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는 미국에서 1978년 구원을 받고 한국에 올아오게 되었습니다. 과학하는 사람이 성경을 알고 구원을 받았다 하기 때문에 자꾸
이야기를 하게 되는군요. 아마 성경을 공부하는 데는 과학 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과학 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라든지 논리성에 맞지 않으면 믿질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종교가 존재한다 하여, 까만 것을 보고 흰 것이라고 하며 믿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과학 하는 사람은 결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얘기들을 합니다.
만
일 성경이 그렇게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면, 저는 아마 성경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구원 받고 난 후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나서 성경을 더 알게 되었고 또 성경 속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과학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지구상에 인류가 태어난 것에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가령, 이 우주가 유한한거냐 혹은 무한한거냐, 또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등, 이런 많은 질문을 하게 되고 또 받게 됩니다.
성경은 무엇인가
그래서 저는 우선 성경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함께 알아봤으면 합니다. 성경은 인류의
미래사를 기록한 것인데, 이 인류의 미래사에 대해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표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모든 과거의 사건을 연대별로 기록한 것이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앞으로 올 인류의
미래사를 연대 없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얼마만큼 정확하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과거의 역사는, 이미 일어났던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이미 기록된 역사는 얼마만큼 정확한 기록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과, 성경에서
기록된 미래서가 도대체 얼마나 정확한 건지 한 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제가 신문에 스크랩을 하나 해 놓은 게 있는데 82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 보면 인간이 기록한 역사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어떤 사실을 보았을 때 그 사실을 얼마나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일까? 이에 얽힌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엘리자베스 왕조 때의 모험 항해가이며 담배의 전래자로 알려져 있는 월터 로리경은, 그 유서로
세계사를 남겨 놓았지만 제 1권 뿐, 다음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이런 말이 전한다. 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살아지기 전,
런던탑 옥중에서 제 2권을 집필하고 있던 어느날, 바로 창 밑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그 싸움 장소에 있던 몇
사람을 만나 내용을 물어보니, 모두 저마다 다르지 않은가! 그는 여기서 생각했다. 바로 자기 눈으로본 사건이 저마다 이렇게
다른데, 하물며 지나간 옛날 일들을 어떻게 알고 있다고 할 것인가. 그는 절망한 나머지, 써 놓은 모든 원고 뭉치를 불 속에
집어 넣어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
이 사람이 세계사를 두 권을 썼는데, 이 사건을 보고 1권만 남겨 놓고 2권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영국의 타임지에 한 때 논설을 썼던 월터 리프만이라는 사람이 쓴 퍼블릭 오피니언, 즉 대중의 의견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사실을 기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실험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심리학회 회장에 돌연 낯선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쫓기듯 뛰어 들어왔다. 뒤따라 또 한 명이 손에
권총을 들고 쫓아 들어와, 둘 사이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권총이 난사되고 서로 얽혀 싸워 뒹굴던 끝에 두 사나이가 회의장
밖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벌어진 시간은 불과 20초. 물론 장내는 모두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지만 실은 주최측에서 꾸민
연극이었다. 곧 회의 참석자 일동에게 사건을 본 대로 기록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대답자 40명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이 틀린
율이 엄청났다. 사실과의 차이 20퍼센트 이하가 단 한 명, 25~40퍼센트가 14명, 40~50퍼센트가 12명, 나머지
14명은 그 이상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사실과는 달리 내용을 날조한 것이 40명 중 34명이나 되었다.” |
여기는 소위 학자들이 모인 심리학회 회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극을 꾸몄습니다. 어떤 두
사람에게 격투를 시켜서 이를 목격했던 학자들에게 그 결과를 그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바로 사건 직후입니다. 그런데 40명 중에서
34명이 날조를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있다고 하는 학자들이, 바로 그 전에 쓴 사건의 85퍼센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입으로 전해지고, 또 적당히 기록된 인류의 역사란 얼마만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반
면에 이 성경은 연대 없이 기록된 인류의 미래사라고 제가 정의를 내렸습니다. 사실 2천 년, 3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는,
현대 과학만이 해답을 줄 수 있는 예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사실 그 자체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미래사라는 것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 3장 7절 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중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먼저 선지자에게 자기가 하실 일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그
사건이 일어나도록 되 있습니다. 그런데 연대를 함께 기록했으면 쉽게 이해가 될 텐데 연대 없이 기록을 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고 그 성경이 어떻게 씌어졌는가? 흔히 사람들은 성경은 결국 사람이
쓰지 않았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썼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몇 가지 찾아 보고
과학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
여기에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했고, 또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34장 16절 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
성경은 다 짝이 있고, 또 여호와의 입이 이것을 명령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을 모으셨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7장
19절에 보면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성경이 무엇이고 성경이 어떻게 씌어졌는가 하는 것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중에 해답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
하나님의 정의
그 다음으로 많이 질문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일
계시다면 하나님과 우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에 많은 질문과 회의를 갖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 13절부터 보면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사실 모세도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몰랐던가 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3:13-15) |
여기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과학적인 얘기를 함께 곁들여서 하겠는데 “스스로 있는 자니라” 는 말을, 영어로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나는 나”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는 현재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제를 모두 현재를 쓰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주란 무엇인가? 사실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주가 무엇인가 질문해도 얼른 대답을 못합니다. 요즘 과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곳'을 우주라고 정의합니다.
