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程(1809-?)이 1844年(憲宗 10)에 冬至使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사행을 갔다가 와서 견문한 내용을 燕行錄으로‚ 2冊의 筆寫本이다. 尹程의 자는 景灝‚ 본관은 坡平으로 行心의 아들이다. 1844년의 冬至使에는 正使 李晸應‚ 副使 權大肯‚ 서장관 尹禾贊 등이 갔는데 자신은 族兄인 서장관 윤찬을 따라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서문과 10월 26일의 기록에 尹程이 사행을 떠날 때에 어머니가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여 와서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고‚ 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보니 사행시에 견문을 기록한 글이 산일되고 누락된 것이 많아 이제 남은 것을 수습하여 책을 엮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은 1845년경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록기간은 1844년 10월 26일부터 1845년 2월 12일까지이다. 일기‚ 부록의 순서로 실려 있다.1844년 10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11월 22일 압록강을 건넜다. 각 군현의 수령이 사신을 접대한 사실 및 각처의 누정 등에서 지은 한시를 수록하였다. 이어서 九連城‚ 柵門‚ 鳳凰城‚ 瀋陽‚ 山海關‚ 通州 등지를 거쳐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여정 도중에 각지의 역사‚ 인물‚ 풍속‚ 자연환경 등을 기록하였다. 압록강에서 柵門까지 100여리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며‚ 봉황성은 安市城의 유지라고 하였고‚ 심양에서는 성의 규모와 성내의 太學 등을 돌아본 소감을 썼다. 특히 寧遠 등지를 지나면서 袁崇煥‚ 祖大壽 등 明末淸初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뒤 황제가 베푼 年終宴에 참석하고 太學 및 북경 거리를 관광하였다. 1845년 정월 1일 장안문의 신년하례에 참석하였으며‚ 2월 4일 북경을 떠날 때까지 북경 시내의 여러 명소를 찾는가 하면 청의 학사·관인들과 만나 시문을 수창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2월 4일 북경을 떠나 사행길을 거슬러 2월 12일 구련성에 도착하였는데 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부록에는 황제가 頒賜한 물품을 기록한 <朝鮮賞單萬壽聖節功賞>‚ 중국 문무 관리의 관복과 봉록을 적은 <文職官階品級頂服俸祿>‚ <武職官階品級頂服俸祿>이 실려 있다. (김남기)
2016.9.24日意见
1.刘庸이라고 죽간일집에 나온 인물이 중국의 유명한 인물 刘墉의 오기라고 가정한다면 刘墉은 1719-1804년간 인물이다.
그렇다면 윗글의 서장관 尹禾贊,또한 서장관 윤찬,....이들의 1844년도 동지사 중국갔다온 상호 연대가 맞지를 않는다.
죽간일집의 윤찬은 한자로는 尹璨으로 나온다.그러나 인테넷상에서는 尹璨이라는 인물은 검색되지 않는다.
확실한것은 洪奭周의 몰년은 미상이지만 출생년도는 1774년이므로 여하간 우리가 족보에 유방의 자손이라고 기술한것은
홍석주의 출생이후인 1774년 이후가 되지만 중국의 당시 吏部尚书 刘庸의 존재가 밝혀지지않고,한국측의 동지서장관 尹瓚이라는 인물을 검 색할 수없어 완전히 미궁이다.장호원 방면의 유씨 족보에 혹시 劉在起라는 분을 찾을 수있을까?
2016.9.24日意見/확실한 것은 강릉유씨가 유방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싯점은
역사적 근거가 홍석주 출생 1774년 이후인 점뿐이다.
2.결국 1924년도에 활자로 인쇄된 죽간일집에 나오는 중국 동지사 파견시 중국에 부탁하여 얻어온 금속판에 새긴 중국상계표를 익년도
발행되는 강릉유씨 족보에 접목시켜서 우리가 유방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사실만 알 수있을뿐 자세한 연대 즉 유방자손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년대가 홍세주 출생 1791년 이후의 일이라는 것만이 확실 하다는 사실 하나 이외에는 없다.
이 서장관 윤찬 재기 할어버지.임한호 이이야기는 이미 1846년 병오보에 등장하는 그대로가 1910년대 죽간일집을 세원 할아버지가 새길때 들어간 것이다.
2015.7.29(수) 의견
위의 기사를 보면 제목에서 冬至书状官-尹瓚-西行绿 이라고 표기 한 것은 내가 그냥 써본 한자이다.
주인공 윤찬이 우리 문종의 발간 종보에는 한자로 尹璨으로 나온다.그런데
이곳에는 한글로 "윤찬"이라고 써있네 그러나 이 윤찬이 尹璨인지는 1844년 동시사 서행록을 찾아서 확인이 필요하다.
인물이 맞다고 한다면은 그 동지사가 귀국한 날자는 1845년 2월 12일 이된다.
서장관 尹禾贊 을 따라 갔다고 하니까 우리 종보에는 서장관 윤찬이라고 했으므로 위의 글쓴 사람이 글쓰다가 많은 철자의 오기를 냈을수도.
