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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란 이별의 글씨/문주란

송화강 2011. 2. 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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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란 ( 본명은 필연 ) 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문주란의 아버지 문기봉씨는 당시 서면 택시회사라는 운수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부산에서도 알아주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문주란은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지내었다.
그러나 세 살 되던 해 문주란은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아직 말도 잘하지 못하고 걸음마를 배울 무렵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문주란은 이후 우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곧 재혼하여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동생이 태어나자
그 녀는 더욱 외로움을 타고 우울해졌다.
가족들은 그 녀가 노래를 참 잘했지만 누군가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하면
이상하게 골을 내는 특이한 성격이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천에 하나 있기 드문 매혹적인 저음의 가수 문주란.
그녀가 음치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면 믿어질까?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녀는 항상 음악 시간에는 기가 죽어 있어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 부터 그녀의 목소리는 허스키에 분위기 있는 저음이었기 때문에 동요나 음악 교과서에 있는 노래를 부르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 점수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오락회가 열리면 문주란은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유향가요를 멋지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상 대여섯 곡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무대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고
그녀가 노래 부를 때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진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다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문주란이 중학교 1학년 학생일때 아버지의 사업이 급작스레 부도를 맞았다.
항상 유복하게 살던 그녀와 가족들은 어쩔 수없이 옹색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과 함께 갑자기 다가온 환경의 변화는 문주란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중학생 때 문주란은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을 교지에 발표하는 문학소녀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의 어느 날, 문주란은 동네에 공연온 유랑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가족들 몰래 유랑극단을 따라가 계속해서 꼬마가수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고
일당 50~80원씩 받으면서 극단생활을 했다.
얼마후 극단생활에 싫증이 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온 문주란을 2년 동안 근신 시켰다고 한다.

 

 

1965년 문주란은 부산 MBC의 노래자랑 프로그램인 '톱싱거대회'에서

「보슬비 내리는 거리」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후로도 부산에서 열리는 공개방송마다 나가 모든 상을 독차지 했다.

그녀는 접어두었던 가수에의 꿈을 다시 키우기 시작했고 집안의 가족들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1966년 문주란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서울로 향한다.

문주란은 언니의 집에서 묵었고 그녀가 가수로 데뷔한 후에는 언니가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이 때 그녀는 작곡가 백영호를 찾아가 가수로서의 테스트를 받았다.

문주란의 음색에 반한 백영호는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그녀는 지구 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이때 그녀의 원래 나이보다 좀 어리게 소개되었다고 한다.

 



'특수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쉰듯한 저음이면서도 노래가 부드러워서

서구적인 음율에 맞는 고급스러운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문주란을 발굴한 백영호의 견해이다. 문주란은 「동숙의 노래」로 데뷔하여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미자와 비교될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1966년 9월 처음 발매된 문주란의 데뷔앨범은 발매가 되자 마자 2만여장이 팔려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미자의 「잊을 수 없는 연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또한 동양방송가요대상의 신인상, 공보부제정 제 1회 무궁화상 장려상의 가수상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하여 그녀는 성공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잘 모르겠심더'
톱가수가 된 문주란은 인터뷰 때마다 귀여운 사투리를 쓰며 팬들의 애정을 독차지했다.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 사랑노래를 잘 부르냐며 놀리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문주란은 사랑은 잘 모르지만 사랑의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고 응수했다.

그녀의 취미는 성냥갑과 우표를 모으는 것이었다.
가수로 데뷔한 지 반년도 지나기 전에 가요계의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문주란은 계속해서 꾸준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정신없이 바쁜 스케줄에 매여있었지만 레코드가 나오자마자

작곡가인 백영호와 함께 들어보고 결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공부를 계속하여 세계적인 가수가 되는 것이 문주란의 꿈이었다.

 

 



1969년 2월 15일 문주란은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매니저 역할을 하던 언니와 세탁물관계로 가볍게 다투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가족들은 문주란이 약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족들은 서둘러서 그녀를 메디컬 센터에 입원시켰지만 상당기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음독직후에는 그녀의 호흡중추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얼마후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먹은 것은 극약이 아니라 다량의 수면제와 중추신경안정제의 혼합물이어서 문주란이 의식을 회복한 후 별 후유증이 없었던 것이다.
'흠씬 젖은 머리칼이 밤에 익으면 고질적인 가슴의 병이 맴돌아 거침없는 울화는 거리를 간다'
문주란이 자던 방에 남겨져 있는 이 미묘한 내용의 쪽지를 보면 폐가 좋지않아 고민해왔던 점이 드러나고 있다.

 

 



1970년 문주란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로 한참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어린 여가수의 은퇴선언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문주란은 '나는 너무 지쳐있다. 너무 피곤해서 푹 쉬었으면 한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문주란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모든 살림과 짐들을 고향인 부산에 보내버렸다.

그녀는 여러 번의 스캔들과 음독소동 등에 의해 지쳐있었던 것이다.

인기에 오르내림에 민감한 가요계 현실에 환멸을 느꼈고

어른들의 세계를 알았을 때 오는 두려움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의 피곤함은 어쩌면 너무나 빨리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70년 4월 15일 TBC TV에서의 고별쇼만 끝나면 곧장 서울을 떠날려고 했던

문주란의 은퇴 선언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녀가 팬들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할 때 사회를 맡았던 곽규석과 구봉서가

문주란에게 은퇴를 취소시키기 위해서 그녀를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스크립트를 완전히 무시한 체 가수생활을 계속하라고 어린 후배인 문주란을 토닥여 주었다.