그
래서 한자로 ‘우(宇)'와 ‘주(宙)'는 시간과 공간이란 뜻입니다.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우주의 역사는 ‘대폭발'에서 시작하여
‘블랙홀'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곳을 우주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러면 시간이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 똑같습니다. 한 인간에게 보통 주어진 시간은, 잘 살면
70~80년, 그리고 누구에게나 24시간이란 시간이 매일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제한된 생활 속에서 남과 경쟁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인간의 삶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시간은 무엇이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가? 시간이 참 묘한 것은,
시간을 일차원으로서 하나의 선으로 그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대칭성을 가지고 있는데, 비대칭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가 절대 대칭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약점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 필름은 거꾸로 돌릴 수 있어도 우리 삶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점입니다.
성
경에서 하나님은 “I am that I am" 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의도 역시 전부 현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데, 이 현재라고 하는 시간의 개념은 정확하게 T = 0 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T = 0 란 말은 시간이
없다는 말로서 정지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모든 변화가 정지된 불변의 개념입니다. 불변이란 말은
시간이 정지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T = 0 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현재입니다.
그
것은 즉, 모든 시간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갈 수 있기 때문에 예언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 과거를 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시간을 일방통행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나쁜 죄를 지어도 과거를 잊어버리는 편리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미래도, 현재도, 과거도 전부 현재의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이어 오는 모든 역사까지 이 성경에 미리 다 기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하나님이 다른 점은, 인간은 시간의 구속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다는 점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곳을
우주라고 정의를 했었는데,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이야기한, 우주가
유한한가, 혹은 무한한가에 대한 해답이 이미 나왔습니다. |
사실 저는 구원을 받기 전가지만 해도 도대체 우주가 유한한거냐 무한한거냐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나서, 우주는 유한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 무한한 것이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유한해야 됩니다. 무한한 하나님이 계시고 무한한 우주가 존재한다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런데 뉴튼 시대까지만 해도, 우주가 무한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뉴튼만 해도 절대 시간, 공간 개념을 도입했는데 아인슈타인에 와서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우주가 유한하다는 판결이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과학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가 더
쉬워졌고, 지금은 창조주의 존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유한한 우주에 무한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정연한 논리로 말씀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했으며, 하나님에게는 모든 시간이 현재의 개념으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영존하시고, 모든 우주와 함께 그 안에 계신 것입니다. |
제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세 가지 놀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1장에 보면 물이란
이야기가 나오고 또 히브리서를 보면 만유인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베드로후서에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나옵니다. 저는 이 세 가지를 읽고 나서 굉장히 놀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과학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거기에 다 내포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또 상대성 이론이나 원자탄에 대한 모든 것이 그 몇 마디에 다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성경을 보고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주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속에서, 하나님은 무한하고 우주는 유한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가
령 유한한 물체가 여기 있다고 합시다. 이 유한한 물체는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가장자리가 있어야 되고,
하나는 무게 중심이 있어야 됩니다. 우주도 이만큼 크다고 하면 가장자리가 존재해야 되고, 또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무게 중심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
래서 천문학 하는 사람들이 우주의 중심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우주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찾아도 우주의 중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주에다가 좌표를 그려놓고, 여기가 무게 중심이다 할 수 있는 중심이 존재한다고 가정을 한다면,
아마 그 중심을 향해 모든 것이 부딪혀서 박살이 나고 말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고민하는 천문학자에게 이 성경을 보여드렸습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에 보면 거기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여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을
보여 주면서 “당신들이 찾고 있는 우주의 중심엔 누가 계시겠는가? 곧 우주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결국은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라고 했다. 하나님은 전 우주 공간에 충만하게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에겐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성경 여러 곳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서 “위” 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위를 전부 합치면 가장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일반 물리에서 말할 수 있는 우주의 중앙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주의 가장자리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천문학 하는 사람들이 고민하고 찾던 모든 해답이 이 성경에 다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붙들고 있는 힘이 도대체 뭐냐 하는 것입니다.
만유를 붙드신 능력의 하나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3) |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만물을 붙드는 힘을 만유인력이라고 정의를
하는데 이 성경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그 힘이 어떤 것인지? 힘의 에너지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강력', ‘빛', ‘약력', ‘중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크기를 비교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만일 이
강력을 1이라고 한다면 빛은 , 약력은 , 중력은 입니다. 이 강력이라는 힘을 하나로 친다면 빛은 그것의 1/10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력은 백만에 천만을 곱한 것 분의 일, 그 다음에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백만을 여섯 번 곱하고 거기다 또 천
번을 더 곱한 것 분의 일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만물을 붙들고 있는 힘은 바로 이 중력이라는 것입니다.
