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례(劉安禮)
유안례(劉安禮)/상호군(上護軍)
♣유안례(劉安禮)[1426~1506]
집필자:安禮公 18世 後孫 유경상 劉慶相(丹陽郡 丹城面 陽堂里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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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시 금성면 자장리 소재 유안례 묘소
■: 堤川市 錦城面 慈藏里 所在 劉安禮 墓所
계유정란 [癸酉靖亂]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상호군(上護軍)
조선 전기에는 도위사(都尉使)로 개칭되었다가 태종 초에 상호군(上護軍)으로 개칭되었는데, 1467년(세조 13)에는 오위(五衛)의 고급지휘관(정3품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정원은 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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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강릉유씨 대동보 제 641페이지~645페이지 수록된 안례 행장
전자족보 제 300~305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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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二) 嘉善大夫別侍衛上護軍諱安禮公
(1) 行狀
公諱安禮字義甫號倚頭軒即文僖公諱敞之五世孫也 宣德丙午公生于開寧縣宋羅洞天性純孝至德兼備纔四歲考叅奉公下世九歲追喪事母夫人金氏至孝承顔之際下氣怡聲溫甘之奉親自調和晨昏必定省歲時上壽自歌舞以爲歡母夫人嘗病劇公斫指納血輒良己可見誠孝之格天也及長氣岸軒昻不拘常乘馬不乘轎曰坐人肩上心所不安治經之暇兼學弓術頗曉穿楊之妙焉 世宗丙寅上臨禁苑親閱武藝公射居最特賜褒論以遺明年丁卯擢武科速鍊院叅軍戊辰逮躋叅秩歷司憲府監察己巳行尙衣院主簿兼廣興軍資主簿轉至司僕判官庚午授軍器僉正陞通政尋復秩嘉善公以事養之短長上箚乞退特蒙允許人咸曰公之去實有文僖公學仙之風焉是年九月丁內艱居廬啜粥終三年不脫絰帶每上墓攀栢悲號澌毁幾滅性時値歉荒土匪大熾恣行掠殺而環公所居三十里不入曰此間有大孝劉公愼勿侵掠可見至孝之感人也上王端宗元年癸酉道臣以孝行薦聞召拜行別侍衛上護軍深蒙知遇思保涓埃矣乙亥世祖反正朝廷猜疑戒嚴公與河緯地李孟專諸賢謀議復興未幾事覺六臣被戮家無子遺降貶上王爲魯山君遠黜寧越公以稱疾辭職謂李公孟專曰我之苟存綠位竢其有爲也今事己謬矣吾將入山採微言訖相扶不覺失聲焉公乃與從弟進士安世郡守安道同歸鄕里途中相議曰我今歸開寧則越中路遠玉音遲暮且人懷是非恐爲身累遂入淸風郡北居山洞以爲安息之所而潛通氣脉于寧越以故上王得知六忠之外復有六忠也公與從弟卜居一村志存雅潔不近喧囂文行夙著友愛亦篤鄕隣信福逾年成村手植槐杏杏下盤石刻日影圖築亭數椽揭以倚斗軒因以自號盖扁名取杜詩每倚北斗望京華之義也及聞上王之遇變三日絶粒吞聲悲號每月朔登前山最高峰設壇焚香東望號哭如是四十餘年終是不怠雖巉岩蒙茸之間跡印成路焉自所居至山甞踰一谷時人號其谷曰朝王谷指其山曰國思峰藏之以深谷仰之以高山可見至誠之感人深而人地共輝也千載之後雖山崩谷遷公之遺蹟豈可與之俱泯而無傳號古人云求忠臣必於孝子之門若公可謂在家盡孝在國盡忠宜號其遺風餘韻藹然被仁山智水之間矣公生于世宗八年丙午正月七日中宗元年丙寅十月八日考終于倚斗軒享壽八十一丁卯禮瘞冠屨於慈藏洞亥坐之原終三年後公之子忠順衛弼來請狀德之文余於公素講姻媾之宜且切劉感於公之忠孝不辭無文遂摭其萬一而記焉
正德四年己巳(日烏○七年) 通政大夫成均館博士兼春秋館修撰官 安東 金昌世 謹狀
가선대부 별시위상호군 휘안례공행장
公의 휘는 安禮요 자는 義甫이며, 호는 倚斗軒이니 곧 文僖公 휘 敞의 5세손이다.
