그는 고급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중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비좁은 그의 숙소에서 대면한 유이균 옹. 존경스럽기보다는 마음이 '짠'하다 못해 답답했다. "왜?" 황혼의 연세에 왜, 무엇에 써 먹으려 중국어 공부하는지 궁금했다. 젊은 대학생들도 어려워하는 중국어, 성조 발음이 어려워 나이가 들수록 높은 벽으로 느껴지는 중국어를 85세의 고령에 왜 공부하고 있는걸까? "모기에게 물어봐" 동문서답과 같은 그의 대답이다. 그의 '미련'한 도전을 모기에게 물어보란다. 모기는 겨우 석달을 살지만 분주하게 사는 모기의 생이야말로 당신의 생을 대변한다고 설명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5년, 79세의 나이에 중국 땅을 밟은 유이균 옹의 중국생활을 축약하면 ‘미련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없는 길을 피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길을 만들며 중국어를 공부했다. 산둥(山东)성 웨이하이(威海)에 도착해 유학생활의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산둥대학 입학과정에서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학교 규정의 연령제한 60세보다 무려 19세나 많았기 때문에 규정대로라면 정상적으로 입학해서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그였지만 유학생 담당자 앞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나이가 많은 것이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되느냐?"고 고집을 부리며 무턱대고 강의실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고 고급반 수업에 하루도 안 빠지고 출석을 하니 교수도, 학교도 그의 노력에 감동해 학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어 한 마디 못알아듣는 그는 한학기 내내 하루도 빠지 않고 강의실 맨 앞자리를 지켰다. 그는 석달 내내 수업시간에 "물러서지 않는다"를 매 시간마다 백번씩 속으로 반복했다고 한다. 노년인 그의 향학열에 그를 가르치는 교수뿐 아니라 대학 총장까지 감동할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웨이하이 지역 방송국에서는 학교로 찾아와 그를 인터뷰해 공중파에 싣자, 그는 산둥대학의 노(老)학생 스타가 되어 젊은 대학생들에게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유이균 옹은 HSK 시험에 수차례 도전해 지난 2005년 12월 11일 듣기 41점, 문법 66점, 독해 78점, 종합 64점 등 총점 247점을 받아 HSK 6급을 당당히 획득했다.
1926년 12월 17일 함경남도에서 출생한 유이균 옹은 6.25 전쟁 때,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포항까지 내려간 그는 21살 때부터 구두수선을 시작으로 목재상, 품팔이, 고등학교 교사, 만화방, 야간대학 강사, 천장사 등 10여년간 산전수전을 겪은 끝에 동대문에서 의류사업으로 성공했다. 깡통에 밥을 해먹으며 고학했던 그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신문에서 본 지역 경찰서장을 무턱대고 찾아가 학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교단에 섰으며 당시 여자들만 다니던 양재학원에서 남자 수강생으로는 혼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도 했다. 유이균 옹은 "너무 가난하고 배고파 어떻게든 성공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며 "남자로서의 체면은 생각지 않고 양재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웠으며, 명동, 신촌 등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니면 유행하는 패션을 스케치해서 디자인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반도패션(현재의 LG패션) 등 유명 섬유 수출기업에 납품을 전담하는 대규모 방직공장을 운영하며 수출 역군으로, 중소기업 사장으로 활약하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평소에 배드민턴 애호가였던 유이균 옹은 사업 성공을 기반으로 1980년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회장직을 맡으며 1988년 올림픽에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야구 신청에 맞서 당시 비인기 종목이었던 배드민턴을 시범 경기로 만들어 내기도 했다. 중소기업 사장으로는 처음 회장을 맡아 반대도 많았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2년 동안 회장을 맡았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아시아배드민턴연맹과 세계배드민턴연맹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혼자가 된 그는 미련하리 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도전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왔다. 한국전쟁, 산업화시대를 거쳐온 그는 한중우호협력의 시대에 '고급중국어'를 목표로 노년을 불사르고 있다. 지난 6년간 단 한 차례도 귀국하지 않고 베이징 대학촌 후미진 공부방에서 중국어 공부에 매진해온 유이균 옹. 그는 신HSK6급을 받아서 희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나의 삶을 통해서 가장 삶을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이 바로 이 분이시다.
나름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만
사실 이 분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올해 84세의 연세임에도 중국어를 끊임없이 공부하시고
붓글씨와 그림을 공부하셔서
세계적인 청화대학교에서 초청을 받아서 외국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하시는 한국인 유이균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재학중이시며 그 할아버지 소개로 yk 학원 섭외 했습니다. 박사과정을 목표로 열공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프로필 올리겠습니다.ㅋㅋ
일본:邱永汉&柴田どよ 韩国:유이균&변경삼 中国:周有光 美国:Moses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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