게다가 가요계의 대선배인 이미자도 가수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기 위한 운명이라면서 문주란에게 충고했다.
이런 선배들의 반대에 문주란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문주란이 은퇴를 결심한 것은 노래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물질 만능의 가요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1972년 12월 2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서울시민회관에서 촛불로 인한 화재가 일어났다.

문주란은 공연을 위해 준비하던 중 불길에 놀라서 2층 분장실에서 뛰어내렸다.

이때의 충격으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문주란은 사람의 명이란 순간적인 사고로도 없어질 수 있는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게 완쾌하면 즐거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화재사건 후 한달만에 문주란은 방송에 출연하면서 다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몸을 다치기 전부터 치던 볼링도 다시 시작했다.

문주란의 볼링솜씨는 거의 프로급으로 에버리지 240 정도인데 이러한 실력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는 강한 결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1975년 문주란은 가수생활 13년 만에 첫 리사이틀 콘서트를 가졌다.

그녀의 리사이틀은 당시 극도록 침체된 극장쇼계의 상황으로 인해서

서울이 아닌 지방 10대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리사이틀이 시작하기 전 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수의 리사이틀에 대한 두려움을 얘기하는 문주란은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다.

마산, 대전, 군산 광주, 우란, 포항, 안동전주 등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리사이틀을 위해서 하루에 10시간씩 연습을 강행하고 객석이 텅비어있거나 노래가 잘 안되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원래 160센티미터의 키에 40kg이 채 되지 않는 갸냘픈 몸이었던 문주란은 이 리사이틀을 준비하면서 더 마르고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동생 문준호의 데뷔 리사이틀을 겸한 이 리사이틀에 문주란은 가수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빈틈이 없도록 노력했다.

 

 

 



문주란은 70년대 후반부터 「공항의 이별」, 「공항에 부는 바람」등등 공항시리즈 대중가요로

다시 한번 가요계의 정상에 섰다.

그리고 1981년 문주란은 일본의 킹 레코드사와 2년 전속 계약을 맺고

「지로와나」, 「공항의 이별」, 「가슴아프게」, 「이슬비」 등의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가요가 담긴 앨범을 내었다.

처음 문주란은 단순히 초청되었다가 녹음에 들어가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매혹된 일본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전속계약을 맺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일본의 최고의 엔카가수 미조라 히바리와 맞먹는 대우로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되었다.

일본측에서는 문주란의 매혹적인 저음이 일본 정상급의 가수에 절대 뒤지지 않는 좋은 가창력을 가지고 있어 기대된다고 극찬했다.
'일본에 와서 한국에서 갖고 있던 명성도 지위도 다 버리고 신인가수로서 데뷔했다.'
라고 마음의 자세를 밝힌 문주란은 관습과 말, 음식등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일본에서 공연과 앨범, 양쪽에서 충실한 활동을 하여 한국인으로서 성공한 또 한명의 가수가 되었다.

 

 

 



80년대 중반 문주란은 「백치 아다다」란 노래로 팬들의 관심을 모으려던 즈음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쉽게 활동을 접게 되었다.

그러나 문주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업과 음악 양쪽에 정열을 쏟았다.

1993년에는 그녀는 외가쪽 친척인 임종성씨가 쓰레기처리용 기구를 개발하기까지

수십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것을 보고 주방쓰레기 재활용 처리용 '다써(DASO) 전문 생산업체 ㈜뉴대갑 엔지니어링을 창업했다.

원래 환경문제와 쓰레기처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사업이 우리나라 사회발전에 조그만 밑거름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한편 그녀는 음반사 문기획의 대표이사이기도 했는데 문기획은 레코드기획과 제작을 겸할 수 있는 회사였다.

가수로서도 양인자 김희갑 부부가 각각 작사,작곡하여 그녀에게 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상당한 상당한 인기를 얻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멸의 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끊임없이 피어나는 대중의 연인이 되길 원하고 있다.

 

 

 



문주란이 출연한 영화 '애정이 꽃피는 계절'은 대영흥행이 1974년에 제작하여 1974년 9월 13일에 개봉된 영화이다.

박옥상 각본에 윤정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문주란 외에 역시 가수였던 남진이 함께 출연하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김사장의 집에서 식모생활을 하던 이쁜이와 영진의 일과 사랑의 성공을 그리고 있다. 이쁜이는 가난한 고향마을을 도와주기 위해 새벽에는 우유배달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는 착한 소녀이다.

그녀의 남자친구 영진은 농과대학생으로 김사장집의 가정교사로 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영농을 위해서 양송이 농장에서 일한다. 충분한 저축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이쁜이와 영진은 협동농장을 세우고 주위사람들의 축복속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검은 눈동자에 맺히는 이슬처럼
이슬비 소리없이 내리던 밤길
서로 가슴깊이 상처난 아픔이길래
안녕도 못하고 깨물던 입술
아아 그러나 이슬비 다시오면
먼날 그리워지는 파란 이별의 글씨

서로 가슴깊이 상처난 아픔이길래
안녕도 못하고 깨물던 입술
아아 그러나 이슬비 다시오면
먼날 그리워지는 파란 이별의 글씨

출처 : 아름다운 60대
글쓴이 : 사랑방하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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