宣德 丙午, 李朝 世宗 八年(서기一四二六년)에 公이 開寧縣 松羅洞에서 태어났는데, 天性이 純孝하고 착한 德을 겸하여 갖추었었다.
겨우 四歲에 先考 叅奉公께서 세상을 버렸는데, 九歲에 ①追喪하고 母夫人 金氏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을 뵈일 때는 기운을 낮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溫恭하게 받들어 스스로 和樂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居處를 살펴 問安을 드리고 歲時나 生辰에는 스스로 歌舞로써 母夫人을 기쁘게 해 드렸다. 母夫人께서 일찌기 病患이 위독하심에 公이 손가락을 깨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드려 문득 快差하였으니 가히 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음을 보겠도다.
장성함에 이르러 氣稟이 헌걸차서 남에게 얽매이지 앟더니, 항상 말을 타되 轎子를 타지 않고 말하기를 「남의 어깨위에 앉으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였다. 經書를 공부하는 餘暇로 겸하여 활 쏘는 기술을 배워 자못 ②穿楊의 神妙함을 얻었더니, 世宗 丙寅(서기一四四六년)에 ③主上께서 ④禁苑에 임하시어 친히 武藝를 觀覽하셨는데 公이 당시 그에 참여하여 가장 칭찬을 받았다.
이듬해 丁卯(서기一四四七년)에 武科에 及第하여 訓練院參軍에 제수되었더니, 戊辰(서기一四四八년)에 陞進하여 司憲府監察을 지내고, 己巳(서기一四四九년)에 尙衣院主簿에 옮겨 廣興倉및 軍資監主簿를 겸하고, 이어 司僕寺判官으로 옮겼다가 庚午(서기 一四五○년)에 軍器寺僉正으로 通政大夫에 陞進하고 곧바로 嘉善大夫에 陞階되었다.
公께서 어버이 奉養할 기회가 짧고 긴 것을 들어 ⑤箚子를 올려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특별히 ⑥允許를 얻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公의 관직에서 떠남이 실로 文僖公의 仙術을 배우고자 하던 氣風이 있다」고 하였다.
同年 九月에 母親喪을 당하여 廬墓에서 지내면서 粥을 먹으며 三年이 다하도록 ⑦絰帶를 벗지 않고, 매양 묘소에 올라가 잣나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므로써 몸이 쇠약하여 거의 本性을 잃기에 이르렀다.
당시 큰 凶年을 만나 土賊들이 크게 성하여 제멋대로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였으되, 公이 살던 곳 三十里 둘레는 들어오지 않고 이르기를 「이 사이에 큰 孝子 劉公이 살고 있으니 삼가 侵犯하거나 掠奪하지 말라」 하였으니, 가히 그 孝誠이 사람을 감동시켰음을 보겠도다.
⑧上王 端宗 元年 癸酉(서기一四五三년)에 ⑨道臣이 公의 孝行을 천거함으로써 朝廷의 부름을 받아 別侍衛上護軍에 除授되어 관직을 지내며 깊이 ⑩知遇를 받게된지라 작은 은혜라도 보답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乙亥(서기一四五五년)에 世祖의 反正이 일어나 朝廷이 온갖 시기하고 의심하며 경계가 삼엄하였다. 公이 河緯之⋅李孟專등 諸賢으로 더불어 端宗의 復位를 謀議하다가 얼마 안되어 일이 발각되어 六臣이 죽엄을 당하고 그 가족들을 남김없이 沒殺하는 한편 端宗을 降等하여 魯山君으로 칭하고 멀리 寧越로 쫓아 내었다.