두 물체가 있을 때, 그 두 물체 사이에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작용하는 힘이 하도 작아서 이걸 아무도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빛은 눈으로 보면 굉장히 밝습니다. 기계를 이용해서 빛의 밝기는
얼마든지 측정이 가능합니다. 보통, 빛에 비해서 중력의 크기는 백만을 여섯 번 곱한 것 분의 일보다 더 작습니다. 이 아주 작은
힘, 중력이라는 것에 의해서 우주가 붙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중력이 어떻게 우주를 붙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물리학에서는 만유인력이라고 했고 성경에서는 능력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위의 세 가지 힘은 전부 +, - 힘인데 비해, 중력만은 전부 +, +, +입니다. 전부 합산이 가능한 힘입니다. 위의 세 가지
힘은 +, - 로 되어 있으니까 거리가 멀어지면 없어지고 말지만, 중력만은 아무리 작은 힘이지만 갈수록 더해지는 힘입니다. 소위
에디셔널 포스(Additional Force)라고 해서, 더해지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힘이지만 합쳐지기
때문에, 합치면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미세한 말씀이라고 시편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느낄까 말까 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까 말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다 대고
아무리 악을 쓰고 울부짖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진 않습니다. 그런데 저도 옛날에 교회를 다닐 때 소리쳐 울면서 기도도 해
보았는데, 성경을 읽다보니 기도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늦게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 중력같이 아주 미세한
음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떠들고 울고불고 하면 들리질 않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경을 조용히 상고했을 때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울고 떠들어 봐야 하나님 음성이 오히려 더 멀어질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경을 읽어야만 그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 그 미세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접해지는 게
아니냐 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왜 하필이면 성경에서
이렇게, 정의를 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창세기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 다음, 도대체 삼위일체가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데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뜻인데,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참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의 학문에는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우리 가까이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
느낄 수 없는 그런 대상 같으면 연구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
가끔 사람들이 성경이 뭐냐고 질문을 하면, 저는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말이 바로 이 창세기 1장 1절부터 5절까지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저 자신에 비유를 해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이것은 우리의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 사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
이 빛을 발견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후에 빛과 어두움을 가르는 마지막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5절까지가 아니겠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왜 성경 1장 맨 앞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 하셨을까?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 때 ‘물이란 무엇이며, 또 물의 성질은 무엇인가?' 등 물에 대한 연구를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 고등학교 책을 보면 아직도 물의 성질은 기현상이라고 한 데가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물의 신비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생활에서 물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고 있으며, 매일 듣는 일기예보는 바로
물 때문에,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 때문에 생기는 예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체가 75퍼센트는 물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의
75퍼센트는 바닷물로 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성경의
첫 장에 이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 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여기 창세기를 보니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물이 얼마나 신비하기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이
물은 가운데 산소가 있으며 수소를 양쪽에 들고 ㄱ자 형으로 생겼습니다. 삼위일체를 물의 형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은 세
가지의 집합형태, 즉 세 가지 상이 있는데, 기체 상태의 수증기가 있고, 고체 상태의 얼음이나 눈이 있으며, 액체 상태의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형태가, 물이란 속성이나 구조가 하나도 변칠 않습니다. 그 형태만, 즉 집합성만 다른 것
뿐입니다. 그래서 그 물 중에서도 액체로서의 물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의 각기 다른 형태인 이 세 가지가 다 자기의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으나 물이라는 속성은 다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물을 놓고
비유합니다. 하나의 물인데 세 가지 다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 가지의 역할이 다
다릅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의 하나님이셨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셨으며,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세 분이 한 분이신데 역할만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신들”
이라고 정의를 했고 복수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역사의 내용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 시대, 신약 시대, 지금 성령의 시대 이렇게 역할이 서로
다른 것 뿐이지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결국은 물이 수증기로서의 역할, 물로서의 역할, 눈이나
얼음으로서의 역할이 다른 것 뿐이지 하나의 물로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의 삼위일체도 결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러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생물학에서는 인간을 이원론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만이
삼원론으로 봤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고, 혼이 있고, 영이 하나 더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식물은 육체만 있는데 동물에는 육체와 혼이 있습니다. 모든 생각하는 영혼을 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육체와 혼 외에 영이 하나 더 있으며, 영이라고 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제
가 얼마 전에 타임지를 읽어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거의 다 오른손잡이가 많지요. 그런데 동물은 전부
왼손잡이랍니다. 그래서 맹수가 짐승을 쫓을 때 꼭 왼손이 먼저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맹수와 딱 부딪혔을 때는 오른손 쪽으로
자꾸 돌라는 이야기입니다. 왼손 쪽으로 가면 금방 동물의 왼손에 치인답니다. 오른손 쪽으로 빙글빙글 돌면 순간을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동물과 인간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영이 하나 더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보면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짐승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죽으면 그 죽은 사람에 대한 추모로 제사를 지냅니다. 죽은 영혼이 어딘가 있을 거라는 그것이 양심과 관련되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보면 그와 관련된 말씀이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령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여기에 영과 혼과 몸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은 이 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동물에 포함시켜 가지고 육체와 혼이 있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만 영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봐도
인간만이 제사를 지내고, 어떤 미개인이든 어떤 사람이든 내세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서에, 인간은 영원을 사모한다는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내세에 대한 어떤 관념이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엇이고, 또 삼위일체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