서행록이란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8287
1
홍석주 동지사
규장각에서 윤찬 동지사를 검색하다.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http://kyujanggak.snu.ac.kr/home/main.do?siteCd=KYU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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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尹程(1809-?)이 1844年(憲宗 10)에 冬至使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사행을 갔다가 와서 견문한 내용을 燕行錄으로‚ 2冊의 筆寫本이다. 尹程의 자는 景灝‚ 본관은 坡平으로 行心의 아들이다. 1844년의 冬至使에는 正使 李晸應‚ 副使 權大肯‚ 서장관 尹禾贊 등이 갔는데 자신은 族兄인 서장관 윤찬을 따라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서문과 10월 26일의 기록에 尹程이 사행을 떠날 때에 어머니가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여 와서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고‚ 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보니 사행시에 견문을 기록한 글이 산일되고 누락된 것이 많아 이제 남은 것을 수습하여 책을 엮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은 1845년경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록기간은 1844년 10월 26일부터 1845년 2월 12일까지이다. 일기‚ 부록의 순서로 실려 있다.1844년 10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11월 22일 압록강을 건넜다. 각 군현의 수령이 사신을 접대한 사실 및 각처의 누정 등에서 지은 한시를 수록하였다. 이어서 九連城‚ 柵門‚ 鳳凰城‚ 瀋陽‚ 山海關‚ 通州 등지를 거쳐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여정 도중에 각지의 역사‚ 인물‚ 풍속‚ 자연환경 등을 기록하였다. 압록강에서 柵門까지 100여리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며‚ 봉황성은 安市城의 유지라고 하였고‚ 심양에서는 성의 규모와 성내의 太學 등을 돌아본 소감을 썼다. 특히 寧遠 등지를 지나면서 袁崇煥‚ 祖大壽 등 明末淸初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뒤 황제가 베푼 年終宴에 참석하고 太學 및 북경 거리를 관광하였다. 1845년 정월 1일 장안문의 신년하례에 참석하였으며‚ 2월 4일 북경을 떠날 때까지 북경 시내의 여러 명소를 찾는가 하면 청의 학사·관인들과 만나 시문을 수창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2월 4일 북경을 떠나 사행길을 거슬러 2월 12일 구련성에 도착하였는데 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부록에는 황제가 頒賜한 물품을 기록한 <朝鮮賞單萬壽聖節功賞>‚ 중국 문무 관리의 관복과 봉록을 적은 <文職官階品級頂服俸祿>‚ <武職官階品級頂服俸祿>이 실려 있다.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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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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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헌종 10)에 冬至使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尹程井이 사행중의 견문을 기록한 책으로 저자 尹程井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저술 연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尹程井이 사행을 다녀온 것이 1844년 10월부터 1885년 2월 사이이고 저자의 서문에서 자신이 견문한 내용을 기록한 것들이 산일되어 누락된 것이 많으므로 이제 남은 것을 수습하여 책을 만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사행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다음에 책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본서의 내용을 보면 먼저 1844년에 正使 李最應‚ 副使 權大肯‚ 서장관 尹欑을 임명하여 동지사를 가게 되었는데 자신은 族兄인 尹欑을 따라 사행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떠날 때에 어머니가 견문을 상세히 기록해 와 서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다음으로 10월 26일 서울을 출발한 이후의 여정을 기록하였는데‚ 고양·개성·평산·평양·가산·용천 등을 거쳐 11월 13일에 의주에 도착하였으며 여기에서 눈으로 인해 지체하다가 11월 22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 과정중에 각 군현을 지나면서 수령들이 사신 일행을 접대한 내용‚ 평양의 練光亭·浮碧樓 및 의주의 統軍亭을 돌아 보며 지은 시와 압록강을 건널 때에 지은 시들을 기록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의 여정을 보면 11월 22일 九連城에 도착하였고 이후 柵門·鳳凰城·連山關·甛水河·迎水寺·瀋陽·中安堡·閭陽驛·大陵河·八里堡 ·山海關·深河驛·螺山·滹沱河·通州 등을 거쳐 12월 21일 北京에 도착하였다. 여정을 기록하는 가운데 각 지역간의 거리와 날씨‚ 지역의 자연환경 및 주요한 역사적 사실‚ 생활풍습 등을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柵門에 이르러서는 압록강에서 柵門까지 100리의 지 역에 사람의 거주를 금지시키고 있다는 내용을 기록하였고‚ 鳳凰山에서는 옛 성터를 돌아보면서 이것이 고구려때 안시성의 遺址라고 하였다. 또 鳳凰城에서 乾子浦에 이르기까지 太平車를 타고 간 것을 말하면서 太平車의 제도와 가격을 소개하였고‚ 瀋陽에서는 성의 규모와 심양성에 있는 太學·聖殿을 돌아본 내용을 기록하였다. 鎭建敵臺에서는 戚繼光이 전투한 故事를 기록하였고‚ 河에서는 이곳이 漢의 光武帝가 王朗과 전투한 곳임을 기록하였다. 북경에 도착해서는 朝陽門의 규모와 아름다움‚ 그리고 북경성의 규모 등을 기록하였다. 북경 도착 이후 사신 일행의 행적을 보면 12월 24일 淸皇帝가 保和殿에서 베푼 年終宴에 참여하였으며 다음날에는 太學을 돌아보았고 28일에는 북경 거리를 구경하였다. 한편 12월 26일은 저자 尹程井의 생일이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만리타향에서 생일을 맞이한 감회를 서술하였다. 1885년 1월 1일에는 사신 일행이 長安門으로 들어가 신년 하레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궁성의 모습과 규모 등을 보고 기록하였다. 이후 2월 4일 북경을 떠날때까지 사신 일행은 황제가 紫光閣에서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북경 시내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았고 한림학사를 비롯한 중국의 관리들과 교유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았는데 그 시문의 내용도 본서에 기록하였다. 이후 사신 일행은 2월 4일 북경을 출발하여 12일 九連城에 도착하였는데 본서에는 九連城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책의 끝에 청 조정에서 조선 국왕과 사신 일행에게 내린 포상과 청의 황제가 연회때마다 사신들에게 頒賜한 물품을 기록한 <朝鮮賞單萬壽聖節貢賞>과 중국 관리들의 품계별 관복의 제도와 봉록의 액수를 기록한 <文職官階品級頂服俸祿><武職官階品級頂服俸祿>이 수록되어 있다. (강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