이에 公이 病을 핑게하고 관직을 사직한 후 李公孟專에게 이르기를 「내가 구차히 ⑪祿位를 가졌던 것은 그 장차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는데 이제 일이 이미 어글어지니 내 장차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으리라.」하고 말을 마친 후 서로 붙들고 울음을 터뜨려 마지않았다.
공이 이에 從弟 進士 安世와 郡守 安道로 더불어 鄕里로 함께 돌아오다가 途中에서 서로 의논하기를 「내가 이제 開寧으로 돌아가면 寧越 길이 멀어 ⑫玉音을 듣기가 더디고, 또 사람들이 是非를 품으리니 내가 허물을 쓸까 두렵다.」하고, 드디어 淸風 고을 북쪽 居山洞으로 들어가 安息할 곳을 삼고 살면서 몰래 소식을 寧越로 통하였다.
때문에 上王이 이미 죽은 여섯 忠臣외에 또 여섯 忠臣이 있음을 알으셨다. 公이 從弟로 더불어 한 마을에 살면서 뜻을 端雅하고 高潔하게 가져 시끄러운 곳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文行이 드러나고 友愛가 또한 독실하니 고을에서 모두 信服하였다.
一年 남짓에 마을이 조성되자 公이 손수 槐杏을 심고 은행나무 아래 큰 바위에다 日影圖를 새기고 몇칸 亭子를 지어 倚斗軒이라 懸板을 걸고 그로써 自號하였으니 대개 그 懸板 이름은 杜甫의 詩에 이른바 「매양 北斗星에 의지해 ⑬京華를 바라본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上王께서 變을 당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三日동안 입에 곡식을 끊고 소리없이 슬피 울부짖으며 탄식하여 마지않더니, 每月 초하룻날 앞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壇을 설치, 焚香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痛哭하기 四十餘年을 하루같이 행하되 끝내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그 높은 바위 깊은 숲 사이가 발자취에 길이 환히 이루어졌다.
公이 사는 곳으로부터 上王이 계시는 산까지 한 골짝 사이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 골짝을 朝王谷이라 부르고, 그 산을 가르쳐 國思峰이라 불렀다.
깊은 산골에 자취를 감추었으나 높은 산처럼 우러렀으니, 지극한 정성이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어 그 지역이 빛남을 가히 보겠도다. 千年 후에 비록 산이 무너지고 골짝이 옮길지라도 公의 遺蹟이 어찌 그와 함께 泯滅되어 傳함이 없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되 「忠臣을 반드시 孝子의 家門에서 求한다.」하였으니, 公과 같은 이를 가히 이름이라. 집에 있어 孝道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 忠誠을 다하니 마땅히 그 遺風餘韻이 어질고 지혜로운 山水사이에 왕성하게 전하리라.
公께서 宣德 元年 丙午, 世宗 八年(서기一四二六년) 正月七日에 태어나 正德 元年 丙寅, 中宗 元年(서기一五○六년) 十月八日에 倚斗軒에서 돌아가시니 享壽 八十一세였다.
이듬해 丁卯(서기一五○七년)에 禮를 갖추어 慈藏洞 亥坐의 언덕에 葬事를 모시었다. 그로부터 三年 후에- 公의 아들 忠順衛 弼이 나에게 와서 行狀을 청하는바 나와 公과는 본래 婚姻으로 인한 親誼가 있는데다 또 公의 忠孝의 행실에 感懷가 간절하여 글은 못하지만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公의 행적에 만분의 일이라도 간추려 기록하였다.
註
① 追喪 : 喪變을 당했을 때 어리거나 어떤 사정으로 居喪을 못하다가 나중에 服을 입고 三年喪을 치름.
② 穿楊 : 활을 매우 잘 쏘는 것을 말함. 옛날 中國의 養由墓라는 유명한 弓手가 百步 밖에 있는 버들 잎을 하나하나씩 百發百中했다는 故事에서 유래한 말.
③ 主上 : 임금. 당시 임금을 일컫는 말.
④ 禁苑 : 대궐 안의 後苑. 秘苑. 御苑.
