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鳳仙花)
봉선화(鳳仙花)의 슬픈 전설(傳說)
고려 26대 충선왕이 몽고의 공주보다 조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몽고의 서울로 붙들려 갔는데 그는 항상 고국을 그리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어느날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뜯는 꿈을 꾸웠
는데 줄을 뜯을 때마다 소녀의 열 손가락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난 왕은 하두 이상해서 궁녀를 모두 조사했더니 열 손가
락에 모두 흰 헝겁을 동여맨 눈먼 궁녀가 있어서 그 신분을 물었습니다.
그는 고려에서 온 궁녀인데 집이 그리워 울어서 눈병이 났고 손가락은
봉선화를 물들이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왕은 타국에서까지 자기 나라
풍습을 지키는 것이 기특해서 소녀와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는 충선왕
파라서 관직에서 쫓겨났다면서 충선왕께 바치라고 준비한 가락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것은 꼭 성공해서 고국에 돌아가시라는 가사가 곁들여 있는
가야금 가락이었습니다.
왕은 감격하여 그 후 노력한 결과 고려에 돌아 올수 있었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은 몽고에 억류돼 있을 때 소녀의 일을 생각
하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소녀는 죽은 후였습니다. 왕은 소녀를 기념하는
뜻에서 궁궐의 뜰에 많은 봉숭아를 심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봉선화에 얽힌
가슴아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 나라 현대사에도 민족의
저항을 표현하는 애창가곡 가사가 하나 더 있죠.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시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침략자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고 삼천리 금수강산 문전옥답을
통째로 빼앗긴 이나라 백성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남부여대하여 국경밖인
만주땅 북간도로 연해주로 떠나던 시절 처량한 자신들의 처지를 탄하며
저항가로 불리워진 가곡이기도 하는데 지난 늦은 봄 날 아침 주말농장 한 켠에
먹을 수 있는 야채가 심겨질 자리에 봉선화 열 두그루가 세줄로 나란히
심어져 있어 봉선화의 내력을 잘 아는 집에서 딸들의 손톱에 물들여 주며
새겨보라는 가르침이 곁들여 있는 것 같아서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습니다.
살아온 생애(生涯)를 되돌아보고 아득히 먼 옛 소년 소녀시절을
떠 올려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고 앞 날의 꿈과 희망에
가슴 부풀었던 지금은 참으로그리운 시절이었습니다. 특히나 소녀들은
엄마가 또는 언니가 봉숭아의 잎이나 꽃술을 짓찧어서 손톱에 물 들여
주면 아름다운 빛깔이선명하여 사랑스럽게 보이기도 했었는데 위의
봉선화의 꽃 이야기에는 슬픈 사연들이 많군요....
[소프라노 최영식의 우리 가곡이야기] 민족의 저항가곡"봉선화(鳳仙花) 이야기
''나 죽으면 연미복으로 내 몸을 덮어 주시오...''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홍난파...그가 바로 한국최초의 가곡으로 불리는 봉선화의 작곡가이다. 음악전문지 발행인 또한 소설가로도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친 난파는 3.1운동이 나던 다음 해인 1920년 그의 나이 22세때 ''처녀혼''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한 그는 이 소설집의 서장에 ''애수''라는 곡명의 바이올린 곡을 실었다. 5년 뒤 김형준(작년에 작고하신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이 이 곡에 가사를 붙여 ''봉선화''가 탄생된 것이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을 표현한 듯 하다.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로, ''봉선화''는 한많은 겨레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였다. 부인할 수 없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민족의 애환을 같이한 민족의 노래라는 점에서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보다 3년 앞선 박태준의 ''사우''(동무생각)가 한국 최초의 가곡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나타내기에 충분한 노래임에 틀림없으나 초창기 한국가곡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 말은 강세가 첫 박에 와야 한다. 그런데 ''봉선화''는 약박으로 노래를 불러야하는 모순이 생겨 음악적 엑센트를 무시하고 언어의 엑센트를 살려 노래해야 가사의 느낌을 전달 할 수 있다. 약박으로 노래를 불러야하고 오히려 ''선''이 강박에 있어서 ''선''을 강하게 불러야하는 리듬상의 문제점이 있다. ''동해''에서''해''를 강박으로 불러야하는 난센스를 빚고 있다. 동해의 물이 아니고 동쪽의 해물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공원에서 한복을 입고 처음으로 ''봉선화''를 불러 한국인 유학생을 오열케 했다. 김천애는 일본 경찰에 붙잡히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조국이 환생하기를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담은 듯 하다. 이러한 내용으로 ''봉선화''는 삽시간에 온겨례의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다. 소프라노 김천애가 빅터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봉선화를 취입한 것이 커다란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상시의 봄처녀'', ''사랑'', ''옛동산에 올라'', ''고향생각'', ''성불사의 밤'', ''금강에 살으리랏다'', ''사공의 노래'' 등 19곡이 있다. 홍난파는 ''오빠생각'', ''고향의봄'', ''낮에 나온 반달'' 등 100여곡에 달하는 동요를 썼으며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쓰기도 했다. 1954년에는 난파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매년 경기도 수원에서 난파음악콩쿠르를 비롯하여 갖가지 행사를 개최하여 난파의 넋을 기리고 있다 - 청석 옮김 -.
1941년, 그는 숨을 거두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1941년 43세의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 지휘자, 음악교육가,
가사의 내용을 보면 울밑에 핀 봉선화의 가련한 모습이 마치
봉선화는 최초의 한국가곡이라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중요성을
그런데 봉선화의 가사를 붙인 시기가 1925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봉선화''는 애수를 띤 멜로디와 가사의 애절함으로 우리 민족의 애환을
예를 들면 못갖춘 마디로 시작하는 멜로디에 가사를 얹을 경우,
즉 ''울밑에선 봉선화야''에서 ''울밑에''까지가 못갖춘마디로 시작되어서
''애국가''에서도 ''동해물과''의 ''동''이 약박으로 시작되어
이러한 문제들은 초창기 한국가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계라고 하겠다.
당시 소프라노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천애는 도쿄의 히비야
''봉선화''는 가을에 졌다가 새봄에 다시 피는 봉선화처럼
홍난파의 가곡에는 봉선화 이외에도 ''조선 가요작곡집''에 수록된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는 홍난파의 생가가 있다.
봉 선 화
김형준 작시/홍난파 작곡
바이얼린 연주
1.울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2.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3.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 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 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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