⑤ 箚子 : 疏章의 하나.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간단히 사실만을 기록하여 올리는 글. 奏箚. 箚文.
⑥ 允許 : 임금이 허가함. 裁可함.
⑦ 絰帶 : 喪服을 입을 때 머리와 허리에 두르는 삼으로 된 띠. 즉 喪服.
⑧ 上王 : 太上王의 약칭. 王位를 물려주고 들어앉은 임금을 높여 이르는 말.
⑨ 道臣 : 觀察使의 異稱. 道伯.
⑩ 知遇 : 學問이나 才能을 인정 받아서 좋은 대우를 받음.
⑪ 祿位 : 俸祿과 地位. 즉 官吏.
⑫ 玉音 : 임금의 음성.
⑬ 京華 : 번화한 서울. 都城을 이름.
(2) 碑文 忠北 堤原郡 錦城面 活山里
公諱安禮江陵(玉川)人也中朝兵部尙書諱荃地後也七代祖諱承備麗朝文科左僕射六代祖諱松栢文科上護軍我朝贈正憲大夫都摠府都摠制五代祖諱天鳳文科行知安岳郡事我朝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領經筵判兵曹事高祖諱敞我太祖朝開國功臣玉川府院君大匡輔國崇祿大夫寶文閣大提學世子貳師諡文僖公號仙庵曾祖諱仁悌通訓大夫行郡守祖諱德通德郞考諱繼成行獻陵叅奉 公登武科別侍衛上護軍戒在盛滿志結遯荒遂入淸風居上里始居焉從弟平海郡守安道亦從之崇信義篤儒術逾年成村手植槐亭之下盤石刻日影圖至今尙存 子弼行忠順衛孫世英掌樂院主簿次孫世雄季孫世俊後派居初
崇禎紀元後四癸未十月 日(西紀一八二三年) 十一世孫 東泰 希泰
별시위상호군 휘안례공 비문
公의 휘는 安禮니 江陵人으로 中朝의 兵部尙書 휘 荃의 후손이다.
七代祖 휘 承備는 高麗朝에 文科에 급제, 左僕射이며 六代祖 휘 松栢은 文科로 上護軍인데 우리 朝鮮朝에서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領經筵 判兵曹事에 贈職되었으며, 高祖 휘 敞은 우리 太祖朝 開國功臣으로 玉川府院君 大匡輔國崇祿大夫 寶文閣大提學 世子貳師 諡文僖公 號仙庵이시며, 曾祖 휘 仁悌는 通訓大夫 行郡守이며, 祖 휘 德은 通德郞이며, 考 휘 繼成은 行獻陵叅奉이시다.
公께서 武科에 登第하여 別侍衛上護軍을 지내쓴데, 집안이 너무 번성함을 경계하여 시골로 자취를 숨길 것을 결심하고, 드디어 淸風 居上里로 들어가 그곳에 비로소 定着하였다. 한편 從弟 平海郡守 安道도 역시 公을 따라 이곳에 살면서 함께 信義를 숭상하고 儒術을 독실히 닦았다. 일년 남짓에 마을이 조성되자 公이 손수 심은 槐나무 亭子아래에 盤石에다 日影圖를 새겼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아들 弼은 忠順衛요, 長孫 世英은 掌樂院主簿요, 次孫은 世雄이요, 季孫은 世俊인데, 후손이 모두 이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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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안례(劉安禮)/1426년~1506년
- 1447년(세종 29)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이 되다.
-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이 되었고, 1450년(세종 32)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 되었다.
- 1455년 10월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亂)으로 세조가 즉위하자 낙향하여 ㄱ고향 경북 개녕(開寧)으로 가다가 그곳은 단종 영월 청랭포와 멀어서 제천 금성면 활산리에 금성면 활산(活山)에 은거하였다.
어원사전 - https://www.zdic.net/hans/%E5%80%9A
- https://hanyu.baidu.com/zici/s?wd=%E6%96%97&query=%E6%96%97&srcid=28232&from=kg0
- https://hanyu.baidu.com/zici/s?wd=%E8%BD%A9&query=%E8%BD%A9&srcid=28232&from=kg0
- 유안례의 별칭은 의두헌(倚斗轩)인데 그럼 ,두헌(斗軒)은 무슨 뜻인가를 알아 보자.두헌(斗轩)에 기대서서 라는 뜻이 되겠다.그럼 두헌(斗轩)은 무엇인가.우선 그럼 헌(軒)의 뜻을 먼저 알아보자.처마헌 이렇게 표기되는 軒이란 한자의 뜻은 서재(書齋)나 차관(茶館)이다.두(斗) 이곳에서는 북두칠성의 의미를 적용한다면 두헌(斗軒)이란 이름은 참으로 운치있는 공간이다.軒이 들어간 수많은 작은 건물들의 이름이 들어간 명소들을 우리는 볼 수있다.밥집이나 찻집의 상호로도 옛날에는 쓰였고,또는 창문이 있는 복도 공간을 나타내기도 한다.이러한 공간에서 북두칠성을 심야에 바라보는 그러한 운치를 우리는 상상한다.의두헌이란 이러한 공간에 서서 심야에 홀로 흘러가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그 심회를 느낄 수있는 호(號)를 지은 유안례(劉安禮)의 인물됨을 이 호에서부터 느낄 수있는 것이다.이 유안례는 세조의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 찬탈에 상호군의 자리를 던지고 내려 와 불쌍한 어린 임금 단종(丹宗)의 영월 청랭포쪽을 바라 볼 수있는 제천 청풍의 활산리 소재 국망봉(國望峰)아래서 옮겨 와 살면서 강릉유씨 군수공파에서 이제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강릉유씨 군수공파 이하 상호군파의 시조가 된다.그 후손도 이제는 상당히 많으며,그곳에는 그곳 지명 자장리(慈藏里)를 따서 자장재(慈藏齋)란 이름을 붙인 재실을 이십여년 전에 지었다.이 자장리는 통상 지역에서는 자재기 마을이라고 불린다.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한 제천 금성면의 한 마을이다.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이 의두헌은 기두헌이라고 표기되는 곳이 자주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강릉유씨 족보에도 유안례를 검색하면 기두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의(倚) 이 글자를 기(奇) 이 글자와 모습이 좀 비슷하니까.잘못 착각해서 불렸던 이름이며 오기에 해당된다.비단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한자 명칭의 오기가 부지기수로 아직도 나타나고 있음은 애석한 일이다.지금의 인터넷 한자사전에서 倚 이 한자를 검색하면,기댈의 기이할 기.....이렇게 표기되어 나타남을 볼 수있을 것이다.이상할 기(奇)와 혼돈한 것인데 코메디에 해당한다.어서 어서 서둘러 인터넷 다음사전은 이 표기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倚의 원 발음이 오직 yi로 표기 됨으로써 "의"로 밖에 표기 될 수없기 때문이다.참고로 기(奇) 이글자의 발음은 qi로 표기 됨으로써 한자가 당나라 시대를 전후하여 한반도에 들어 올때 즉 한국어 상고음(上古音) 시대에 한자 전입되면서 그 발음도 함께 따라 올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발음의 혼돈과 비슷한 표기상의 혼돈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시대를 거쳐오게 되는데 이러한 잔재가 오늘날 아직도 다음사전에서 나타나게 된다.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어원사전에서 더욱 심층다룰 문제여서 벽뒤에 또 벽이 있는 집도 있을 수있어서 학문에는 절대적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는 없다;우리가 당음(唐音)과 오음(吳音)등으로 그 한자의 한반도 수입당시의 역사적 한자음의 기묘한 변천을 전부 알 수는 없는 것이다.현대의 중국어 어원을 파악해 보면 그러함을 이곳에서 말 하고 있는 것이다.의두헌(倚斗軒)의 발음은 기두헌이 아닌 것이다.의두헌인 것이다<慶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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